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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정도전의 정치사상, '백성이 나라의 근본'

세종시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사상가) ⑯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23]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정도전(鄭道傳, 1342, 충혜왕 복위 3~ 1398, 태조 7)

 

 

정도전은 조선전기 정치인이자 학자로 호는 삼봉(三峰)이다.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고려 말 개혁적 신진사대부로 활동했으나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어 혈통 문제로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조선의 건국을 기획하고 구현해냈다. 조선조의 국가경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킨 설계자이기도 하다.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경세론 관련 저작을 남겼다. 세자책봉 문제로 불거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의 사상을 모은 《삼봉집》이 있다.

 

세종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생각되지만 조선 건국의 민권 사상과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는 있으니 먼저는 당시 왕조세력의 관점인 《조선왕조실록》 평가로서의 졸기를 살펴보자.(《태조실록》7/ 8/26. 1398)

 

졸기

 

정도전의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은 안동(安東) 봉화(奉化)다.

고려 왕조 공민왕 9년(경자년, 1360)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임인년(1362)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병오년(1366)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신해년(1371)에 불러서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갑인년(1374)에 공민왕이 죽어, 을묘년(1375, 우왕 1)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 공민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宰相)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會津)으로 쫓겨났다.

 

갑자년(1384, 우왕10)에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387, 우왕 13)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부사가 되었다.

 

무진년(1388, 우왕14)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 고시관)로 승진되고, 십학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ㆍ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기사년(1389, 창왕 14)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을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었다.

신미년(1391, 공양왕 3)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쫓겨났으나, 임신년(1392)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推戴)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시랑찬성사를 가하였다. 또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ㆍ《수수도(蒐狩圖)》ㆍ《경국전(經國典)》ㆍ《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ㆍ문덕(文德)ㆍ납씨(納氏)ㆍ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펴냈다.

 

병자년(1396, 태조 5)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의 시험관)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1397, 태조 6)에 동북면을 안정시켜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 7)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의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고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그루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나서 자랐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는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왕권을 지녔던 조정의 입장에서는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정치사상

 

그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민본 사상", 곧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민본 사상에 어긋나는 정치가 펼쳐지고 있다면, 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성(姓)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역성혁명"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본 사상에 맞는 정치란 어떤 것인가? 백성에 대한 "인(仁, 어진 마음)"에 기초한 덕치가 가장 바른 정치가 된다. 법에 따른 엄격한 "형벌"보다는 "덕"과 "예"로써 하는 정치가 인간을 올바르게 만드는 훌륭한 정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정치관에 따르면, ‘참된 선비’만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 정도전은 참된 선비의 으뜸인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옹호했고, ‘임금’은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의 통치자로 남기를 원했다. 따라서 임금은 대대로 세습되어도 좋다고 생각했고, 훌륭한 재상만 있다면 나라가 바르게 운영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재상권 강화론은 강력한 왕권을 꿈꿨던 이방원의 생각과 충돌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산업의 근본이 ‘농업’에 있다고 보았고, 공업과 상업은 ‘말업(末業)’이라고 주장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 그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나라의 재산으로 몰수하여 모든 백성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오늘날 공산주의와 같은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사상은 조선 왕조 500년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정치가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의 쿠데타에 의한 죽음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사상가로서의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법과 제도에 구현되어 조선에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사대주의와 사농공상, 문치주의의 폐해도 역시 정도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있을 수 있다.(참고 : Jung John ; 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1999>(정도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