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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8월 독립운동가 강제하ㆍ이웅해 등 뽑아

대한통의부 창립(100주년) 이바지, 주도적 활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창립에 이바지하고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강제하ㆍ이웅해ㆍ백남준ㆍ최명수 선생을 202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대한통의부는 1922년 남만주에 있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광복군총영 등 17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 50여 명이 모여, 남만주에서 독립군기지 재건과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창립된 통합단체로, 민사부, 권업부 등 8개 중앙조직과 의용군으로 편성되었다.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1891년 태어난 강제하 선생은 1919년 창성 3·1만세운동을 주도했지만, 일제의 주요 시위 인물 검거를 피해 남만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남만주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부단장이 되어 독립군을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군자금을 모집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1920년 10월에는 대한독립청년단 단장이 되어 무장활동을 지휘했다.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의에서 통의부 탄생에 이바지했으며, 독립군의 생계를 책임지는 권업부장을 비롯해 교통위원, 재무부장 등의 직을 수행하며 통의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1924년 11월 통의부와 광정단(光正團) 등 7개 단체가 통합되어 정의부가 창립되자, 선생은 중앙행정위원에 뽑히고 교육기관인 화성의숙(華成義塾)의 재무를 맡는 등 최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1878년 함경남도 상기천면 출생의 이웅해 선생은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했지만,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망명한 동지들과 항일무장의 기반조성을 위해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사법부장에 뽑힌 뒤 만주와 국내에 많은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설치, 대한독립단 소속 독립군의 항일 운동을 지원했다.

 

선생은 1922년 22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군 대표로 남만한족통일회의에 참석하여 통의부를 탄생시켰으며, 통의부 민사부장과 재무부장을 지냈다. 그러나 1928년 12월 일제 경찰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징역 8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백남준 선생은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출생(1885년),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11년 일제의 신민회 탄압을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암살사건에 연루ㆍ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 뒤 남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3월 한교공회(韓僑公會)라는 독립군단을 설립해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1920년 오동진이 광복군 총영장으로 있는 부대에서 군사부장과 참모부장으로 특수작전을 이끌었다.

 

선생은 1922년 남만한족통일회의에서 광복군총영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를 창립하는 데 공헌했으며. 중앙행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정의부 사법기관인 검판청의 검판장에 뽑혔고, 유한농업공사를 설립해 한인사회의 산업발전과 생계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2년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을 만들어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선생도 이때 붙잡혀 국내로 압송,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881년 충청북도 청원군 출생의 최명수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서간도로 망명했다. 선생은 국내에서 망명한 신민회(新民會) 인사들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참여했다. 1912년 서간도에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설립한 경학사(耕學社)를 계승하여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했는데 선생은 단총(團總)에 뽑혀,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白西農庄) 등의 무관학교를 만들며 독립군 양성에 앞장섰다.

 

서간도 지도자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위해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변경했고, 선생은 한족회에서 검무국장과 헌병과장을 겸임했으며, 통의부 검무국장에 이어 정의부 자치분과 위원, 검리장을 맡으며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 만주를 떠나 상하이에서 활동한 선생은 1934년 12월 일제의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제하, 이웅해, 백남준, 최명수 선생은 100년 전 남만주에서 항일무장 세력을 하나로 묶은 통의부 창립에 이바지했으며,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끝까지 위국헌신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강제하 선생, 이웅해 선생과 백남준 선생에게 각각 1995년, 2010년,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최명수 선생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