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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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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포크, 그는 누구인가?

근대의 여명기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이바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0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말 근대의 여명기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여러 가지 이바지를 하고 자기를 희생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였다. 그의 주선으로 1886년 조선에 온 헐버트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헐버트의 말을 들어보자. “조선의 개방과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인이 된 조지 포크의 조선살이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856년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포크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나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너무 혈기방장하여 사관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4년 뒤 그는 선두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모든 분야를 기민하게 통달했으며 나이를 앞지르는 조숙성을 보였다. 그는 졸업한 뒤 곧 극동지역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명민함은 전문적인 학식과 기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상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제독의 눈에 들어 부관이 되었다. 일상적인 근무와 별도로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어를 습득했다. 그는 타고난 언어학자였다.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아가씨를 사귀게

미의회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인 첫 서양방문기

민영익, 희귀한 여행에 유교서적만 읽어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9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 번에 이야기했듯이 미 해군 소위 조지 포크가 1883년 12월, 3명의 조선인과 함께 북대서양의 아조레스(Azores) 섬을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는 이 희귀한 여행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특명전권 대신 민영익(보빙사 대표)은 처음으로 서양 여행을 하면서도 유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조지 포크는 탄식을 삼켰다. 반면에 서광범과 변수는 열정적으로 서양에 대한 지식.정보를 수집하고 메모하였다고 조지 포크는 전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전해오지 않는다. 서광범과 변수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으로 몰리면서 자료가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조선인들의 첫 서양 방문에 대해 오직 조지 포크를 통해서 그 조각이나마 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조지 포크의 부모님 전 상서에서 아조레스 방문에 대한 첫 부분을 지난 번에 실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여기 잇는다. “(부모님께) 저야말로 좌중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노부인들이 꼬치꼬치 캐물어 시베리아 탐험이며 일본 여행이며 중국 사원 탐방이며 등등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조선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제가 독차지하다

북대서양 아조레스섬, 1402년 조선의 세계지도에?

조선초 1402년, 조선은 세계지도를 그린 문화강국이었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7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2025년 5월 1일 <지도 포럼 창립 총회>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나는 그 날의 세미나에서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 1402년 조선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에 대해 발표하고 싶다고 자청하였다. 까닭이 있다. 최근에 구한 미의회도서관의 자료에서 북대서양의 아조레스섬(Azores)을 조선인이 1883년 12월 어느날 방문한 기록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조선인이 쓴 것이 아니고 동행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Foulk) 소위가 쓴 것이다. 1883년 12월 1일 조선인 3인과 함께 미군함 트렌턴호(Trenton)에 몸을 싣고 뉴욕항을 출항한 조지 포크가 조선인들과 함께 악천후로 죽을 고생을 한 뒤 지브롤타로 향하고 있던 중에 부모님 전 상서를 썼다(위 편지). 여기에서 그는 며칠 전의 아조레스 방문에 대해 적었다. 그 내용이 매우 여실하여 인문지리학자의 보고서로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 11일(1883.12.11) 우리는 다시 돌풍을 만나 밤새 악전고투했습니다. 자정께 큰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습니다. 12일 날이 밝자 돌풍은 사라지고 날씨가 좀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죽은 김옥균이 산 자를 깨우다

신채호,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이 지구의를 보고 눈을 뜨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6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일찍이 김옥균이 우의정 박규수를 방문했을 때, 박규수는 그의 벽장에서 지구의 하나를 꺼내어 김옥균에게 보였다. 박규수가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날 가운데 나라(중국)가 어디에 있는가?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이 된다. 자 오늘날 이디에 따로 중국이 있는가.’ 김옥균은 당시 개화를 주장하고 신서적도 얻어 보았지만,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사상, 곧 대지의 가운데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며,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은 사의(四夷, 네 방면의 오랑캐)이며, 사의(四夷)는 중국을 숭상한다고 하는 사상에 얽매여서, 국가 독립을 부르짖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박규수의 말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무릎을 치며 앉아 있었다. 후일 그는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신채호, 《지동설의 효력》에서) 서울의 북촌에서도 재동(齋洞)에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의 집이 있었다. 오늘날 헌법재판소의 뜰 안에 600년 된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는데 그곳이 박규수의 집터라고 한다. 그의 사랑방에는 인근의 명민한 양반자제들이 드나들며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곳이 개화의 산

16세기 어떤 프랑스인의 목소리가 서울 거리에

너희는 손과 발을 독재자에게 자진해서 빌려주었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5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530년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신동으로 태어난 라 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는 판사, 외교관, 시인, 학자로서 32년의 짧은 생애를 불사르고 떠났다. 그가 남기고 간 목소리가 21세기 서울의 거리에서 왕왕 크게 울린다. 내란 우두머리의 노예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어이없는 한국인들을 향해 그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아, 너희는 참으로 어리석다. 너희가 당하는 모든 불행, 너희가 입는 모든 손해는 많은 적으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니다. 모든 재난은 오히려 단 한 명의 적으로부터 비롯된다. 독재자가 바로 너희의 적이다! 너희는 아는가? 그가 이렇게 막강해진 것은 오직 너희가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임을. 너희가 단 한 명의 독재자에게 거대한 권력을 부여하고 허용하였으므로 그는 너희를 전쟁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독재자는, 거대한 도시의 여느 곳에 사는 보잘것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뚱이 하나, 두 개의 손과 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너희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너희는 눈과 귀 그리고 손과 발을 독재자에게 자진해서 빌려주고 이로써 그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엿들으며, 무고한

거리에 검푸른 희망이 고동치고 있다

만민공동회에서 보부상에 쓰러진 구두 수선공 김덕구의 노제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4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2025년 4월 1일 저녁 인사동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온다. 인사동 들머리에 성난 군중의 고함소리가 진동한다. 다가가 본다. 여느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험악하다. 촛불시위대와 태극기부대가 대치하고 있지 않는가? 아마 초조해진 태극기 부대가 상대편을 도발한 것 같다. 금세라도 충돌이 일어날 것만 같다. 요망스러운 일이지만 태극기 부대는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고 있다. 이들 넋이 나가고 얼빠진, 광기의 수구세력이 겨레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나라를 망쳐먹은 역사는 길고도 질기다. 그들은 왜구와 한패거나 제주도에서 수만 명을 학살한 서북청년단과 정신적 동성동본일 것이다. 이들의 본색을 우리는 127년 전 1898년 서울 거리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1898년 겨울 썩어빠진 정부 관리들, 몰아치는 외세의 위협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나라를 구하고자 만민이 연일 거리 시위를 하고 있다. 장작불을 지피며 풍찬노숙을 한다. 시위의 열기가 타올라 마침내 세상이 바뀔 조짐이 보인다. 그러자 오늘날의 태극기 부대 같은 것이 검은 구름처럼 몰려든다. 정부의 사주와 자금을 받은 전국의 보부상 수천 명이 서울로 집결한 것이다. 불길한 기운이

만민공동회, 백성이 나라 주인임을 자각하는 첫 체험

그러나, 1898년 3월 함성 위로 폭설이 내린 뜻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3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아마 오늘도 대한민국의 거리는 함성으로 뒤덮일 것 같다. 이는 1898년 3월께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 해 3월 10일 서울 종로에는 약 1만 명의 남녀노소들이 모였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그 당시 1만 명은 오늘날의 몇 명에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인파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외침의 뜻이 같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라의 주인이다.” 그 함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직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판사ㆍ검사라는 이름의 법비(法匪)들인 것 같다. 그들은 죄 없는 생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기도 하고 내란 수괴를 탈옥시키기도 하고 수염에 난 불을 끄듯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깔아뭉개기도 한다. 이 자들의 폐악이 극에 달해도 그들을 징치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국민이 주인일 뻔한 일들이 일어나긴 한다. 그 원초적 체험을 우리는 언제 했을까? 1896년 2월 11일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였다. 아관파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