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나더러 누가 우리 역사상 혁명가를 단 한 명만 꼽으라 한다면 김옥균(1851-1894)을 꼽고 싶다. 김옥균처럼 혁명가의 모든 요소를 한 몸에 지닌 이는 드물지 않을까 한다. 알면 알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사상가였고 선(禪) 수행가였으며 불꽃 같은 혁명가였다. 무엇보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한 초인이었다. 게다가 글씨, 노래, 화술, 바둑 등 사람을 홀리는 재주와 매력이 탁월하였다. 그 때문에 많은 일본 여성이 그를 흠모하였고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런 기록들이 나라 안팎에 흩어져 있다. 여태 두서없이 김옥균에 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해왔다. 앞으로도 두서없는 이야기를 이어가 보련다. 요즈음 창비 출판사에서 ‘한국사상선’을 펴내고 있는데 그 17번째(2024)가 《김옥균/ 유길준/ 주시경》이다. 여기 소개된 김옥균을 참고하여 짚어본다. 김옥균이 망명 중에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 일부다. 이제 조선을 위하여 도모하건대 청국은 본래 믿지 못할 것이요 일본도 또한 그러하여 이 두 나라는 각기 자기 집 유지에 여력이 없는 모양이온데, 어느 겨를에 타국을 도우리까…. 우리나라는 오직 밖으로는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제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밤늦게 돌아왔다. 오늘 새벽 머리맡에 흩어져 있는 몇 권의 책 가운데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펼쳐보았다. 단재와 가깝게 지냈던 안재홍의 서문을 다시 읽어 본다. 폐부를 울린다. 여기 일부를 옮긴다. 약간 쉬운말로 바꾸어 옮긴다. 단재 신채호는 구한말이 낳은 천재적 사학자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다. 그 천성의 준열함과 식견의 예리함은 세속의 무리가 따를 수 없었던고, 사상의 고매함은 홀로 속세를 한 걸음 벗어났다. 그의 《조선상고사》는 그가 남긴 책 가운데서 가장 이채로운 것이다. 그는 이미 약관의 나이에 사상혁명과 신도덕 수립에 뜻을 세운 바 있었다. 마침, 5천 년 조국의 명맥이 날로 기울어가고 백성들의 울분은 걷잡을 수 없었던 때였다. 서울의 평론계에 나선 단재는 억누를 수 없는 북받쳐 오르는 청열(淸熱)을 항상 한 자루 붓으로 사회에 드러냈고, 이로써 민족의 심장을 쳐서 움직였다. 그가 주필로 있었던 ‘황성일보’와 ‘대한매일신보’는 아마 그의 청년시대에 마음의 집으로 삼고 살았던, 꺼지지 않는 꿈의 자취라고 할 것이다. 그는 국정의 득실(得失)을 통렬히 논파하였고, 당시 인물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4살 남장 소녀 금원의 금강산 여행기를 보면 문득 문득 그 묘사력과 관찰, 그리고 인문적 소양에 놀라게 된다. 1830년 곧 지금으로부터 195년 전 그녀가 기록한 금강선의 봄날 정경이다. 길을 돌아 수미탑으로 갔다. 수미봉 아래에 있는 탑은 마치 흰 비단과 검은 비단을 하나하나 쌓아서 허공중에 높이 꽂아놓은 것 같다. 앞에는 고르고 판판한 바위 위로 폭포수가 흐르고 얼음과 눈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양사(正陽寺, 내금강 표훈사 북쪽에 있는 절)에 도착해 혈성루에 오른다. 이는 절의 문루(門樓)인데 내산의 진면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고 가로막는 게 없으니, 만이천봉이 뚜렷이 눈 아래 펼쳐져 있다. 어떤 것은 흰 눈을 쌓아놓은 것 같고, 어떤 것은 부처가 앉아 있는 것 같고, 어떤 것은 머리를 올려 꾸민 것 같고, 어떤 것은 칼로 뚫어 놓은 것 같고, 어떤 것은 연꽃 송이 같고, 어떤 것은 파초잎 같은데, 하나는 손을 맞잡고 또 하나는 절을 하고, 하나는 옆으로 또 하나는 위로, 일어서기도 하고 웅크리기고 있기도 하고 그 천만 가지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남쪽은 장경봉, 관음봉 아래 지장봉, 석가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