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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내면의 정신을 논리화한 이애주의 춤

이애주 전통춤의 계승 그리고 미학 세계 1
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3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펼쳐졌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겨레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다.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

 

이애주(여, 1947~2021)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가운데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였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애주의 승무

 

무의미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한없이 채워가며 우리 춤의 미적 세계관을 찰지게 한 춤, 그것이 「승무」다. 이애주의 스승 한영숙은 13살 때부터 그의 조부 한성준으로부터 춤을 배웠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춤이 「승무」다. 한영숙은 나이 18살 되던 해 독자적 발표회를 가질 정도로 춤에 몰두함으로써 일찍이 할아버지의 춤 예술을 활짝 꽃피우게 한 공로자로 각인되었다.

 

 

1946년 조부 한성준이 운영하였던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인수하여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뒤 후학을 양성하였다. 수백 회에 달하는 나라 안팎 공연에 참여하였고,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서라벌예술대학과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조교수를 지냈다. 이후 한영숙은 1969년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그리고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학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승무」는 예술적 법도와 주어진 규범 위에서 춤꾼의 자세와 태도를 가늠케 하는 전통춤의 백미다. 불교 의례로 시작되어 절 밖의 탁발승과 사당춤으로 전환된 뒤 교방 기녀의 흥춤 그리고 무대 예술의 예술적 춤을 거쳐서 오늘날 문화재춤으로 거듭났다. 그리하여 「승무」는 전통춤을 이어가는 계승자가 소화해야 하는 교과서적인 춤이 된 것이다. 민족의 춤을 전승하고 춤꾼으로 명성을 얻게 하는 데에도 늘 「승무」는 기준점을 갖는 수준 높은 춤으로 군림하는 까닭이다.

 

정성을 들여야만 미적 값어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춤이 바로 「승무」기에 이 춤을 잇는 계승자의 예능적 재주는 절대적이다. 「승무」가 춤꾼의 예술적 법도와 주어진 규범을 지키며 올바른 자세와 태도를 가늠케 하는 전통춤의 백미로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계승자의 명성 또한 「승무」 춤새를 펼쳐 보이는 예능적 솜씨와 재주로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규범의 춤으로 삼아지곤 한다.

 

한영숙류 「승무」 계승자 이애주는 한영숙 직계제자 가운데 가장 앞서 전통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계승자다. 이애주 「승무」를 두고 찬연한 음악과 장단으로 꼿꼿하게 춤새를 이은 명무의 춤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승 한영숙으로부터 이어진 전통춤의 진맛을 자신의 춤 생애에서 아낌없이 펼쳐 보였다. 그렇기에 고난과 역경을 뛰어넘게 하는 춤의 술법사 이애주가 펼쳤던 「승무」는 우아함, 장엄함, 정중함, 섬세함, 정교함 등이 끊임없이 풍긴 전통춤의 진수와 진리를 표명하였다. 그가 떠난 지금의 시간에서도 그의 「승무」 평가에서는 흥과 멋, 맛과 참이 어우러진 우리춤의 밑거름으로 기억된다.

 

 

이애주 「승무」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의 춤새며 춤을 대하는 태도며 춤의 원리를 다루는 안목에 대한 깊은 통찰력 때문이다. 춤의 근본과 진리를 앞세워 내면의 미학 세계를 흥과 멋으로 표출한 춤꾼, 우리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수 있도록 내면의 기운을 끌어 올릴 줄 아는 춤꾼, 그가 이애주이다.

 

「승무」를 통해 평생토록 우리에게 보여줬던 미학과 사유체계는 이애주가 춤꾼으로서뿐만 아니라 무형유산 전승자의 역할까지도 더불어 책임졌던 교육자로서 빛을 발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애주의 장엄한 장삼 사위가 내 품는 기운을 타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고달픈 정신을 보듬어 준 춤사위, 아픔을 달랜 북가락, 이애주 「승무」에서 우러난 혼신의 예술이다.

 

이애주의 살풀이춤

 

굿에서 살풀이 의례를 주관하는 무당은 악가무를 동반하여 ‘풀이’ 행위를 구체화하는데, 그 중심에 상징적 춤 행위가 기능한다. 따라서 살을 푸는 의례로서의 ‘풀이 행위’는 종교적 목적의 신앙이지만 그 형식의 춤을 미적 표현예술로 탈바꿈한 것이 「살풀이춤」이다.

 

따라서 춤예술로써의 「살풀이춤」은 민중의 정서를 안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당대의 수준 있는 춤꾼과 만남으로써 새롭게 태동한 시대적인 겨레의 춤이다. 그래서 살풀이는 무당의 종교 신앙의례로 삼는 것이지만, 「살풀이춤」은 춤꾼의 미적 표현 행위예술로 논의된다. 그리고 「살풀이춤」은 순발력을 기반으로 즉흥성이 자유자재로 구사될 수 있는 춤이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흩뜨리게 추는 춤이 아니라 정해진 규범 속에서의 융통성을 갖는 춤이다.

 

 

이애주 「살풀이춤」은 의례(살풀이)에서 예술(살풀이춤)로의 전환 속에서 시대적 민중의 감정과 정서를 감싸 안고 구축된 뿌리 깊은 전통춤이다. 재인청, 신청, 권번, 어정판 등에서 내 뒹굴던 의례춤이 무형문화재 명성으로 흥과 멋을 껴안은 예술춤으로 거듭났다. 억제와 절제로 한없이 피어오른 내면의 기운을 들어 올려 긴장과 이완을 자극하며 정중동의 미를 극대화하는 문화재춤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애주의 한영숙류 「살풀이춤」에는 전통적으로 대물림 된 기교가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스승이 그랬듯이, 이애주 역시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함과 깔끔함을 앞세워 정갈한 「살풀이춤」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움직인다. 단아하고 우아함에 집중하여 춤사위 하나하나의 의미 표출에 방점을 찍는 것이기에 분장술, 조명술, 의상술 등의 형식적 겉치레는 중요치 않은 이애주의 「살풀이춤」이다. 춤의 원리와 본질을 꿰뚫어서 그 속에 담긴 심미적 기운을 드러내는 데보다 무게를 두기에 그의 「살풀이춤」은 각별하다.

 

이애주의 태평춤

 

위엄을 드높이는 당당한 기상으로 춤새를 엮어내는 이애주의 「태평춤」은 음양 화합을 중시하며 상생과 화합, 공존과 공생의 어울림을 묘사한다. 춤새 하나하나에 시화연풍의 희망찬 꿈을 싣고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우리의 몸짓 「태평춤」이다. 이러한 이애주 「태평춤」은 서울ㆍ경기무속 음악을 바탕삼아 화려하고 절제된 손놀림, 묵직하면서도 재빠른 발디딤, 정제된 몸 굴림 등으로 무궁한 태극형 춤새를 교묘하게 엮었다 풀었다 하며 곱디고운 자태를 풍기며 신명의 정수를 달린다.

 

그야말로 전통춤의 예술적 묘미를 펼쳐내는 춤의 향연이 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시작과 끝맺음까지도 단 한 번의 풀어짐이나 멈춤이 없이, 마냥 쪼이고 쪼여 수백 년 곰삭은 맛을 우려내듯 깊은 위세와 위엄을 떨친다. 이로써 이애주 「태평춤」이 얼마나 삶의 희로애락을 논하고 그 내면의 세계를 트인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자 하는 춤인가를 가늠케 하는 것이다.

 

이애주 「태평춤」은 경기 도당굿과 맞닿아 있다. 춤새가 그렇고 가락이 그러하며 선율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애주 「태평춤」은 신앙의례로부터 출발한 옛 모습을 가득히 담고 있다. 20세기 초, 한성준에 의해 나라의 태평성대와 국태민안 그리고 민중의 안과태평과 부귀영화를 꿈꾸며 작품화된 「태평춤」은 20세기 중엽 한영숙에게로 이어졌고, 다시 그의 제자 이애주에게 전수돼 새천년 선상에서 거듭났다. 「태평춤」을 오늘날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태평무 모체로 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평무의 본디 춤인 「태평춤」은 억제와 절제 기법을 억누르고 대소삼 원리를 기본 삼아 밀고 달고 맺고 풀어 춤의 풍미를 더한다. 끼를 표출하면서도 정도를 지키는 춤꾼의 참 정신을 보여주는 이애주 「태평춤」에는 생명철학이 살아 숨쉬기 때문에 절묘한 가락과 음률을 춤새 마디마디에 붙여 마치 영기(靈氣) 위에 신선이 노니는 듯 형이상적 춤사위를 품어낸다. 장단이 가락을 내고 그 가락이 춤으로 녹아나므로 절정에 달한 「태평춤」 극치가 참으로 미적 극치를 이룬다. 그러하기에 이애주 「태평춤」은 마치 무녀가 영적 존재를 영접하는 무아경 세계에 들기 위한 묘술적 몸놀림을 연상케도 한다.

 

이애주는 전통춤 지킴이로서 소임을 다했다. 특히 그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은 그의 각별한 전승 철학을 담아 구전심수로 전수하였다. 이애주 춤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성, 집단성, 공유성을 담아낸 문화 속의 진액, 전통이다. 그에게 전통춤은 전승되는 모든 춤의 바탕이었다.

 

그 개념은 옛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져 온 옛 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오늘의 시간 선상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의 훗날 전개된 그의 창작춤 모두가 전통춤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옛 춤이 그대로 전통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그 뼈대와 정신을 올곧이 지켜낼 때 비로소 전통춤이 되는 것임을 익히 깨달았던 이애주였다.

 

이애주의 전통춤은 마치 영기(靈氣)가 오장육부를 돌고 나와 길고도 먼 강물로 흘러내리듯 끈끈하고 흐트러짐 없이 이어져 가는 선을 그리고, 묵직하게 곰삭은 춤사위로 표출하였다. 옹골차게 뭉쳐지는 지숫기, 샘솟듯 솟구치는 돋음새, 음양을 섞어내는 양우선 등은 이애주가 전통춤에서 품어내는 향연이었다. 이애주 전통춤에서 또 하나의 절대적 생명은 악(樂)이었다. 춤 생성의 힘이며 기틀이며 이애주 춤 세계를 논하는 뼈대였다.

 

그러기에 춤에 묻어 우러나오는 삼현육각의 음률은 이애주의 신명적 춤을 더욱 돋구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춤과 강구연월을 읊는 악이 버무려져 뼈저린 번민과 허덕이는 고통을 제치고 열락의 환희와 기쁨을 찬미했던 이애주 전통춤은 스승 한영숙류에게서 물려받은 것과 자신이 전통을 기반으로 정립한 것으로 나뉜다. 「승무」, 「본살풀이」, 「살풀이춤」, 「태평춤」, 「태평무」, 「학춤」 등이 전자의 것이고 「본춤」, 「예의춤」, 「바라춤」, 「검무」, 「무극살풀이」, 「오방북놀이」 등이 후자의 것이다.

 

이애주는 참 춤꾼의 자세에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정신을 살리기 위해 오랫동안 공들였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의 기교가 아니라 안으로 다스려지는 내면의 정신을 논리화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춤꾼 이애주가 구축한 전통춤의 세계관이요 우주관이다. 이는 오로지 여타의 겨를이나 짬에 대한 셈법에서 자유로운 외길 춤 삶을 묵묵히 걸어온 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