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서 새해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아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새해에는 항상 올해의 계획을 세웠다. 책을 1주일에 1권 이상 읽겠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 공부를 하겠다. 자격증을 하나 따겠다. 일본어를 배우겠다. 아들과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의 대화를 나누겠다. 교과서로 쓸 책을 한 권 쓰겠다 등등. 그러나 그러한 새해 결심은 항상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작심삼일에 그만 무너지는 결심도 있고 두세 달 가는 결심도 있다. 그러다가 연말에 돌이켜 보면 새해 결심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그때는 방학 숙제가 많았다. 매일 일기를 쓰고, 곤충 채집을 하고, 명승고적 방문기를 기록하고 등등...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방학숙제를 해야 하는데...’라며 걱정만 했다. 그러다가 개학 날짜가 내일모레로 다가오면 그때야 방학숙제를 한다고 온 야단법석을 치르고도 언제나 한두 가지 숙제는 하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다음 방학 때에는 꼭 방학숙제를 먼저 하고 놀아야지”라고 결심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지켜지지 못했다.
사람은 몇 살 때부터 젊은이가 아닌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좋아하는 울만이라는 미국 시인의 청춘이라는 제목의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Youth is not a time of life, but a state of mind.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오, 마음의 상태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나이 60살 노인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는 젊다고,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겨우 스무 살인데도 희망을 포기하고 모든 일에 열정이 사라졌다면 이미 ‘늙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말에 ‘애늙은이’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나이는 젊어도 생각은 늙은이가 되고 만 애늙은이를 가끔 볼 수 있다.
전라도 광주에 홍남순 변호사라고 이제는 팔순이 넘은 유명한 인권변호사가 있다. (주: 그분은 2006년에 향년 94살로 돌아가셨다) 언젠가 잡지 기사에서 보니 그분이 45살이 넘어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여 유단자가 되었단다. 태권도를 배운 동기가 흥미롭다. 그분은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어둡던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그런데 시위하다 보면 경찰봉에 맞아 몸에 멍이 들고 허리가 쑤시고. 그분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시위할 때 조금도 겁먹지 않고 전경의 곤봉을 막아내고 받아치고 용감한 투사가 되었단다. 김 교수에게 귀감이 되는 존경스러운 청춘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 교수도 젊었던 이십 대에는 해마다 새해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해마다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한가?”라고 자책감에 빠지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었다. “올해에는 꼭 지켜야지”라고 다짐하면서 다시 결심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씁쓸히 웃은 적이 있다. 저자가 말하기를, “못 지키는 결심을 자꾸 하는 것”은 젊은 사람의 특징이란다. 하도 결심을 지키지 못하니까, ‘내년에는 결심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하는데 그만 그러한 결심도 지키지 못하고 새해만 되면 또 결심하는 것이 젊은이의 특징이라나.
이제는 김 교수도 어디 가서 젊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새해에 적극적으로 새로운 무엇을 이루겠다는 결심보다는 올해는 운동하면서 건강을 유지해야지 하는 식의 현상 유지형의 결심을 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렇다. 못 지킬 결심일망정 계속하는 때가 좋았다! ‘새해 첫날에 결심하는 사람’이라고 젊은이를 정의 내린다면 그럴듯하지 않은가? 새해 첫날 곰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올해는 무엇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평탄한 삶에 평지풍파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다.
큰아들은 수능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그 점수로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은 어렵고 수도권에 있는 대학은 들어갈 수 있는 점수란다. 아들의 점수는 전국 평균으로 보면 상위 11%이니 그 정도면 잘한 셈이다. 수능 성적을 본 아내는 세칭 일류대학에는 원서도 낼 수 없는 점수라고 풀이 죽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면 점수를 물어 볼까, 봐 전화 받기조차 꺼린다.
전국 상위 11%이면 부끄러운 점수인가? 전국의 고3 학생 100명이 줄을 서 있는데 아들이 11번째에 서 있다면 “자랑할 만하다”라고 김 교수는 생각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성적보다는 개성과 창의성, 협동성, 친화성 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다행히 성격도 활발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또 지도력도 아비보다는 나은 것 같다.
둘째 아들은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이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일은 없다. 입시는 먼 훗날 이야기이고 그때는 세상이 많이도 변했을 것이다. 몇 년 지나면 대학입학 정원보다 고등학교 졸업생이 적어서 학생 유치 경쟁이 일어난다고 하니, 두고 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장학금 줄 테니까 원서만 우리 대학에 내시오. 뭐,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때는 아마 학생이 학교를 골라가는 기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물론 상위권의 대학 몇 개는 경쟁이 여전하겠지만 꼭 일류대학만 대학인가? 김 교수의 고등학교 동창생들도 보면 일류대학 나온 사람보다는 이름이 없는 대학 나온 사람들이 돈은 더 잘 벌고 재미있게 잘 살기만 하더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보면 정말로 큰돈을 번 사람은 대학에 가지 않은 친구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을 믿고 싶다.
아내는 조금만 일을 해도 피곤하다면서 얼굴 펼 날이 없다. 요즘은 가끔 허리도 아프다고 걱정한다. 아이를 둘 낳은, 사십 넘은 여자치고 잔병이 없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불교 신자들은 다 아는 ‘보왕삼매론’ 제1절은 “몸에 병 없기를 구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으니 아무 병도 없이 지내면 오히려 좋지 않은 면도 있을 것이다.
시집 식구 대하는 것은 아직도 미흡하지만, 그거야 아내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종합적으로 보면 좋은 아내라고 볼 수 있다. 동창생들과 견주면 많이 늦기는 했지만 2년 전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있으니 이제 그놈의 지긋지긋한 집 걱정에서도 해방되었다. 벌어놓은 재산은 없지만 학교에서 나오는 봉급의 범위 내에서 지출하고 약간은 저축도 하는 살림이니 경제적으로도 별문제는 없다.
김 교수의 가정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작년에 우연하지 않게 만나게 된 아가씨이다. 어찌하다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나?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이것도 다 인연일 텐데. 열반경에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다에 눈먼 거북이가 있는데 1만 년에 한 번씩 물 위에 떠오른다. 물 위에는 구멍이 뚫린 통나무가 있어서 떠오르는 거북이의 머리가 구멍에 들어가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건 확률적으로 보면 매우 작은 가능성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윤회의 과정에서 그만큼 어렵게 이루어진다는 설명이다. 그처럼 어려운 만남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결말을 보게 될지? 올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올해는 소띠라는데 토정비결이나 한번 볼까? ‘여자 때문에 재난이 닥친다’라는 점괘가 나온다면 미리 선수 쳐서 미스 최와 헤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