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신가(神歌)를 학계에서 무가(巫歌)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이처럼 ‘신(神)’이 무‘(巫)’로 대용되고 있는 것은 신병(神病)을 무병(巫病), 신구(神具)를 무구(巫具), 신복(神服)을 무복(巫服), 신도(神圖)를 무신도(巫神圖), 신화(神花)를 무화(巫花), 신악(神樂)을 무악(巫樂), 신무(神舞)를 무무(巫舞)라고 하는 것에서도 같다. 그런데 신병(神病)이란 신을 모시고 종교 행위를 하는 만신(萬神)이 신과의 접신에 의해 발생하는 신앙적 병을 뜻하지만, 무병(巫病)이라고 하게 되면 무(巫) 곧, 무당이 앓는 일반적 질병이란 선입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무병은 종교 신앙성이 빠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무악(巫樂)도, 이는 무당이 연주하는 놀이적이거나 예술적 음악으로만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음악은 엄연히 신과의 연관 선상에서 연주되는 신성한 종교 신앙 음악이기에 신악(神樂)이라고 해야 옳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용어 사용 이면에는 이를 원시 신앙 또는 비종교로 치부한 나머지 미신화하고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구파발 금성당제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가(神歌)는 신(神)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보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과거 구파발 금성당에서는 일 년 내내 연중행사들이 행해졌었다.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이어졌던 ‘홍수[橫數]맥이’를 시작으로, 잎 돋고 꽃 피는 이월 개춘(開春) 맞이, 삼월 삼짇날 화전(花煎) 천신(薦新, 새로 난 과실과 곡식을 신령께 올리는 의례), 사월 파일 연등 맞이, 오월 오 일 단오 맞이, 유월 유두 햇밀 천신, 칠월 칠일 칠석 맞이, 팔월 한가위 만조상 맞이, 구월 구일(重九) 맞이, 시월 상달 무시루 고사 정성, 동짓달 팥 동지 맞이, 섣달 만동(晩冬) 맞이 등 끊이질 않았다. 때때로 들어오는 왕실 새남을 비롯한 민중들의 지노귀굿, 재수굿 그리고 만신네 맞이와 신굿 등의 의례들도 베풀어졌었다. 금성당은 ‘물고’ 내렸던 당으로도 유명하다. 만신이 맞이를 하려면 사전에 금성당을 방문하여 금성대왕께 절을 올리고 신내림을 받아야 했다. 만신이 준비해 온 생미, 신주, 포, 육찬 그리고 신전(神錢)을 대왕님 전에 놓고 절을 올리고 공수를 내리면 당에서 ‘물고 종이’(번양[본향]지라고도 함, 양 양손에 하나씩 들 수 있도록 두 개의 하얀 한지를 삼각형의 ‘山’ 모형으로 접은 종이)에 인(印)을 내려준다. 이것을 가져가 굿청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구파발 금성당에는 신도(神圖) 이외에도 여러 다양한 귀물(鬼物)이 있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서울시립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 문서(文書)류 - 서진관금성당인등시쥬책(西津寬錦城堂引燈施主冊),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유마경(維摩經), 유마힐소설경 2) 신도(神圖)류 - 맹인도사(盲人道師), 맹인삼신마누라(盲人三神), 삼궁애기씨, 중불사, 창부광대씨(倡夫廣大), 별상님, 말서낭, 삼불사할머니 3) 신복류 - 관모(冠帽)류, 치마저고리류, 포(袍)류, 수식류이다. 관모로는 黑笠(흑립), 고깔, 전모(벙거지), 큰머리가 있으며, 포(袍)류에는 원삼, 두루마기, 동다리, 철릭, 몽두리, 장삼, 전복이고, 수식류으로는 염낭주머니, 한삼, 제비부리댕기, 대대(大帶, 남자의 심의와 여자의 원삼에 띠던 넓은 띠)다. 이들을 난곡(蘭谷)의 《무당내력》에 나오는 신복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형태가 동일하며, 제작 시기는 1900년대 전후가 된다. 4) 고비전류 5) 명두(明斗, 놋쇠로 만들어진 둥근 거울 형태로 무당이 신의 얼굴로 간주하는 신령스러운 무구)류 - 일월명두, 일월대명두, 불사에 일월명두, 셰인삼발명두, 칠성명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필자는 1979년 구파발 금성당을 답사하였다. 그러나 이곳 유물을 본격으로 살핀 것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만 3년이다. 2006년에는 SH공사로부터 조사연구사업을 수주하여 유물전수조사보고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금성당 유물은 이미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생활문물연구》의 「서울 무속과 금성당의 실체」(2004년)와 「금성당 무속유물의 형태와 상징성」(2009년) 그리고 서울구파발금성당유물조사단이 조사하여 펴낸 《서울 구파발 금성당 무속유물 및 민속유물 조사 연구보고서》(2006년)에 실렸다. 구파발 금성당에는 애초 16점의 신도가 있었다. 1972년 민속학자 장주근 교수가 촬영한 사진자료 그리고 금성당에 남아 있는 것을 대조하여 보면 모두 16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들은 1970년대 중반에 도난당한 ⑴ 금성대왕(금성님)을 비롯한 ⑵ 칠성님1, ⑶ 칠성님Ⅱ, ⑷ 용장군, ⑸ 육대신마누라, ⑹ 용궁부인, ⑺ 삼불제석, ⑻ 부처님 등 8점 그리고 남아 있는 ⑼ 맹인도사, ⑽ 맹인삼신마누라, ⑾ 호구아씨, ⑿ 중불사, ⒀ 창부광대씨, ⒁ 별상님, ⒂ 말서낭, ⒃ 삼불사할머니 등 8점 모두 16점이다. 장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구파발 금성당에는 나주 옛 지명인 금성(錦城)에서 군호를 받은 세종대왕의 여섯째아들이자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이 모셔져 있다. 구파발 시봉자였던 송은영도 금성당에는 세종대왕 아드님이 모셔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2000년도 필자의 구파발 금성당 조사에서 구파발 금성당에서 80년대까지 굿을 하였거나 굿 음악을 연주하였던 서울굿 만신 고 박종복(일명 숭인동 돼지엄마)를 비롯한 국가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무악 전수교육조교 고 김점석, 서울시무형문화재 남이장군사당제 무악 보유자 고 김순봉, 서울시무형문화재 밤섬도당굿 무악 보유자 고 김찬섭 등도 그렇게 증언하였다. 구파발 금성당과 가까이 있는 세종의 서장자 화의군(1425년-1489)의 진관동 묘를 참배하는 금성대군파종회 종친들도 오래전부터 화의군 묘를 참배하면서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다는 금성당을 방문하고 있다. 이로써 구파발 금성당에는 오래전부터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들의 금성당에도 세조의 아우 곧 금성대군이 모셔져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 구파발 금성당 뒤편에 있는 이말산(136m)에는 조선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이 한양에 정착한 뒤, 조선왕실은 당 건립을 후원하고 금성신앙을 확장하는 데 개입하였다. 이러한 증거로써, 조선왕실이 고종 탄일을 맞은 7월을 비롯한 정초와 시월에 명산대천을 비롯한 절과 사당 그리고 신당에 내린 발기(發記)에 금성당을 포함한 것이다(최길성, 「한 말의 궁중 무속: 궁중 [발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55-80 1970). 발기(發記)는 나라와 왕실을 위해 산기도, 위축, 고사, 나례 등에 왕실에서 내린 물품 목록과 수량을 열기한 명세서다. 조선왕실이 금성대왕을 주신으로 모신 금성당에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주상전하만세(主上殿下萬歲)> 전패(殿牌)를 봉안한 것도 조선왕실이 금성당을 신앙처로 삼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구파발 금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전패(殿牌)는 현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구파발 금성당 마지막 시봉자 송은영(宋恩榮, 1925-2017)에 따르면, 그녀의 시할머니 박윤수는 금성당제가 베풀어지면 왕실에서 궁인을 보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도 증언하였다. 이는 마치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호국사찰에서 불심으로 닦은 공덕을 앞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한강 유역으로 옮겨진 금성신앙 관련 설화 자료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채집되어 주목된다. [그전에는 조기배가 이 한강을 들어 왔거든. 마포에. 그랬을 적인데. 그 전에 뱃사공이 배를 부리는 사람이 그 심술이 궂잖아요. 직업상 봐봐도 거칠고 뱃놈이. 두 사람이 배를 띄우고 있는데. 마포에서 배를 띄우고 있는데. 장마철인지 뭐가 떠내려오는데 큰 궤짝이 떠내려오는데. 야 이거 웬보물이나 떠내려온줄 알고서 그 뱃사공이. 그 갈퀴 있잖아요. 갈퀴로 꽉 찍어가지고서 잡아댕겨서 그 한강변으로 잡아댕긴 거요. 모래사장 있는 데로. 뚜껑이 있는 거요. 뚜껑이 물이 뿔었으닌까 아주 힘들게 열었단 말이야. 열었는데 탱화가 있는데. 탱화가 열두 탱화가 있구. 거기 촛대도 있고 다 있는 거라. 아이구 이게 큰 그 귀신이라고 왕신이라고. 보물인줄 알았더니. 그래 칵 닫은 거에여. 칵 닫고서 발로 칵 밟고서 그냥 간 거여. 저 만침 둘이 돌아서자닌까.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냥 어찌나 놀랬는지 그 놈들이. 그 뱃사공놈들이 말이에요. 어찌나 크게 소리가 나던지 기절초풍을 해 돌려다 보닌까. 그 뚜껑이 열린 거라. 근데 뭐. 그 인제 뭐 물에 뿔렸으닌까 자연으로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금성대왕 신앙이 한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추론은 2006년 박흥주 연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나주 금성 해양세력에 의한 굿 문화가 조선 말까지 뱃사람들과 해상물류유통의 상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는데 그 중심에 금성당이 있다는 근거는 문헌 기록과 민속 전승 자료다. 자료에 따르면, 한강으로 전해진 금성신앙 정착지는 두미암 일대며 오늘날의 염창동이다. 이 지역은 조선 시대 서해안 염전으로부터 채취한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소금 배들이 드나들던 한강 어귀이다. 이곳에 두미암(斗尾岩)이라는 바위산이 있었고, 그 아래에 두미암(斗尾庵)이 있었다. 소금 보관 창고가 많았던 이곳에는 도당산이라고 불리던 야산 봉우리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심개발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아파트 건립이 이루어져 옛 흔적은 거의 없어졌고 한강 변 쪽으로 산자락 일부만 남아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지명은 옛 정취를 담고 있어서 소금 창고에서의 소금을 뜻하는 염(鹽)과 창고 첫머리 창(倉)을 붙여 염창동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이곳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지만 그 이전에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조선 초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금성 산신제를 치렀던 사당이 다섯 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첫째, 산마루에 상실사(上室祠), 둘째, 산허리에 중실사(中室祠), 셋째, 산기슭에 하실사(下室祠), 넷째, 산기슭의 하실사 남쪽으로 국제사(國祭祠), 그리고 다섯째, 고을 읍성 안에 녜조당(禰朝堂)이다. 이 가운데 상중하실사는 산신제 사당이지만 국제사와 녜조당은 팔관회를 치렀던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팔관회를 열기 위해 축조되었던 국제사와 예조당에서는 고려 왕실의 평안을 기원하고 태조 왕건을 기리는 의례를 베풀었다. 금성산은 4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의 노적봉(露積峰), 서쪽의 오도봉(悟道峰), 남쪽의 다복봉(多福峰), 북쪽의 정녕봉(定寧峰)이 그것들이다. 상실사(上室祠)는 동쪽의 노적봉에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그 주위는 군사시설인 공군 방공포대가 들어서 있어서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다. 상실사로부터 아래쪽으로 있었던 중실사(中室祠)는 금성산의 또 다른 서쪽 방면의 봉우리인 낙타봉(255.1cm)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군부대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차로도 갈 수도 있게 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서울지역에서 금성대왕(錦城大王)을 주신으로 모신 금성당(錦城堂)은 구파발을 위시한 노들 그리고 각실점 세 곳에 있었다. 이 가운데 노들과 각심절 금성당은 1970년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없어졌고, 오직 구파발 금성당만 남게 되었다. 현존하는 구파발 금성당 건축물은 180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이다. 오늘날 조선왕실 후원으로 유지되었던 신당(神堂)이 모두 사라진 현 상황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구파발 금성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적 가치를 지닌다. 건축물은 본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금성대왕 등 여러 신을 모셔두고 의례를 베푸는 신당으로 기능한다. 본채 앞으로 행랑채를 두었고, 동쪽으로는 ‘ㄱ’ 자형 안채를 두었다. 안채 형태는 중부지방 민가와도 같은 ‘ㄱ’자 형이며, 동쪽 방은 ‘전(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이 특징이다. 금성당 전체 터 면적은 국가민속문화재 지정구역의 대지 813㎡와 보호구역의 대지 1,871㎡ 등 모두 2,684㎡이다. 이 가운데 건축 면적은 상당 33.13㎡, 하당 16.7㎡, 아래채 41.08㎡, 안채 89.74㎡ 등 모두 180.65㎡이다. 금성당은 2008년 7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