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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한강 유역으로 전파된 금성신앙

‘귀신바위와 김말손(金末孫) 장군’ 설화와 금성당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53]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 신앙이 한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추론은 2006년 박흥주 연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나주 금성 해양세력에 의한 굿 문화가 조선 말까지 뱃사람들과 해상물류유통의 상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는데 그 중심에 금성당이 있다는 근거는 문헌 기록과 민속 전승 자료다.

 

자료에 따르면, 한강으로 전해진 금성신앙 정착지는 두미암 일대며 오늘날의 염창동이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서해안 염전으로부터 채취한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소금 배들이 드나들던 한강 어귀이다. 이곳에 두미암(斗尾岩)이라는 바위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 두미암(斗尾庵)이 있었다. 소금 보관 창고가 많았던 이곳에는 도당산이라고 불리던 야산 봉우리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심개발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아파트 건립이 이루어져 옛 흔적은 거의 없어졌고 한강 변 쪽으로 산자락 일부만 남아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지명은 옛 정취를 담고 있어서 소금 창고에서의 소금을 뜻하는 염(鹽)과 창고 첫머리 창(倉)을 붙여 염창동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이곳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지만 그 이전에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염창동으로 불리었다가 1977년에 이르러 영등포구로부터 분리되어 강서구가 된 것이다.

 

한편, 금성신앙과 관련된 설화는 1871년 《경기읍지(京畿邑誌)》, 1891년 《양천현읍지(陽川縣邑誌)》그리고 1899년 《양천군읍지(陽川郡邑誌)》에 실려 있다. 위의 원문 내용이 강서문화원에서 펴낸 《강서의 문화와 역사》에도 소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미암에 고려 시대 이래로 전라도 나주의 귀신이 내접하여 영험이 있다는 불상이 있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재앙을 받는다는 속설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다투어 기도를 하였으나...,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이 활로 석불을 쏘니 그 석불은 피를 흘리면서 그날 밤으로 강을 건너 도망갔다. 김말손은 그 나주석불이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영벽정이라고 하였다. 김말손이 쏜 화살을 맞은 나주석불은 강 건너로 갔는데 석불이 지나간 자리를 나주의 별호인 금성이라 하고 석불을 모신 자리는 금성당, 금성당이 있는 산을 성산이라 하였다.]

 

위 자료의 핵심은 한강 유역으로 전파된 나주 금성신앙과 서울지역 금성당 정착이다.

 

한편, 활로 석불을 쏘았다는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金末孫, 1469-1540)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김말손이 양천 두미에 있었던 금성당(錦城堂) 불상을 강 건너로 쫓아 보냈기 때문에 한양 모래내 쪽 강가 야산에 금성당이 세워지고 금성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겸재 정선의 그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나오는 ‘금성평사(錦城平沙)’다. 그림에는 또한 두미암(斗尾岩) 산자락 동편에 효령대군이 세웠던 이수정(二水亭)이 있고, 그 서편에 김말손 장군이 세웠던 영벽정(映碧亭)이 나온다.

 

 

 

두미암 일대를 두동(斗洞) 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곳에 전라도 나주(금성)의 귀신이 붙어 있었던 바위(혹은 석불이라고도 함)가 충청병사 김말손 장군의 화살을 맞고 피 흘리며 강 건너로 날아가 내려앉은 산을 금성산이라 하였기에 그 산 아랫마을에는 오늘날 마포구 ‘성산동’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전설이 바로 귀신 바위와 김말손(金末孫) 장군 이야기다. 1998년 강서문화원에서 펴낸 《강서의 문화와 역사》에 <귀신바위와 김말손(金末孫) 장군>이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쾌청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거세게 불며 캄캄해 지면서 집채만 한 큰 바위가 한강 위쪽에서 마을을 향해 날아와 염창동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앉으면서 갑자기 헐벗은 산판에 수림이 무성해지고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숲속에 사나운 짐승 떼들이 날뛰며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연달아 일어나는 이변에 기겁하고 당황한 마을 사람들이 7일간 정성 들여 비니 하늘이 청명해지고 짐승들이 조용해졌다.

 

몇 달 후, 한 농부가 밭을 갈기 위해 바위 앞을 지나는데 우르릉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바위가 굴러 농부에게로 달려들었다. 농부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렸지만, 바위의 속력을 당해낼 수 없어 결국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러한 소문이 강 건너 한양의 김말손(金末孫) 장군에게까지 알려졌다. 김말손 장군은 바위에 귀신이 붙었다 생각하고 귀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무기를 준비해 강을 건너 염창동으로 나갔다. 부하들이 만류하였지만 김말손 장군은 기어코 귀신을 처단하고야 만다면서 바위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김장군을 따라온 장졸들이 모두 물러나서 동정을 살피었다. 그러나 김말손 장군은 겁내지 않고 바위를 향해 어찌 이곳에 나타나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느냐며 꾸짖으며 너를 잡으려고 여기 왔다고 외쳤다. 그러자 바위가 돌연 환한 빛을 내며 굴러서 김말손에게 대들었다. 김말손이 소리와 함께 힘껏 활을 당겨 쏘았다. 화살을 중허리에 맞은 바위는 큰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리고 화살이 깊숙이 박힌 바위 한가운데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위에 의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던 악귀는 김말손 장군의 화살에 죽었다. 하늘은 다시 청명해지고 광풍도 뇌성도 멎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각자 맡은 일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을의 평화는 회복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김말손 장군의 무공과 은공을 기념해서 바위 곁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영벽정(映碧亭)이라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서구 염창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나주 석불 설화와 염창동의 귀신 바위와 김말손 장군 설화는 지역적으로 한강 강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금의 이곳은 염창동 일대를 말하며, 강 건너로 망원동과 성산동이 있다. 이처럼 설화 전승에서 보이는 뚜렷한 지명을 통해 한강 유역으로 전파된 금성신앙의 정착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민속학적 자료를 통해 제시된 신앙 전파는 고려 시대 나주와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었던 한반도 해상 권력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