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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굽은 길도 곧게 가는 삶을 살았던 김종채

《민주화에서 통일까지》 김종채, 르몽드코리아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53]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등학교 동기 김종채의 책 《민주화에서 통일까지》를 읽었습니다. 제가 고교 동기들이 쓴 책 가운데 학술서적 또는 전문서적이 아닌 대중용 책들은 대부분 읽어보았는데, 이번 책은 특별합니다. 이번 책은 종채의 유고집입니다. 이 말은 책을 쓴 김종채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겠지요? 예! 맞습니다. 종채는 2022년 5월 14일 서울대 사회대평론 편집실 모임 선후배들과 같이 남산을 오르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같은 해 9. 13. 사망하였습니다.

 

 

이 책은 종채를 아끼는 친구, 선후배들이 종채의 유고를 모아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단순히 종채의 글만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 4부에는 종채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추모글도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유고집이다 보니 학술논문이나 수필 등을 가리지 않고 종채의 글이 모두 실려 있습니다. 유고집 발간에 핵심 역할을 한 사회대평론 편집실 모임의 박순성은 서문에서 펴내는 취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한국 사회의 문제로부터 환경과 평화라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까지 고민하면서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끊임없이 모색했던 그의 삶은 쉼 없는 학문적 정진과 실천적 행동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급작스러운 죽음은 치열했던 그의 삶이 마치 ‘미완의 삶’인 것처럼 우리에게 마음의 빚을 남겼다. 이러한 우리들의 안타깝고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그의 삶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유고집 발간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는 유신정권의 암울한 시대였지요. 그래서 데모 함성과 최루탄 가스가 날릴 때가 많았으며, 즐거워야 할 축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늘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최루탄 가스로 범벅이 되었었습니다. ‘지구촌 전체의 문제까지 고민하면서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끊임없이 모색했던’ 종채는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1979년 9월 11일 학내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당연히 유신정권은 종채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였고, 학교에서는 종채를 제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 26일 정보부장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에 쏜 총탄에 박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종채는 1979년 12월 면소판결을 받고 이듬해 3월 복학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980년 12월 무렵 서울대에 뿌려진 유인물이 단서가 된 무림사건에 연루되어 1981년 1월 23일 강제로 군에 끌려갔습니다.

 

종채는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뒤늦게 1993년 9월 독일 유학을 떠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합니다. 유고집 1부는 종채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입니다. 이 말은 종채가 학위는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함축하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종채는 독일에서 10년 동안 공부하였지만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그의 학위논문 제목은 「통일 독일의 민영화와 신탁관리청」입니다. 독일 통일 문제를 외국인이 다루기에는 너무 버거운 과제였습니다.

 

보통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오는 학자들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주제로 학위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종채도 ‘독일 통일과 한반도 통일 문제를 연계한 주제로 논문 준비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논문 심사를 하는 독일학자들도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종채만큼 깊게 파고들 수 없고, 또 자기들도 종채를 통하여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한 학술자료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학위논문 통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논문 제목이 「통일 독일의 민영화와 신탁관리청」인데, ‘독일 통일 얘기하는데, 신탁관리청은 뭐야?’ 하는 생각이 언뜻 들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신탁관리청은 공산치하에서 국유화된 기업들을 민영화할 때 이를 시장 자율에 맡기지 않고, 신탁관리청이 역할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종채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에서 사용된 신탁관리청 방식은, 단지 기업의 판매목록만 가지고 매각의 방법과 절차를 시장에 맡기지 않고, 행정기관이 대행인이 되어 구매자의 기업개념을 심사하고 투자 계획과 종업원 승계를 위해 필요할 경우 보조금을 지불하며 ‘상세한 협상계약’을 맺은 다음에는 계약서를 통제 수단으로 하여 실행을 감독할 수 있게 하였다. 신탁관리청은 ‘계약으로 결박된 책임 경영자가 가장 좋은 기업 재편의 담당자’라는 원칙을 세우고 기업의 가장 좋은 주인을 찾아주는 제도적 장치를 개발하였다.“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흑막이 개재되어 소수의 검은 손만 배를 불리게 하는 부작용이 있지 않았습니까? 신탁관리청 방식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통일될 때도 참고할 만한 좋은 제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신탁관리청의 손에 맡기다가는, 민영화에 시간이 너무 걸리거나 반대로 신탁관리청 직원이 과로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소규모 여관, 식당, 상점 등의 작은 민영화는 기초 지자체 단위의 경매를 통하여 새로운 소유자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하였고, 큰 민영화에만 신탁관리청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1부에 이어 2부는 ‘학문적 구도의 자취’라는 제목으로 종채의 여러 논문을 실었고, 3부에는 ‘실천적 삶의 편린’이란 제목으로 종채가 쓴 이러저러한 글들이 실렸습니다. 그러니까 종채의 개인적 삶의 편린은 3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3부의 글들을 보니, 학내시위로 구속되어 있을 때 종채는 강제언의 《조선 근대사연구(일어판)》을 읽었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던 날인 1979년 10월 26일 종채는 마침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쏘아 죽인 뒤, ”나는 그가 동양평화의 공적이어서 쏘았노라“라고 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네요.

 

그리고 위에서 종채가 무림 사건으로 강제 입영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무림사건’이라고 했나 했더니, 공안당국이 20여 명을 강제로 입영시키기는 했지만, 조직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내지는 못했답니다. 그래서 안개 속의 수풀을 뒤지는 것 같다고 공안당국에서 안개 무(霧)‘ 자에 수풀 ’림(林)‘ 자를 써서 무립(霧林)’ 조직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네요.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종채가 2009년 7월 11일에 유언장을 미리 써놓았습니다. 유언장에서 종채는 화장 뒤에 자신의 유골 가루를 임진강,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에 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무 절에서나 스님 한 분 모셔다가 반야심경 한 번 외우고 염불한 뒤, 혜초의 다음 시 한 수 읊어주면 된다고 하였네요.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어이

그대의 높은 뜻이 꿈이란 말가

고국 가는 먼 길을 누가 알련가

흰 구름만 덧없이 돌아가누나

 

2009년이면 아직 50 초반의 나이일 땐데, 종채는 벌써 그때 유언장을 써놓았습니다. 그때 이미 종채는 자신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을 것임을 예견했던 건가요? 시에 독일에서 학위를 받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종채의 아쉬움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채는 이 시를 자신의 영전 앞에서 읊어달라고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군에 있을 때 얘기도 있습니다. 군당국은 강제입영된 학생들을 혹시라도 월북할까 봐 철책 위쪽에 있는 부대에는 보내지 않았고, 어떤 공용화기(박격포 등 보병의 비교적 큰 화기) 사수나 비밀 취급 업무도 맡기지 않았답니다. 하다못해 소대에 있는 공용화기 사수나 로켓포 사수도 맡기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종채의 시위전력을 보고 꼴통보수 쪽에서는 지레짐작으로 종채를 흔히 말하는 ‘좌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종채의 글에는 함세웅 신부에 대해 비판한 글도 있습니다.

 

”함세웅 신부님이 ‘어떠한 동맹보다 민족이 더 낫다.’고 했군요. 도무지 뭘 모르시는 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기근과 아사, 김정은 정권의 인권유린과 폭정, 국제사회에 대한 “깡패 행위”, 그것을 제재하지 않고 “핵보유국”을 인정하자고요? 북한주민은 노예로, 남한주민은 인질로 잡아놓고 몸값만 갖다 바치는 협박에 굴복하자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요즘 대통령부터 나서서 철 지난 이념 공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종채는 이런 이념 공격에 대해서도 한마디 합니다. 종채는 현대사회에서 제도와 정책은 공유하는 가치와 헌법규범 아래서의 이해관계 조율 방법이랍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내에서는 자유 생명 재산권의 보호, 양심과 신체의 자유라는 원칙은 다 공유하니까, 방법을 놓고 정책과 제도 설계를 놓고 원래의 취지와 환경변화와 기술적ㆍ재정적 자원, 지적 조율능력을 토대로 토론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이념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이 정치판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에 암울하던 차에 종채의 말이 확 다가옵니다.

 

4부의 제목은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김종채’입니다. 그 처음은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형 김석환 목사님이 쓰셨습니다. 종채는 어디 갈 때면 항상 태양광 배낭을 메고 다녔는데, 목사님은 그 배낭에 늘 들어있던 메모 노트의 마지막 문구를 글 서두에 인용합니다.

 

”꿈꾸는 능력...

서산에 떨어지는 붉은 해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을 벌겋게 물들이리라.“

 

제3자인 우리가 볼 때는 종채가 인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리라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지만, 형은 종채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이 문구를 보면서 ‘아! 이것이 정녕 내 잘난(?) 동생의 마지막인가?’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저랑 로고스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는 조윤신은 고1 때 종채가 결핵검사 얘기를 한 추억을 말합니다. 당시 종채는 결핵 양성 반응이 나와 약을 먹는데, 혹시 가까운 친구 윤신이에게 옮겼을까 봐 걱정되어 얘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윤신이가 종채를 따라 병원 갔는데, 검사 결과 음성이 나오니 종채가 무척 기뻐했답니다. 윤신이는 자신이 결핵약 먹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은 것을 종채가 큰 용기를 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고교동기 강석진은 종채가 모의고사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학습계획에 따라 공부하던 추억을 얘기합니다. 종채의 공부하는 스타일에서 잠깐 엿보이듯이 요령, 편리함 등과는 거리가 먼, 굽은 길도 곧게 가는 삶이 우리 종채의 인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에 막 입학한 종채의 앞에는 가시덤불로 가득 덮여 있는 굽은 길, 곧 유신독재 체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종채는 그 길을 곧게 가는 행로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종채의 후배 강영진은 종채가 쓰러졌을 때 종채의 백팩에는 진도 홍주 큰 병이 들어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당시 종채는 해남에 방 하나 얻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후배들을 만나면 나눠 마시려고 가져온 것이지요. 그래서 강영진은 종채가 해남 시골에서 새벽길을 나서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서울 성곽까지 오다 보니, 평소 간당간당했던 체력마저 다 소진되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 아닐지 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종채의 백팩에 들어있던 메모에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벌겋게 물들이리라”라고 써놓았는데, 결국 종채는 장미보다 붉은빛의 홍주를 짊어지고 서산에 떨어지는 붉은 해처럼 산을 넘어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고등학교 동기들 가운데 벌써 한 반의 숫자를 넘는 동기들이 우리들 곁을 떠났는데, 종채 역시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종채의 글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사회의 원칙은 평등(equality)한 인격, 공평(equity)한 경쟁 그리고 기본 욕구(basic needs)를 충족하는 복지국가와 법치국가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 김종채! 그가 꿈꾸던 사회가 이 땅에 꼭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유고집의 마지막을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