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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다테마쓰 판사, 감옥에서 박열 혼례식 올려줘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 안재성, 인문서원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42]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재성 작가가 쓴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일까요? 박열은 동경 유학 중 기존의 독립운동에서 더 나아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일왕 체제를 부정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1923년 9월 5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까지 22년 동안 긴긴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왕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구입하려는 등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온한 투사였기에 작가는 박열에게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알고 봤더니 박열 혁명가는 제 고등학교 대선배님이시네요. 고교 시절 박열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일본 군대를 환송하는 정류장에서 ‘일본 만세(萬歲)!’라고 외쳐야 할 것을, ‘일본 망세(亡歲)’라고 외치며 스스로 위로했다고 하네요. 1919년 10월 무렵 동경으로 유학을 온 박열은 흑도회를 창립합니다.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정색을 넣어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하네요. 흑도회의 강령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주의가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박혀버리면 타락하고 멸망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무엇이라 하던 크로포트킨이 무엇이라 하던 우리와는 상관없다. 우리에게는 우리로서 존중하여야 할 체험이 있고 명분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로서 존중하여야 할 체험이 있고 명분이 있다. 또한 행동방침이 있으며 뜨거운 피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이든 일정한 틀에 박혀버리면 타락하기 마련이지요. 당시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으로 비쳤는데, 박열도 처음에는 그러한 사회주의에 호감을 보이다가, 사회주의에서도 타락의 면을 보고 아나키스트가 된 것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여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우당 이회영 선생도 나중에 아나키스트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66살의 나이에 직접 일본 만주군 사령관을 처단하기 위해 배를 타고 대련으로 갔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받다가 순국하시고요. 그런데 박열은 무정부주의도 결국의 하나의 ‘주의’로 빠질 위험성을 직시하고, 무정부주의에서 더 나아가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이런 박열이 어느 일본 여성에게는 매력적으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우연히 잡지 《조선청년》 교정지에서 박열의 시 <개새끼>를 보고, 그대로 박열에 빠져듭니다.​

 

나는 개새끼로서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서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하! 허무주의가 박열에게 ‘개새끼’라는 시를 쓰게 하였군요. 박열에 눈이 먼 가네코는 수소문하여 박열을 만나 정신적으로 서로 교감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둘은 곧바로 동거생활로 들어가지요. 그 당시 여자가 먼저 생면부지의 남자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가네코라는 여인도 참 대단하네요. 그런데 흑도회는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사이의 갈등 때문에 해산됩니다. 그래서 박열은 1922년 11월 무렵 따로 ‘흑로회’를, 1923년 4월 무렵에는 ‘불령사’를 창립하고, 이와 별도로 ‘혈거단’이라는 비밀지하단체도 만듭니다.​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들을 대거 체포합니다. 이때 박열과 가네코도 체포되지요. 그리고 박열과 가네코를 히로히토 천황을 폭살하려 한 대역죄인으로 재판에 넘깁니다.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의 조선인 학살은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요?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대지진을 이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였는데, 안재성 작가는 학살당한 조선인이 6,661명이라고 하네요.​

 

1925년 12월 박열과 가네코는 옥중 혼인을 합니다.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센이 사랑하는 연인이 혼인도 못 하고 사형을 당할 것을 동정하여 혼례식을 올리게 해 준 것이지요. 다테마쓰 판사는 두 연인이 제대로 예복을 입고 식을 올리도록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둘이 첫날밤을 보내게 배려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혼인신고도 할 수 있도록 하여 합법적인 부부가 될 수 있도록 하고요.

 

이 밖에도 다테마쓰 판사는 박열의 인품에 감화되었는지, 박열이 감옥 안에서도 한복 차림으로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면회가 오면 형무소장의 응접실에서 특별 면회를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심판사가 일개 죄인을 이렇게까지 배려해 준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인데, 그래서인지 박열은 다테마쓰 판사가 적을 이해하고 모욕하지 않는 진실한 사람이라며 존경스럽다고까지 말합니다. ​

 

1926년 3월 25일 부부는 예상대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박열은 선고 공판에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려거든 죽여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얘기합니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있는 박열에게 사형 선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고 당일 히로히토는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준다고 좋아할 사람들이 아니지요. 가네코는 은사장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박열도 찢으려 했으나 은사장을 빼앗기지요. 그러나 사형당할 기회를 빼앗긴 박열은 곧바로 단식에 들어갔다가, 지바 형무소장의 눈물 어린 호소로 단식을 중단합니다.​

 

그런데 무기로 감형된 지 넉 달 만에 가네코는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가네코는 삼노끈을 잇는 작업을 하다가 간수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철장에 삼노끈을 걸고 목을 맨 채 매달려 있었다는군요. 그렇기에 자살로 추정되지만, 타살로 의심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 뒤 가네코의 주검은 박열의 고향인 문경읍 팔령 2리에 있는 박씨 문중의 선산에 묻힙니다.

 

가네코의 죽음은 이들 부부의 감형으로 갈등을 빚고 있던 일본 정계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합니다. 이리하여 내각은 총사퇴하고, 또한 박열 부부에 편의를 봐주었던 다테마쓰 예심판사는 파면당합니다. 그리고 재판에서 동정적인 발언을 하였던 마키노 판사는 판사직에서 물러나고요.​

 

가네코가 죽었을 때 다시 단식하였던 박열은 이번에는 강제로 단식이 중단되고, 이후 1945년 10월 무렵 아키타 형무소 오다테 지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 동안 긴 감옥생활에 들어갑니다. 안중근 의사도 대련감옥에 있을 때, 형무소장 이하 많은 일본인 간수가 안 의사의 인품에 감화하여 안 의사를 존경하지 않았습니까? 가장 가까이에서 안 의사를 지켜본 간수 치바 도시치는 자기 집에 안 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죽을 때까지 안 의사에게 공양을 드렸고요.

 

박열과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낸 간수 후지시타 이이치로도(나중에 교도소장으로 퇴직) 자신의 책 《혁명가 박열 선생 편영》에서 박열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지요. 그뿐만 아니라 박열이 석방된 뒤 열린 박열 환영식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고, 셋째 아들을 박정진으로 개명시키고 박열의 양자로 바치기까지 합니다.​

 

광복된 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직을 결성하지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조총련을 결성하고, 우파는 민단을 결성하고요. 박열은 민단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됩니다. 효창원에 가면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세 독립투사의 무덤이 있지요? 백범 김구의 요청에 따라 박열이 주검을 수습하여 보낸 것입니다. 백범은 주검을 인수하고 고맙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데, 여기에도 박열을 무정부주의자로 표현하네요.​

 

“나는 박열 군의 성명서를 읽고 깊이 경의를 표하여 마지않는다. 무엇보다도 군은 무정부주의자다. 군의 이상과 신조로 보아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성을 절대 존중하는 군으로서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서는 각자의 주장을 버리고 오직 독립 일로(一路)로 매진하자 하였으니, 이것은 군의 애국 정성으로 단결을 요구하는 충심에서 표명된 것이다.​”

 

박열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합니다. 1919년 조국을 떠난 이후 29년 만에 귀국했네요. 국회에서 연설을 마친 박열은 고향 문경으로 내려가 가네코의 무덤에 참배합니다. 그리고 1949년 5월 4일 영구 귀국합니다. 귀국 뒤 박열은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장학 사업에 힘쓰고, 박열문화연구소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나섭니다. 원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박열이 자신의 꿈을 펼친 기간은 불과 1년여밖에 안 됩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박열은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간 것이지요.​

 

다행히 김일성은 박열을 독립투사로 대우한 것인지, 아니면 이용 값어치가 있다고 보았는지 박열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준비위원으로 앉혔고, 그 후 박열은 동 협의회 회장으로 있다가 1974년 1월 17일 죽어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힙니다. 여기에는 정인모, 백관수, 현상윤 등 여러 납북인사가 안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박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남한에서도 추도식이 열렸고, 1989년 3월 1일에는 박열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현재 박열의 생가는 경북지방문화재 148호로 지정되어 있고, 박열의사 기념관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2003년 12월 무렵 가네코의 무덤을 박열의사기념공원 경내로 이장합니다. 가네코는 ‘일본을 움직인 10대 여장부’로 불리고 있어, 해마다 가네코의 무덤을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많다는군요.​

 

무정부주의자 박열! 그와 삶과 사상을 같이한 일본 여성 가네코! 저도 그들의 삶의 향기를 찾아 문경의 박열의사기념공원을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