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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석주 이상룡, 총을 들다 선비로 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정종영, 대원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안동에 가면, 누가 봐도 이상한 집 한 채가 있다.

분명 양반가의 기품이 서린 유서 깊은 고택이건만, 앞마당에 웬 철길이 가로지르고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살았던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臨淸閣) 얘기다.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주인으로 둔 탓에 아흔아홉 칸 종택이었던 임청각도 갖은 수모를 겪었다. 일제에 순종하지 않는 불량한 조선인, 곧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집으로 낙인찍혀 절반가량이 헐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철길이 놓였다. 일제는 부러 먼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임청각 앞마당에 철길을 내어 독립운동의 도도한 기상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그 기상이 쉬 꺾일 것이던가. 정종영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은 바로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에 관한 책이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였으나 어른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안동의 존경받는 유림이었던 이상룡 선생, 그가 경술국치 이후 어떤 삶을 택했는지 따라가다 보면 상류층의 책임을 실천한 또 하나의 훌륭한 사례를 만나게 된다.

 

 

그는 본디 안동의 존경받는 유림으로,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이자 고성 이씨 종파를 이끄는 대지주였다. 1519년 임청각을 지은 이후 대대손손 안동에 살았던 고성 이씨 가문은 만석을 거둘 만큼 거부이기도 했지만, 누대에 걸쳐 고위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경각에 놓이자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많은 자금을 들여 가야산에서 비밀리에 의병을 육성했으나 비밀이 누설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의병운동의 한계를 깨달은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며 교육에 힘을 쏟았지만 기울어가는 국운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안동은 발칵 뒤집혔다. 퇴계 11대 자손이며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던 안동 유림의 정신적 지주, 향촌 이만도 선생이 단식을 시작한 지 2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간 만주 지역의 사정을 살피며 떠날 준비를 해 오던 이상룡 선생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때가 온 것이었다.

 

 

비밀리에 모든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안동 일대는 물론 예천까지 전답이 있었지만, 소문나지 않게 급하게 팔다 보니 제값을 못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근처 마을에 사는 김대락, 김동삼 일가도 많은 전답을 급히 정리했다. 일가친척 20여 가구, 200여 명이 만주로 떠난 대이동이었다.

 

1911년 1월 5일, 상희는 아침 일찍 준형과 함께 사당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조상에게 인사를 올리고 위패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었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준형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조상의 위패가 무슨 소용 있겠느냐?”

상희는 굳건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p.23)

 

조상의 신위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유림이, 이렇게 위패를 땅에 묻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일제를 묵인하면 편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관리이자, 성리학을 공부한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선비는 어떤 경우에도 ‘바른 길’을 택해, 불굴의 기상과 의지로 그 길을 걸어야만 하므로.

 

여러 고비를 넘긴 끝에 무사히 만주에 도착한 이상룡 선생은 이회영ㆍ이동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동포 사회의 안정과 교육을 담당할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할 인재를 양성할 신흥강습소 설립을 주도했다. 땅을 사는 것부터 곡식을 사는 일까지, 만주에 새로운 터전을 일구는 데는 이회영 일가가 가져온 재산과 이상룡 선생의 재산이 큰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본래 ‘이상희’이던 이름도 ‘이상룡’으로 개명하고, 중국에 입적 신청을 하며 현지 적응을 위해 애썼다. 중국 현지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처음 정착하려 한 추가가에서 중국인의 텃세로 땅을 사지 못해 갖은 고생을 한 뒤, 합니하가 논농사에 적합하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해 합니하로 간 그들은 마침내 정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많은 학교를 세웠고, 백서농장, 길남장 등 병영을 설치해 독립군을 길러냈다. 이런 노력은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큰 빛을 발했지만, 일본인이 민간인까지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참변이 일어나면서 동포 사회도, 독립군도 초토화되었다.

 

이후 이상룡 선생의 가장 큰 과제는 분열하는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시키는 일이었다. 흩어진 크고 작은 통일 독립운동조직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25년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인사를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임정 측 요청에 따라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나, 내부분열과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1926년 사임하였다. 이후 1932년, 75살의 나이로 자신의 유골을 조국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이상룡은 숨이 차는지 말을 하다가 자꾸 멈췄다. …

“광복이 되기 전까지 내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거라. 일단 이곳에 묻고, 광복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줬으면 좋겠구나.”

이상룡은 다시 자리에 누워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1932년 5월 12일, 길림성 서란현 소과전자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상룡은 75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p.154)

 

나라를 잃고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난 가문은 이회영 일가뿐만이 아니었다. 석주 이상룡 일가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룡 선생은 이회영 선생보다도 알려지지 않은, 후손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이 가문은 무려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온 한국 최고의 독립운동 명문가인데도 말이다.

 

비록 문재인 대통령이 다녀간 이후 다소 알려지긴 했으나 아직도 아는 이보다는 모르는 이가 더 많을 임청각, 그리고 이상룡 선생의 삶이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더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꺾이는 일의 연속이었다. 독립운동에서 ‘쾌거’라 불릴 만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은 점점 강성해지고, 독립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 번을 꺾여도 백 번을 일어났던 이가 이상룡 선생이었다. 선비는 바른 길을 걸어야 하고, 독립운동은 바른 길이라는 확신이 그를 일으켜 세웠으리라.

 

의병운동부터 애국계몽운동, 무장독립투쟁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한 수십 년의 세월 중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은 것은 단 1년인데도, 그 직함이 책 제목으로 쓰인 것은 살짝 아쉽다. 그저 석주 이상룡, 그 이름 석 자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총을 들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 모든 것을 내놓은 진정한 선비, 그 이름 석 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