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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개발, 신기루처럼 사라져

[서평] 《개발 없는 개발》, 허수열, 은행나무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18]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그저 감정적으로만 이 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처럼 자료에 입각하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을 거쳐 이를 비판하는 책은 없을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쓴 《개발 없는 개발》이 보이더군요. 당장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허 교수는 오랫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사는 침략, 수탈, 저항 등의 키워드로 뒤덮여왔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한 맞바람은 외국에서 왔습니다. 피티(Mark R. Peattie)가 ‘개발과 수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개발’이라는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개발의 측면을 부각시키지만 여전히 ‘수탈’에 방점이 찍혀 있었는데, 점점 더 ‘개발’에 비중을 드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바로 이런 학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허 교수는 일제 강점기 각종 경제통계를 훑어보면, 개발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 지배가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조선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부당한 것이었다는 점도 명백하다고 합니다. 한편 개발론자들은 식민지 조선을 하나의 독립된 경제단위로 의제하여 분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민족문제나 계급문제와 같은 것은 거의 다루지 않고 국민소득, 무역, 산업구조, 금융, 경제성장 등 주로 조선 전체에 대한 거시경제적 분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경제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한들, 그것이 식민지 조선인에게 별 다른 혜택을 주지 않고 그 혜택이 주로 일본인에게만 돌아갔다면 그 개발과 경제발달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허교수는 바로 이런 점에 눈을 돌린 것입니다. 허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발론’은 그 개발이 조선인에게 어떤 함의를 가진 것인지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는 국내총생산(GDP)가 연평균 4.1%의 고율로 성장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고도성장의 요인이 무엇이고, 그러한 고도성장의 결과 국내시장이 어떻게 확대되고 산업구조가 어떻게 변해갔으며, 소득과 고용은 어떻게 늘어났으며, 무역은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이런 여러 문제들에 대해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해보자.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결국 조선인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아니면 해방 후 한국경제의 전개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이런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분석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허 교수는 ‘이러한 개발이 조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 동안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허 교수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일제강점기 때 자료를 파고들면서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바로 이 책 《개발 없는 개발》입니다. 그런데 ‘개발 없는 개발’이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클라우어(R. Clower)가 ‘개발 없는 성장’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클라우어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경제가 외국인 농장에 의해 1차산품 수출이 급증했는데, 그것이 라이베리아 경제에 있어 구조적 변화와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개발 없는 성장’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허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변화는 단지 성장의 문제만은 아니고, 제도의 변화와 같은 개발의 측면을 포함하고 있어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제에는 ‘개발 없는 개발’이 더 적합한 표현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러니까 ‘개발 없는 개발’은 일제강점기 개발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개발이 우리 민족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허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제 강점기 농업개발과 공업개발, 근대교육과 기술의 발전 등의 문제를 파고 들었습니다. 경제학자의 분석이다 보니 책에는 각종 통계와 도표, 그래프 등이 거의 매 페이지마다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한 통계, 도표 등을 인용하기에는 제가 너무 벅차므로, 다만 허 교수가 이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물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농업 부문에서 조선인의 미곡 수취 몫은 1910년 94.6에서 1941년 103.4로 증가하기는 하는데, 농업개발에 의해 얻어지는 증산량의 83.3%는 전체 농업인구의 0.3%에 불과한 일본인에게 귀속됩니다. 그렇다면 민족별 농가 1호당 수입 격차가 상당하겠지요? 이는 1910년 62.5배에서 1941년 209.4배로 확대됩니다. 민족별 농업인구 1인당 수입의 격차는 이보다 커서 1910년 86.3배에서 1941년 252.5배로 확대됩니다.

 

공업부분에서는 일제강점기 큰 발전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전근대적 봉건 경제하에 있던 조선이 일제 강점기로 들어간 것이니까, 조선 시대에 비해서는 공업이 크게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였겠지요. 그런데 공업 자산 가운데 조선인 공업 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제 말까지 10%를 넘지 못합니다. 그나마 성장의 내용을 보면 근대적 공업의 발달이라기보다는 자급적 및 부업적 가내공업과 재래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영세 중소공업과 정미업이나 정어리기름 제조업과 같은 1차산품의 단순가공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근대적 공업 분야에서 일하는 조선인의 경우 낮은 기능 수준의 노동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태평양 전쟁으로 나아감에 따라 조선인 숙련노동자나 중간관리직이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이는 일본인들이 전쟁자원으로 투입되면서 부득이 조선인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 오게 되자 나타난 현상입니다.

 

혹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광복 후 일제가 남겨놓은 많은 공업자산이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겠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공업은 일제의 필요에 의해 일본공업의 연장으로 건설된 것인 만큼, 일제가 패퇴한 뒤에는 각 공업이 상호 유기적 관련을 잃고 기형화됩니다. 이는 일제가 전쟁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군수공업을 키우면서 더욱 기형적으로 됩니다.

 

또한 이렇게 남은 공업자산의 3/4은 북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공업 자산 가운데는 일제 말기에 부품 확보가 어려워 조악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거나 이미 노후화되어 해방의 시점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방 후에 남은 공업 자산도 약간 남아있던 비축 원자재가 소진되어가면서 원료 부족으로 제대로 가동이 안 됩니다.

 

허 교수는 당시 평균 조업률이 50%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또한 그렇게 남겨진 일제의 공업 자산은 6.25 전쟁 과정에서 50.5%가 파괴되어버립니다. 이리하여 일제 강점기 개발의 유산 중 6.25 전쟁 뒤까지 남한에 잔존한 것은 일제 말기의 1/10 정도에 불과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 원조액이 들어오면서 1960년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일제강점기 물적 유산은 미국 원조액의 1/7 정도에 불과한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요컨대 일제가 많은 물적 유산을 한반도에 남겨놓고 갔다고 하더라도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이러한 일제 물적 유산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습니다.

 

허 교수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식민지 조선은 공업을 중심으로 매우 빨리 성장했다. 철도, 도로, 항만, 통신 등의 각종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농업, 광공업, 수산업 등의 모든 산업생산시설도 급속히 확충되었다. 교육, 행정, 사법 제도와 시설도 급속히 발전되었다. 19세기 말의 조선왕조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괄목할만한 개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개발의 속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상당한 정도의 개발이 존재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방 후가 되면 일제 강점기의 그 급속했던 개발의 결과물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한국은 다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의 하나로 남겨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왜 이런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을까?”

 

왜 그런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났는지 짐작하시겠지요? 설혹 개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제 식민지배가 거시적으로 한반도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개발의 효과를 한국인이 얼마나 혜택을 받았냐는 측면에서 보면 부정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일본에 먹히지 않고 계속적으로 독립국가로 남아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개발은 우리 힘으로도 이룰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부터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 볼 때 충분히 타당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아무리 요즈음 비관적인 것만 눈에 보인다고 하더라도 개발론자 학자들처럼 우리 국민이 거짓말 하는 미래가 없는 국민으로만 보지 맙시다. 우리 민족의 한 특성이 ‘신명’입니다. 한 번 신명에 불을 지피면 우리 민족은 얼마든지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민족입니다. 불만이 있더라도 우리 믿어봅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신명나게 한바탕 놀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