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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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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 산맥의 자작나무와 한국의 새 대통령

한국인의 맨 앞에 소년공 출신이 깃발을 들고 서 있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3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로키산맥 정상 부근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엎드려 산다고 한다. 가까스로 싹이 트고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지악스러운 찬서리와 거친 비바람을 맞받으며 이겨내려면, 무릎 꿇고 엎드린 모습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자작나무를 베어내 바이올린을 제작한다. 세상의 어떤 나무보다 공명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김주영의 <아라리 난장>에서) 싹이 트고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찬 서리와 거친 비바람을 맞받으며 꿋꿋이 살았던 한 소년공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기적이 어제 새벽에 일어났다. 나는 그날만큼은 해돋이를 보아야겠다고 며칠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그날 서울의 해는 5시 12분에 뜬다고 했다. 자칫 놓칠세라 새벽 2시 무렵부터 침대에서 뒤척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퍼뜩 깨어나 시간을 보는 일을 반복한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황홀한 해가 솟았다 사라졌다 한다. 몰록 시상(?)이 떠오른다. 해가 뜬다. 날마다 뜨는 해가 일천 년 만에 뜬다. 새해 봄에는 야산에서 따온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마신다. 늦게 발

K-민주주의의 원천은 박규수의 사랑방?

물을 마실 때는 그 원천을 생각하라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2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민기 1년(서기 2025년) 4월 4일 내란 우두머리가 헌재에서 파면되는 순간, 기쁨의 환호성이 천지를 뒤엎는 듯하였다. 산천초목도 춤을 추고 귀신도 눈물 흘렸다. 하늘을 떠돌고 있을 박규수(1807-1877)와 그 문하생들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법하다. 살아생전에 그들은 현재의 헌재 뜰에 자리한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고 갈망하지 않았던가. 박규수를 만나보자. 대동강에 양각도라는 섬이 있었고 그 섬의 서쪽 맞은편 강가에 돌로 쌓은 성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방수성(防水城). 그 성 앞으로 제너럴셔먼호라는 무장한 상선이 이동하여 정박한 것은 1866년 7월 20일이었다. 그들은 마구 총을 쏘아대고 지나가는 상선을 약탈한다. 단아한 평안 감사 박규수의 수염이 바르르 떨린다. 소매를 떨치고 대동강 변으로 나가 작전을 지휘한다. 셔먼호는 주둥이가 큰 대완구 대포와 조총을 쏘아댄다. 조선측에서는 재래식 화승총과 활로 응사한다. 가망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박규수는 적을 섬멸한다. 밤늦게 조정에 보낸 승전보다. “상대의 배는 우뚝하기가 견고한 성과 같은 강적인데, 우리 진영은 군비와 방위 태세가 실로 한심한 지경이었

‘K-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 '민기(民紀)'를 쓰자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선 사람의 동상관람과 민주 부활절 즐기기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1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어둠을 불평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 -펄 벅(Pearl S. Buck, 1892∼ 1973)- 지금은 자신의 조국이 사라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지만, 언젠가 민족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비록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한국인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 포식자의 느닷없는 기습공격을 찌르레기떼가 현란하고 아름다운 군무(群舞)로 물리치는 모습은 경이롭다. 우리는 그 숨 막히는 광경을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대한민국의 거리와 광장에서 펼쳐지는 빛의 무혈 혁명이다. 73살을 넘긴 나도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광장에 나가곤 한다. 이 순간도 포식자들은 발톱을 숨긴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조류학자들은 찌르레기떼가 포식자의 공격을 받으면 절묘한 공중 곡예(aerial acrobatics)를 연출함으로써 적을 혼란에 빠뜨려 안전을 도모한다고 한다. 흉맹한 포식자가 쪼그마한 찌르레기를 표적 삼아 거듭 기습공격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찌

조지 포크, 그는 누구인가?

근대의 여명기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이바지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30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 말 근대의 여명기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여러 가지 이바지를 하고 자기를 희생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였다. 그의 주선으로 1886년 조선에 온 헐버트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헐버트의 말을 들어보자. “조선의 개방과 관련된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인이 된 조지 포크의 조선살이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856년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포크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나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너무 혈기방장하여 사관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4년 뒤 그는 선두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모든 분야를 기민하게 통달했으며 나이를 앞지르는 조숙성을 보였다. 그는 졸업한 뒤 곧 극동지역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명민함은 전문적인 학식과 기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곧 상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제독의 눈에 들어 부관이 되었다. 일상적인 근무와 별도로 그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어를 습득했다. 그는 타고난 언어학자였다.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아가씨를 사귀게

미의회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인 첫 서양방문기

민영익, 희귀한 여행에 유교서적만 읽어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9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지난 번에 이야기했듯이 미 해군 소위 조지 포크가 1883년 12월, 3명의 조선인과 함께 북대서양의 아조레스(Azores) 섬을 방문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는 이 희귀한 여행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특명전권 대신 민영익(보빙사 대표)은 처음으로 서양 여행을 하면서도 유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조지 포크는 탄식을 삼켰다. 반면에 서광범과 변수는 열정적으로 서양에 대한 지식.정보를 수집하고 메모하였다고 조지 포크는 전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전해오지 않는다. 서광범과 변수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으로 몰리면서 자료가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조선인들의 첫 서양 방문에 대해 오직 조지 포크를 통해서 그 조각이나마 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조지 포크의 부모님 전 상서에서 아조레스 방문에 대한 첫 부분을 지난 번에 실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여기 잇는다. “(부모님께) 저야말로 좌중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노부인들이 꼬치꼬치 캐물어 시베리아 탐험이며 일본 여행이며 중국 사원 탐방이며 등등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조선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제가 독차지하다

북대서양 아조레스섬, 1402년 조선의 세계지도에?

조선초 1402년, 조선은 세계지도를 그린 문화강국이었다 [돌아온 개화기 사람들] 27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2025년 5월 1일 <지도 포럼 창립 총회>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나는 그 날의 세미나에서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 1402년 조선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에 대해 발표하고 싶다고 자청하였다. 까닭이 있다. 최근에 구한 미의회도서관의 자료에서 북대서양의 아조레스섬(Azores)을 조선인이 1883년 12월 어느날 방문한 기록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조선인이 쓴 것이 아니고 동행한 미국인 조지 포크(George Foulk) 소위가 쓴 것이다. 1883년 12월 1일 조선인 3인과 함께 미군함 트렌턴호(Trenton)에 몸을 싣고 뉴욕항을 출항한 조지 포크가 조선인들과 함께 악천후로 죽을 고생을 한 뒤 지브롤타로 향하고 있던 중에 부모님 전 상서를 썼다(위 편지). 여기에서 그는 며칠 전의 아조레스 방문에 대해 적었다. 그 내용이 매우 여실하여 인문지리학자의 보고서로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 11일(1883.12.11) 우리는 다시 돌풍을 만나 밤새 악전고투했습니다. 자정께 큰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습니다. 12일 날이 밝자 돌풍은 사라지고 날씨가 좀 좋아졌습니다.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