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이애주 춤에는 시대 철학이 깃들어 진 우리네 춤 근본이 살아 숨 쉰다. 뿌리 있는 기틀과 원리를 인식하고, 그를 바탕삼아 품어낸 이애주 춤은 민중의 영혼과 사상을 펼쳐 보이는 마력과도 같은 춤으로 읽힌다. 섬세하고도 장엄한 춤사위로 환희와 기쁨을 품어내어 이애주만의 춤 맛을 우려내고, 정갈하고 기품 있는 전통의 맛을 살려낸 것이다. 대를 이어 오며 예술적 번뇌와 역경을 이겨내고 이애주 당대에 그 극치를 만끽한 것이다. 춤의 미학적 형식과 의미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애주의 춤은 예술로서의 값어치뿐만 아니다. 그 속에 녹아내린 춤의 원리와 사상으로 감 싸워진 생명철학이 함께 동반되어 있다. 이는 춤으로써 신인(神人) 상생과 인인(人人) 화합을 끊임없이 추구하여야 올바른 춤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춤꾼의 내면적 감정을 표출하고 흥과 멋의 극대화를 통해 삶의 평정을 도모하기 위한 삶 속의 예술로 빛내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이 춤꾼 이애주가 평생토록 소망하며 그렸던 이른바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춤,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노는 생명의 춤으로 정착될 수 있다. 이애주의 춤에는 민중의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1) 「땅끝」 한국춤 현실에 대한 이애주의 비판의식을 잘 드러낸 시대적 창작춤 「땅끝」, 「나눔굿」, 「도라지꽃」은 당시 춤계가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갈망의 몸부림이었다. 첫 번째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1974년,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펼쳐진 제1회 이애주 전통 춤판과 창작춤 「땅끝」이었다. 낮 3시 30분과 밤 7시 30분 등 모두 이틀 동안의 4회 공연은 국립국악원 악사 반주 음악과 함께 이애주 스승 한영숙을 비롯한 동료 정재만, 채희완 및 대학 탈꾼 그리고 무용 전공 학생들이 함께한 성대한 춤판이었다. 1부 전통춤은 <이애주의 춘앵전, 이애주ㆍ정재만의 학무, 한영숙의 살풀이, 채희완 외 7인의 봉산탈춤의 뭇동중, 이애주의 미얄춤, 김민기, 장민철, 이애주, 유갑수, 김석만 등의 불교의식춤 그리고 이애주의 「승무」> 공연이었고, 2부 창작춤은 「땅끝」으로 막을 올렸다. 20대 중반을 갓 넘긴 이애주가 춤판에서 던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그 내용을 1974년 이애주 춤판 팜플렛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 이 땅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춤을 추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펼쳐졌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겨레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다.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 이애주(여, 1947~2021)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가운데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였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