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우옥주(禹玉珠, 본명 李順愛, 여)는 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서 경신년(庚申年)인 음력 1920년 11월 17일 태어났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우 씨 할아버지는 고위 관직에 올랐고 증조부는 한의로 명성을 떨쳤다. 끝까지 가르쳐 보자는 어른들 욕심에 우옥주는 어린나이 6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여고 2학년 때인 17살 때 갑자기 마를 때로 마르면서 폐병 3기에 들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석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즈음 집안에 갑자기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 내리던 여름날 밤, 느닷없이 힘이 솟구친 우옥주는 옹진 진수대로 나가 죽은 송장을 파왔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집에서는 신이 들려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끝까지 무당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무당 될 거면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칼이라도 물고 죽으라는 전주 이씨 가문의 저주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단양 우씨로 바꿨다. 그리고 무당이 되었고 병은 낳았다. 이때부터 이순애는 성과 이름을 갈아 우옥주가 되었고 나이 또한 다섯 살이나 늦도록 호적이 만들어졌다. 오갈 데 없는 우옥주는 최일리 만신을 어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만구대탁굿은 족보 있는 무당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그 중심에는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7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옹진읍 개울몰[堂峴里]로 들어와 살았던 김기백(남, 1893-1944) 나랏무당이 있다. 월남한 실향민들에게 전설적 무당으로 알려진 김기백은 1981년 한국일보가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 연재에서 조선 무당으로 소개돼 그의 생애 일부가 세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최성자, 「한국서민열전(國庶民列傳):격동의 근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들-조선 무당 김기백(28)」, 한국일보 , 1981년 8월 2일) 곱상한 외모와 가는 몸매의 체형을 가진 김기백은 겉으론 보기엔 왜소하기 그지 없었지만 내적으로는 강한 의기와 투철한 애국심을 가졌던 조선 무당이었다. 옹진으로 이주한 어린 시절의 김기백은 아버지와 함께 만석꾼 집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14살 되던 해, 소 풀을 먹이러 나갔다가 바위에 걸려 뒤로 넘어져 기절하였다 깨어난 뒤부터 유식하고 영험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주위에서 신이 내린 것 같다고 하였지만 김기백의 아버지는 남의 집 종살이를 할망정 광산 김씨 집안 망신은 안 된다며 아들의 신내림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1) 안반고사 - 안반(安盤) 위에 갖은 떡을 올려놓고 행하는 일종의 떡고사로서, 비리고 누린 것 금하고 목욕재계한 후 정갈하게 옷을 입은 경관만신(황해도 굿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만신)이 안반(떡판) 앞에 앉아 만구대탁굿이 잘 풀릴 것인가를 알아보는 염탐을 한다. 2) 신청울림 - 쇳소리와 가죽소리로 울림을 내어 굿이 시작될 것임을 알리고, 신이 강림하여 좌정할 신청(神廳)문을 열어서 신이 좌정할 공간을 정화한다. 3) 일월맞이 - 천지가 맞닿고 동서남북 사방이 트인 굿청 앞마당에 차려 둔 일월상 앞에서 쇠열이를 하여(쇠붙이로 된 방울 곧 꽹과리와 제금으로 쇳소리를 내어) 일월성신의 길문을 연 후 용궁단지를 타고 사해용왕신을 모신다. 4) 물베띄우기 - 석 자 삼베를 물이 가득 찬 용궁단지에 넣으면서 명진주, 복진주, 솟을진주, 외길진주로 동서남북 사해용왕님께서 도와 달라고 축원한다. 5) 상산맞이 - 산천맞이 또는 산맞이라고도 하는데, 굿청 앞마당에 차려둔 일월맞이상 앞에서 방울과 제금으로 쇠붙이 소리를 내어 신령이 왕림하도록 상산문을 연다. 6) 부군맞이 - 부군남여서낭과 부군할머니할아버지를 모신다. 마무리에서는 굿상 음식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역사적 유래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1세기 초 신라 제2대 남해왕(?~24)을 거서간(居西干) 또는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웅’은 단군 역사에 나오는 환웅에서의 ‘웅’과 같은 의미로 임금이나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사투리로는 무당을 일컫는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제천의례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단군, 주몽, 혁거세 등의 시조 신화 구조는 천신 강림으로 인한 산신신앙, 인간 승화로 인한 곡식신앙, 신인융합으로 인한 창조신앙으로 되어있다. 요약하면, 인간이 신과 교류를 통해 삶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서 오늘날 무속신앙에서 취하고 있는 그것과 동일하다. 단군, 주몽, 혁거세 기록에서 보여주는 핵심적 내용은 하늘로부터 강림한 천신(天神)과 땅 위에 군림하는 지신(地神)과의 융합을 통해 인간이 태어나고, 그에 따른 인류 문화가 창조되어 삶의 질서가 유지된다. 이와 같이 고대인들 생활 속에 자리 잡았던 천신신앙(天神信仰)은 삶 속의 일상적인 의례와도 직결되었는데, 그 골자는 강림한 천신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가며 부르는 뱃다래기 평안도 다리굿 신가(神歌)는 한때 평안도 땅 전역에서 전해져 왔다. 그러다가 한국동란이 일어나자 서울로 월남한 평안도 무당들이 남한에서 성황대제와 다리굿을 재개하면서 불리게 되었다. 다리굿에서 불리는 뱃다래기도 월남한 평안도 무당들이 불렀던 노래 가운데 하나며 평안도 다리굿의 중요한 자료다. 뱃다래기는 다리굿 후반부인 기밀굿의 수왕세텬(또는 시왕서천) 과정 속 들어 있는 노래이다. 무당이 망자를 오색화초가 만발한 좋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자(使者)를 모신 뒤, 망자 혼이 실린 다릿발을 들고 저승으로 잘 데리고 가겠다고 다짐하며 부른다. 여기 소개하는 <뱃다래기>는 2003년 정대복 대무당이 구술한 것이다. 〈뱃다래기 신가〉 간밤에 백양래하니 칠백동자 전도합소사 송방은루 송동자니 사모혼신을 전도하소사 육로로 삼천리 수로로 이철리 약수삼철리 드리구 견을 쓰구 오색초롱 만발한데 환전인행하소다 동방에는 청대장군 청사초롱에 불할켜라 김일영감을 모셔라 서방에는 백일장군 백색초롱에 불발켜라 김일영감을 모셔라 북방에는 흑이장군 흑색초롱에 불발켜라 두황목에는 황이장군 황색초롱에 불발켜라 김일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다리굿은 안당굿과 기밀굿으로 이원화된다. 안당굿은 전날 저녁 방안에서 산자를 위해 행해지는데 안당굿은 삶의 현실을 인식하고, 다음날 동이 트면 마당에서 망자를 위해 행해지는 기밀굿은 내세의 실제를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몇 개 형식의 다리굿 제차는 대체로 비슷하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2007년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조사된 김남순 일행의 것이다. 안당굿 (1) 당울림 - 굿청에 쇳소리를 내어 굿의 시작을 알린다. 이때는 악기 연주를 하는 무당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밖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쇳소리를 듣고 갑자기 달려든 귀신과 부딪쳐 살을 맞을 수가 있다. (2) 주당푸념 - 주당풀이라고도 한다. 무당이 신칼을 들고 소리조로 푸념을 하여 잡귀에 물려 굿에 임하는 사람들을 청정하게 하고 굿청의 부정한 모든 것을 제거하여 정화시킨다. (3) 앉은청배(또는 감흥청배) - 대무당이 감흥당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감흥청배를 하여서 모든 신령을 굿청에 좌정토록 한다. 두 개의 상을 포개어 이층 단을 만들어서 상위에 망자집에서 가져온 쌀을 수북이 쌓아 올린다. 여기에 술잔을 올리고 지전으로 된 예단과 함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다리굿은 망자를 좋은 곳으로 보내는 천도제다. 만신에게 실린 영혼이 산자들과 대면하여 살아생전 못다 한 대화를 나눈 후 맺힌 한을 풀고서 ‘좋은 곳’으로 가는 의식이다. 무교에서의 ‘좋은 곳’은 걱정이나 근심뿐만 아니라 부족함이나 어려움 없이 영원토록 즐겁고 평온히 살 수 있는 낙원이다. 이러한 무교 사후관은 지옥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생전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극락세계나 천국을 가게 되는 불교나 기독교와는 다르다. 이를테면, 불교의 저승관은 권선징악 이분법 구조로 되어 있어서 선인은 극락세계로 악인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개신교에서도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 구도가 전개되기 때문에 현세에서 많은 사랑을 베풀고 선한 일을 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 부귀영화의 삶을 이룩하지만, 현세에서 나쁜 짓을 하거나 사랑을 베풀지 못한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무교에서는 망자 누구나 살아생전 행적과 관계없이 좋은 곳으로 가는 관념체계다.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넋(영혼)과 몸(육신)의 분리 현상으로 보았다. 넋은 혼(魂)이요 몸은 백(魄)이어서 인간이 죽으면 몸은 땅에 묻히지만, 그 넋은 또 다른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다리굿은 망자가 살아생전 지은 죄를 면하여 일곱 자 일곱 치 삼베나 무명천 또는 소창으로 된 저승다리, 수왕다리, 망자다리, 조상다리, 사자다리를 건너 ‘좋은 곳’으로 떠나보내는 평안도식 천도제이다. 그런데 망자가 ‘좋은 곳’ 즉 저승 안착을 위해선 살아생전 지은 죄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면죄부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열 명의 왕, 곧 시왕[十王] 전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수왕굿이라고도 부른다. 1966년 임석재, 장주근이 평안도 무당 정운학을 대상으로 조사 발간한 무형문화재지정자료 제24호 《관서무가》, 1978년 김태곤이 평안도 무당 정대복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펴낸 《한국무가집》 등에서 수왕굿이라는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1979년 여름 평안도 무당 이선호와 정대복 등이 삼각산 전씨굿당에서 펼쳤던 굿판에 참관하였을 때도 이 망자 천도굿을 수왕굿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985년 황루시 등이 펴낸 《평안도 다리굿》에서는 이 굿을 다리굿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제보자는 1979년도 전씨굿당에서와 같이 정대복 만신이었다. 그런데, 황루시가 설명한 다리굿과 수왕굿의 차이는 양자의 굿이 죽은 망자를 천도하는 동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평안도 성황대제를 오늘날까지 전승할 수 있도록 크게 이바지한 사람은 평안도 출신으로 한국 동란 때 서울로 월남한 대무당 이선호(여, 李禪好, 1912~1989)다. 이춘옥(李春玉)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었고, 창덕궁의 돈화문 옆 한옥에 살았기에 대궐할머니로도 불렸고, 레슬링 선수 김일 장모이기에 김일이 장모라는 별칭도 있었다. 이선호는 평양 경저리에서 태어나 15살에 신이 내려 당시 50살이었던 임용문에게 내림굿을 받고 무업을 하다 27살 되던 해 극단 단장을 하였던 남편을 따라 서울로 월남하였다.(참조: 황루시, 「재체험을 통한 죽음에의 이해 - 다리굿 구조와 기능」, 《한국의 굿(5) - 평안도 다리굿》, 1985, 84쪽) 열 살 아래인 여동생 이춘홍(여, 李春紅, 1922~1985)도 데리고 함께 살면서 평안도굿을 알리는 데 애를 썼다. 당시 이선호의 전문 장구 악사는 술말이 김연화(여, 金蓮花, 1916~미상)였다. 평안도굿에서의 술말이는 술(소리), 말(언어), 이(행위자)를 뜻하며, 굿의 청배소리와 재담 등을 행하는 전문 악사다. 평양 죽전리 출신 김연화는 어려서부터 평양 권번에 들어가 소리, 춤, 장고를 배워 대단한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1. 성황 및 서낭 유래에 대하여 ‘성황’을 ‘서낭’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표기하면 ‘城隍’이며, 한글 표기는 ‘서낭’이다. 20세기 초, 성황(서낭)신앙이 조사되고 연구되었을 때부터 두 용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됐지만, 현장에서는 후자에 보다 치중되어 불리는 경향이 있다. 터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神)격의 존재로 믿어져 온 성황 또는 서낭에 대한 유래는 외래설과 전래설이 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온 외래설은 다음과 같다. 6세기 무렵, 위진남북조시대에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지방 세력들이 성황(城隍) 신앙을 발달시켰는데, 당송대에 들어서면서 전역으로 퍼졌다. 송대(618-907) 초기에 이르러 지역의 수호신으로서 제사하는 신앙형태가 발달하였고, 이것이 고려왕조(918-1392)에 전해졌다. 지방분권적이었던 고려 초기, 큰 세력을 갖게 된 지방 토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보호해 줄 종교적 제도로 성황 신앙을 선호하면서 제례 주제권을 장악한 후 향촌 사회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면서 호족들은 성황제를 열어 가문과 문벌 지족(支族)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또 한편으로 무격 집단의 기풍제, 기우제의 성황제를 열어 지역주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