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같은 시기 여성 김삿갓이 있었고 그녀가 여행기를 남겼다는 사실은 왜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는지. 14살 때 길을 나선 남장 소녀의 이름은 김금원(金錦園, 1817~?). 조선 후기를 살았던 두 사람은 꼭 열 살 터울이다. 김삿갓은 스무 살 때 집을 나왔다고 하니 1827년 무렵이다. 금원이 집을 나선 것은 1831년이라 하니, 김삿갓 보다 4년 늦게 집을 나선 셈이다. 이 두 남녀의 여정이 교차했을 수도 있을지, 혹 어딘가에서 같은 주막에 묵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일 두 사람이 같은 주막의 마루 위에서나 어떤 마을의 정자에서 서로 시를 겨루었다면 어떤 작품들이 나왔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금원의 여로를 한 번 짚어 본다. 그녀의 여행은 14살 소녀 때부터 시작하여 시간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시간 간격을 무시하고 여정을 모두 이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천-단양-영춘-청풍-(아래 내금강) 단발령-장안사-표훈사-만폭동-수미탑-중향성-불지암-묘길상-지장암-사자암-(아래 외금강) 유점사-구룡소-은선대-십이폭포-(아래 관동팔경) 통천 총석정-해금강-고성 삼일포-간성 청간정=강릉 경포대-울진 망양정-평해 월송정-삼척 죽서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한 명의 궁녀와 김옥균이 비밀리에 밀통하기 시작한 것은 1874년 김옥균의 나이 23살 때였다. 궁녀의 나이는 훨씬 많았으니 31살. 그 때부터 궁녀는 김옥균에게 구중심처 궁중의 동정을 전해 준다. 김옥균은 자신의 일기(1884년 12월 1일 자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궁녀 모씨는 나이는 42살이고, 신체가 건대하며 남자 이상의 힘을 가져 보통 남자 5, 6인을 당할 수 있다. 평상시에 고대수(顧大嫂)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곤전(중전)의 근시(近侍, 웃어른을 가까이 모심)로 뽑혀 있는 분인데, 벌써 10년 전부터 우리 당에 밀사(密事)를 통고해 주는 사람이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대수로 통하는 이 궁녀가 기골이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민비의 측근에서 시중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오랫동안 김옥균을 위해 간첩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기에서 김옥균이 ‘우리 당’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개화당’ 또는 ‘독립당’을 말한다. ‘당(黨)’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말하는 정당과는 거리가 멀고 일종의 비밀 동아리 같은 것이었을 터다. 오늘날의 언어 감각으로는 ‘파(派)’라 하는 것이 보다 맞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전번에 소개한 일본인 스나가(須永)는 김옥균의 진정한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은 절해 고도 오가사와라 섬에서 인편으로 스나가에게 붓글씨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곁들였다. 「小笠原島夏日、為試病腕、寄贈知我者」(오가사와라 섬에서 여름날, 병든 팔을 시험해보기 위해 ‘나를 아는 이’에게 보낸다.) 김옥균은 스나가를 ‘나를 아는 이’이라는 뜻의 ‘知我者’(아지자)라 불렀다. 이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시경(詩経)》에 나오는 것인데 시경에는 이 단어에 이어서 「謂我心憂」(위아심우: 내 마음을 걱정하다)가 나온다. 스나가의 일기에는 오가사와라 고도에서 보낸 김옥균의 고통이 담겨 있다. 김옥균을 방문하고 돌아온 유혁로가 전해준 김옥균의 실황이다. “위장병과 류마티즘은 아직 낫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배앓이까지 앓고 있답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개미와 독충, 뱀의 습격을 받습니다. 극히 쇠약하여 안색이 초쵀하고 몸은 말랐습니다… ” 스나가는 1888년 10월 13일 치 일기에 츠지 카쿠자부로(辻覚三郎)의 사망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누구길래? 바로 김옥균이 혁명에 실패한 뒤 제물포에서 일본배 치토세 마루호(千歳丸)를 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