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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이데올로기가 딱딱해지면 한낱 광기에 불과하다

《역사 앞에서》, 김성칠, 창비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27]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역사 앞에서’ 하니까, 제가 꼭 역사에 대한 거대담론을 말하려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네요. 《역사 앞에서》는 제 서울법대 대선배(1937년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인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님이 쓰신 책입니다. 지금 제 앞에는 예쁘게 제본된 책이 놓여 있지만, 사실 《역사 앞에서》는 김 선배가 1945. 12. 1.부터 1951. 4. 8.까지 쓴 일기입니다. 다만 1946. 12. 23.부터 1949. 12. 31.까지의 일기는 빠져 있습니다. 아마 그 부분 일기장은 유족들이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일기를 모아 책으로 낸 것이니까, 책의 부제는 <한 사학자의 6.25 일기>입니다.

 

 

김 선배는 6·25 때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인공치하를 서울에서 고스란히 보냈습니다. 일기에는 한 개인이 겪은 6.25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그것도 사학자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기에, 좌나 우로 편협된 시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눈으로 6.25의 참상이 그려집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전쟁은 어떠한 명분으로든지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은 인간성을 황폐하게 합니다. 피해자의 인간성만 황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도 전쟁의 광기 속에 인간성을 상실합니다. 역사를 보면 그 전쟁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국 인간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

 

그럼, 구체적으로 일기의 현장으로 들어가 볼까요? 인용하고픈 일기가 너무 많으나, 이는 다음 기회에 차근차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몇 개만 발췌하여 말씀드립니다. 우선 6.25 전쟁 일어나기 전의 일기 하나를 고르라면 1946. 2. 8.자 일기입니다. 이날의 일기에서 김 선배는 광복 전에는 일인들에게 당하고, 광복 뒤에는 미군들에게 괄시당하는 약소국 국민의 비애를 쓰고 있습니다.​

 

“미군 철로계의 증명서를 가졌으므로 미군 전용차에 타려다가 다른 군정청 조선인 관리들과 함께 가슴패기를 몹시 얻어맞았다. 가슴이 사뭇 떨리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개도야지처럼 함부로 얻어맞고 쫓겨나서 화차(貨車)에 가까스로 설 자리를 비집을 수 있었다. 소년 시절에 왜인 경찰에게 무지스레 얻어맞았고 이제 다시 미국 군인에게 이 봉변을 당했다. 약소민족의 설움이 새삼스레 뼈에 사무친다.

 

그래도 그때는 일정(日政)을 반항하다가 얻어맞았지만 이번엔 미군정에 빌붙어서 좀 편한 자리를 얻으려다가 이 봉변이다. 그들의 만행을 책하기보다도 내 지지리 못났음이 한스럽다. 아무리 몸이 고달프더라도 다른 동포들과 함께 붐비는 중에 고생하는 것이 옳은 것을, 그들의 증명서를 이용하려던 내 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떠나기 전에 아내가 그 비루칙칙한 증명설랑은 쓰지 말라던 것을. 그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면서도 몸의 컨디션이 좋지 못함을 양심에의 변명으로 삼고 차 중의 안일을 얻고자 한 내 생각이 무엇보다도 잘못이었다.​”

 

일기에 일정에 반항하다가 얻어맞았다고만 했는데, 김 선배는 단순히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1928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일기에서는 정부가 안심하라고 하지만, 미덥지 못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디오를 틀어놓으니 대한민국 공보처 발표라 하고 아침에 수원으로 천도 운운한 것은 오보이고,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 집무하고 있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거듭 외치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까워지는 총포성은 무엇을 의미함일까?”​

 

김 선배뿐만 아니라 많은 서울시민이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피난 갈 기회를 놓쳤습니다. 혼비백산하여 뒤늦게 집을 나와 한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국군에 의해 한강다리가 끊어진 뒤였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가고, 서울시민들에게는 걱정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거짓말하고... 문득 임진왜란 때 먼저 도망가던 선조가 생각나고, 또한 걱정하지 말고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던 세월호 선원의 방송이 생각나는군요. 9.28 서울 수복 이후인 1950년 10월 16일에는 이런 배신감을 일기에 쓰셨더군요.​

 

“인공국 시절에 ‘계속 남진중’이란 말이 웃음거리로 유행하더니 지금은 ‘남하’란 말이 세도가 당당하게 쓰여지고 있다. 지난 6월 27일 ‘우리는 중앙청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 보고 있으며 우리 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하고 도처에서 적을 격파하여 적은 전면적으로 패주하고 있는 중이니 시민은 안심하고 직장을 사수하라’하고 목이 메도록 거듭 되풀이하여 방송하는 사이에 정부는 ‘남하’하고 모당(某黨)은 국민을 포탄 속에 속여서 내버려 두고 당원끼리만 비밀로 연락하여 ‘남하’를 권면하였다 하고, 정부의 고관 혹은 모당의 당원이 아니더라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피란하여 정처 없이 나선 것이 그럭저럭 가다보니 대구나 혹은 부산에서 우연히 정부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어 이른바 ‘정부를 따라 남하한’ 것이 되고, 그리고 우리 마을의 예를 들면, 상복이네 외삼촌처럼 눈이 굵고 천성으로 겁 많은 축들이 일찍 서둘러서 ‘남하’의 계열에 들었고, 또 명순네처럼 포성을 듣고는 허파가 뒤집혀서 어린아이 넷을 젖먹이까지 내버려두고 자기들만 ‘남하’하였고, ​

 

그리고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0% 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UN군의 서울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하여 곤박(困迫)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이미 정부의 각계 수사기관이 다각적으로 정비되었고 또 함몰 90일 동안에 적색분자와 악질 부역자들이 기관마다 마을마다 뚜렷이 나타나 있으니 이들을 뽑아내어서 시원히 처단하고 그 여외(餘外)의 백성들을랑 “얼마나 수고들 하였소. 우리들만 피란하게 되어서 미안하기 비길 데 없소” 하여야 할 것이거늘, 심사니 무엇이니 하고 인공국의 입내를 내어 인격을 모독하는 일이 허다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벅찬 경쟁자를,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동료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일조차 있다는 낭설이 생기게끔 되었으니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

 

피난하지 못하고 인공치하에 남은 사람들을 2등 국민 취급하는 이승만 정권. 김 선배 말마따나 적색분자와 악질 부역자들은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어늘, 모두를 싸잡아 인격을 모독하고 심지어는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을 몰아내는 저급한 인간들. 김 선배는 인격모독만을 이야기하였지만, 서울을 수복하면서 이들은 우이동, 일산 금정굴 등 전국적으로는 168곳이나 된다는 곳에서 단순 부역자, 부역자 가족(어린이, 노인 포함),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 등 정상적이라면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많은 사람을 학살하였지요. ​

 

어찌 우리만 이렇겠습니까?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도 더했으면 더했지 마찬가지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일기에서 김 선배는 인민군이 자수하면 신분 보장해준다고 하여 자수한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얘기를 적어놓았습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오래전에 읽은 김홍신 작가의 소설이 생각납니다. 6·25 때 어느 섬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잘 모르는 섬 주민들이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이리저리 학살당하고, 또 국군이 수복한 뒤에는 부역자 색출한다면서 또 이리저리 학살당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소설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유연함을 잃고 딱딱해지면 그것은 한낱 광기에 불과합니다. 김 선배는 1950년 8월 22일 일기에서 자신이 전해 들은, 대한민국을 그리워하며 애국가를 부르던 사람들 이야기를 적어놓았습니다.​

 

“광주(廣州) 어느 산골길에서 피란민들이 보여서 애국가를 불렀다거든요. 아니 그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하는 것 말고 ‘동해물과 백두산’을 말요. 그럴 수가 있느냐구요. 있다마다 뿐입니까. 백성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오늘날과 같이 불타오른 건 일찍 없었을 겁니다.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어보고 모두들 대한민국을 뼈저리게 그리워하거든요. 거기다 더욱이 피란하는 신세, 감상적이 된다는 건 아직도 포시라운 때의 말이고, 굶주리고 노다지로 비를 맞고 한둔하고 이러기를 날이 갈수록 계속하면 아주 절망적이 될 거 아닙니까. 그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언제 죽을지도 모를 목숨이고 하니까 우리들이 집에 앉아서 생각하는 바와는 위험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거든요.

 

잃어진 대한민국에 대한 그리움에서랄지, 또는 동족상잔의 내란을 일으켜서 자기네들의 집과 재산을 불태워버리게 하고, 이러한 죽을 고비에로 몰아넣는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발심에서랄지, 하여튼 될 대로 되어라 하는, 거진 자포자기적인 심리로 어느 한 사람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고 목청을 돋우면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모두들 따라 합창하고, 그리고 마지막엔 통곡으로 변한 거거든요. 한번은 이러한 장면을 변복한 인민군이 목도하고 갑자기 권총을 내어서 난사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들었건만 우리도 산골에 호젓이 모이면 또 그 노래를 부르고 울고 하였답니다.”​

 

일기를 몇 개 인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글이 꽤 길어졌군요. 마지막으로 김 선배가 전쟁의 참상에 관해 쓴 일기 하나만 인용하겠습니다. 1950년 12월 19일 일기에서 김 선배는 자신이 들은 전쟁의 참상을 일기에 적었습니다.​

 

“기차 지붕마루에 올라탄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을 줄로 묶어 차고 있었는데, 어머니 자신이 졸다가 떨어져서 아이들마저 함께 죽어버렸다. 어떤 부인이 기차 지붕마루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일행은 이불을 펴서 바람을 가려주노라 하였으나 엄동설한에 달리는 기차 위이므로 그 추위가 오죽할라고. 산모는 갓 낳은 새 생명을 집어서는 차 아래로 던져버리고 그 자리에 고꾸라져 의식을 잃어버렸다.

 

어떤 젊은 부인은 아기를 업고 죽을 힘을 다해 기차 지붕마루로 기어오르긴 하였으나 워낙 손이 꽁꽁 얼어서 마음대로 아기를 잘 추스르지도 못하였는데 얼마를 가다 젖을 먹이려고 아기를 내려보니 이미 싸느랗게 숨죽어 있었으므로 이 가엾은 젊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곧 미쳐버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죽어나는 것은 백성입니다. 그 백성들이 전쟁을 원했습니까? 민간인, 적군, 아군 모두 하여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6.25 전쟁. 그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역사 앞에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들입니다. 이런 전쟁의 참상을 사학자의 눈으로 일기에 적은 김 선배. 김 선배는 단순히 전쟁의 고통을 일기에 남긴 것이 아니라, 사학자의 임무로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려고 그 마음 졸이는 전쟁통에도 일기를 적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김 선배는 너무도 아쉽게 1951년 10월 9일 고향 영천에 갔다가 괴한의 총격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누가 김 선배를 쏘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아직도 산악지대에는 좌익들이 남아 있어서 이들이 김 선배를 쏘지 않았나 짐작할 뿐입니다. 인공치하를 무사히 넘긴 김 선배가 그렇게 너무도 일찍 괴한의 총격에 쓰러지셔야 했다니 너무도 애통합니다.

 

살아계셨다면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큰 자취를 남기셨을 김 선배. 6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새까만 후배가 김 선배 영전에 조화를 바칩니다. “선배님! 선배님 덕분에 전쟁의 참상,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피부로 진하게 느꼈습니다. 선배님이 일기를 쓰시면서 염원하셨을 진정한 평화가 이 한반도에 곧 올 것을 기도합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선배님께 큰절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