[우리문화신문=김영환 교수]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학자가 친일파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까? 지난 1994년 초에 문체부는 국어학자 이희승을 그해 10월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이 일을 계기로 여러 벗들과 이희승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이희승이라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서울대 교수요 올곧은 선비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 그가 왜 한자 혼용을 주장했을까. 한글은 쉬운 글자로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아닌가.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기에 인색한 해외의 편견을 깨부술 가장 훌륭한 증거가 아닌가.
그냥 이런 단순한 의구심에서 몇몇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는 경성제대 일본인 스승이 가르쳐 준 ‘과학적’ 국어학을 따랐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참여한 까닭도 형태주의 맞춤법이 규칙성을 강조한 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조선어학회의 인연은 스쳐가는 정도였다.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우며 앞장서서 수십 년 동안 조선어학회의 전통과 대결하였다. 제국대학에서 일본인 스승한테 배운 것을 그대로 고집하며 국어학계에 대립과 파쟁의 골을 깊게 팠다. 그가 지었다는 《국어대사전》도 조선어학회의 전통과 대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낡은 통념을 깨뜨리기 위해 싸우면서 깨달은 점 하나로 무책임한 이 땅의 지식인, 특히 학벌을 쏘시개로 한 대학과 언론을 잇는 끈은 상상 이상으로 끈끈하다고 느꼈다. 이런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져주는 연구자, 언론인은 드물었다. 제기된 논란에 침묵하거나 낡은 생각을 계속 퍼뜨렸다. 1996년에도 이희승 학덕 추모비를 제자들이 남산골에 세우고 회고록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창비)이 나오자 많은 사람이 내 주장에 동의하는 줄 알고 있었던 나로서 는 실망이 컸다.
‘과학적’ 국어학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뒤로도 이희승 비판이 옳다거나 틀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개인적으로도 해 주는 연구자들도 만나지 못했다. 가장 무책임한 버릇은 이희승의 학문 세계에 관한 낡은 주장을 지금도 되풀이하는 것이리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관심가질 값어치도 없는 것처럼. 비판자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학계에는 왜 껄끄러운 주제에 대해 토론이 없을까? 발언해 보았자, 이미 ‘과학적’ 국어학의 패권이 확고한 현실에서 논총 받을까 걱정도 되기 때문이 아닐까? 더러는 판단이 안 설 수도 있겠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일은 국가기관에서 그를 독립운동가로 기린다는 사실이다. 2012년 국가보훈처(당시 처장 박승춘)에서는 시월의 독립운동가로 이희승을 선정했다. 독립기념관, 광복회와 공동으로 하는 사업이었다.
요즘에는 광복회 누리집에 이희승이 한글로 쉽게 풀이하였다는 독립선언서가 올라 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근거 자료를 찾아 나섰다. 《이희승 전집》(서울대 출판문화원)에도 그런 글을 찾을 수 없었다. 월간지 《새벽》 1955년 3월호에 <獨立宣言書 解說(독립선언서 해설)>(56-59쪽)이란 이희승의 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희승이 쉬운 말로 고친 독립선언서는 광복회 누리집에 떠 있는 글과 사뭇 달랐다.
“우리는 지금 우리 나라가 獨立 國家인 것과 우리 민족이 自主民族인 것을 宣言한다.”(《새벽》의 이희승 풀어쓰기)--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광복회 누리집에 소개된 ‘이희승 박사 한글풀이본’)
광복회의 "3.1절 독립선언서(이희승 박사 한글풀이본)" 보러가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근거도 없이 이희승을 감싸고 도는가? 박근혜 정부의 사랑을 받던 박 처장의 결단이었을까. 이희승이 개인적으론 민족의식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희승은 학문세계에 선 철저히 일본인 스승을 따랐고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에 대항하였다. 한자 혼용론을 뒷받침하던 그의 주장은 앞으로도 이어야 할 유산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글 독립을 방해하고 우리말 낱말의 70% 이상이 한자말이라 우긴 그를 과연 독립유공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8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이제 이 껄끄러운 주제에 대해 찬반 어느 쪽이든 공개적으로 논의했으면 좋겠다. 이희승 문제, 국어학에서 경성제대의 ‘유산’ 문제가 제기된 지 이제 곧 한 세대에 이르게 된다. 이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단계도 지난 것 같다. 오랜 침묵의 벽을 깨뜨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