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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구파발 금성당의 신도(神圖)

마포, 구파발, 각심절 금성대왕은 형제지간
[양종승의 무속신앙 이야기 57]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박사]  필자는 1979년 구파발 금성당을 답사하였다. 그러나 이곳 유물을 본격으로 살핀 것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만 3년이다. 2006년에는 SH공사로부터 조사연구사업을 수주하여 유물전수조사보고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금성당 유물은 이미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생활문물연구》의 「서울 무속과 금성당의 실체」(2004년)와 「금성당 무속유물의 형태와 상징성」(2009년) 그리고 서울구파발금성당유물조사단이 조사하여 펴낸 《서울 구파발 금성당 무속유물 및 민속유물 조사 연구보고서》(2006년)에 실렸다.

 

구파발 금성당에는 애초 16점의 신도가 있었다. 1972년 민속학자 장주근 교수가 촬영한 사진자료 그리고 금성당에 남아 있는 것을 대조하여 보면 모두 16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것들은 1970년대 중반에 도난당한 ⑴ 금성대왕(금성님)을 비롯한 ⑵ 칠성님1, ⑶ 칠성님Ⅱ, ⑷ 용장군, ⑸ 육대신마누라, ⑹ 용궁부인, ⑺ 삼불제석, ⑻ 부처님 등 8점 그리고 남아 있는 ⑼ 맹인도사, ⑽ 맹인삼신마누라, ⑾ 호구아씨, ⑿ 중불사, ⒀ 창부광대씨, ⒁ 별상님, ⒂ 말서낭, ⒃ 삼불사할머니 등 8점 모두 16점이다.

 

 

장주근 사진자료로 남아 있는 8점은 국립민속박물관이 2003년 펴낸 《사진으로 보는 민속의 어제와 오늘》 2권에 실려 있다. 그리고 금성당에 남아 있었던 8점의 신도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금성당 시봉자 송은영(1925-2017)은 금성당에 모셔져 있었던 금성대왕을 금성왕님이라고 불렀는데, 이 신도는 도난당하기 전인 1972년 경기대 장주근 교수가 촬영한 사진자료로만 남아 있다. 장주근 장서와 무속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고, 그 자료 일부가 2003년 《사진으로 보는 민속의 어제와 오늘》 2로 발간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금성대왕 신도가 오방신장이라고 오기되어있다.

 

연구자가 송은영 시봉자에게 확인한바 금성대왕으로 확인되었다. 송은영은 도난당한 금성대왕 영정이 300년 훨씬 넘었다는 하였고, 당시 화상을 그리기 위해 중국에서 물감을 들여왔다는 말을 그녀의 시할머니한테 들었다고 한다. 현재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에 봉안된 금성대왕은 2016년 금성당이 샤머니즘박물관으로 개관되면서 양종승이 장주근 사진 자료를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금성당 본당(本堂) 맨 중앙에 모셔져 있었던 금성대왕 영정은 오색의 석채(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를 사용하여 그렸다. 금성대왕은 화려하게 장식한 적토마를 타고 활통을 어깨에 메고서 양손으로 활을 잡아당기고 있다. 길게 뻗은 두 가닥의 꿩 털로 장식한 갓을 쓴 후 기다란 갓끈을 느려 뜨렷다. 홍철릭을 입고 흰 늑건(勒巾)을 허리에 둘렀다. 늑건은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아 만든 넓은 허리띠로써 고려 시대 때 임금이 상복(常服)으로 입었다.

 

신발은 검은 가죽으로 된 흑피혜(黑皮鞋)를 신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마포의 금성대왕은 다섯 명의 말구종(-驅從)이 금성대왕을 보좌하고 있는 것에 반해 구파발의 금성대왕은 네 명의 말구종이 보좌하고 있어 차별화되어 있다. 말구종이란 구종(驅從) 별배(別陪)라고 하는 하인을 말하는데, 이들 역할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말을 타고 행차할 때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끌거나 말 뒤에 따르며 ‘에라 게 들어섰더라.’, ‘물렀거라’ 따위로 외치며 잡인 통행을 금하는 벽제(辟除)소리를 낸다. 또한, 대왕이 행차할 때 쓰는 양산(陽繖)이나 깃발을 들 뿐만 아니라 대왕 표징의 어보함을 들기도 한다.

 

금성대왕이 이러한 말구종 호위를 받으며 의기양양한 자세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마포 금성대왕은 백마를 타고 호수 갓을 쓴 것에 견주어 구파발 금성대왕은 적토마를 타고 꽁털갓을 쓰고 있어 이 부분에서도 차별화된다. 이렇듯 영정에 나타난 금성대왕 형상이 차별을 보이는 것은 지역색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서울 세 곳 금성당의 서열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여 눈길을 끈다.

 

송은영도 세 곳 금성대왕은 모두 같은 형제지간이라 하였는데. 이들 중 마포에 계시는 분이 맏형이고 그다음이 구파발 분이며 각심절 분이 막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이처럼 영정 화본에 차별성을 둔 것은 애초 금성대왕은 한 분이었지만 이를 봉안하는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울 세 지역 금성당 서열 또는 전파 경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세 금성당 각각의 무속 형태의 특징을 살피게 하는 대목이다.

 

 

 

구파발 금성당 신도들은 모두 벽에 걸 수 있도록 족자형으로 꾸며졌으며, 신도 상단과 하단에 둥근 나무를 대어 길게 늘여 드리도록 하였다. 상단 좌우 끝 면에는 매듭 수술로 신개를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신개(神蓋)란 신도(神圖)를 비롯한 개(蓋), 등(燈), 깃발 등 신령의 물건에 덧붙이는 화려한 장식품이다. 그 목적은 신령의 물건, 곧 귀물(鬼物)에 신개를 달아 영적 존재인 신령의 신비함과 귀함을 표방하면서 감싸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금성당 본당 중앙에 금성대왕 신도를 걸고 앞면 겉쪽으로 얇은 홍색 천을 가려 신비함을 가지도록 하였다.

 

구파발 금성당 본당에 있었던 신도들은 1970년대 초중반, 맨 오른쪽 구석에 있었던 삼불사할머니를 빼고는 모두 없어졌다. 삼불사할머니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모셔져 있어서 도둑을 면한 것이다. 본당 오른쪽 옆 밑으로 있는 하당의 신도들은 도난을 면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둑맞을 때만 해도 이곳 금성당에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누구든지 수시로 드나들며 금성대왕을 배알 할 수 있도록 하기 함이었다.

 

도둑맞은 뒤로는 본당과 하당에 자물쇠를 채워 두었다. 한편, 1980년대 금성당 시봉자 송은영이 잊어버린 금성대왕을 새로 조성키 위해 환쟁이를 데리고 정릉에서 노들 금성대왕을 모시고 있었던 이영덕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간에서 미신타파라고 하는 상황이고 하여서 신도 조성을 접었다고 한다. 필자가 이 사실을 2004년 이영덕에게 확인하였던 바 그렇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