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앞서 인용한 일본인의 김옥균론에 보이는 오류를 지적해야겠다. 김옥균이 ‘18~19세 무렵 대원군에게 알려져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진급을 거듭하여 25~26살 때에는 호조판서에 나아갔다.”라는 것은 물론 오류다. “1880년(명치 13년) 불교 연구를 구실삼아 처음으로 일본에 왔다.”도 오류이다. 이는 아마 1879년 일본에 밀입국한 이동인 스님을 착각한 것일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쿠자와 유기치를 맨 처음 찾아낸 조선인은 이동인이다. 시기는 1880년이었다. 후쿠자와 유기치에 대해 김옥균 등 개화파 동지들에게 맨 처음 알려준 사람도 이동인 스님이었다. 이동인은 1881년 봄 한양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그와 후쿠자와 유기치의 교류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김옥균과 유기치의 교류는 긴밀하고 깊어졌다. 후쿠자와 유기치와 김옥균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김옥균을 경솔한 친일파로 보는 시각의 근저에는 ‘김옥균이 생각 없이 후쿠자와 유기치에게 조종, 이용당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만을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일본의 국익을 위해 조선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김옥균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북한의 시각과 평가도 다양하다.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서양인의 평가들도 다수 전해 온다. 오늘은 북한의 평가와 일본의 기록 하나를 보겠다. 먼저 김일성은 1958년 3월 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워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력사가들에게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다 부르죠아 혁명운동이 있었는데 왜 우리나라의 력사에만 그것이 없는가고. 중국에는 강유위나 량계초와 같은 부르죠아 혁명가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있다고 하면 김옥균을 들 수 있는데 …친일파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김옥균이 친일파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 다 아는 바와 같이 일본은 동양에서 제일 먼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김옥균은 자본주의 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개명시키려 했는데, 훗날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니 결국 그가 친일파로 규정된 셈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여간 토론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한편 일본 흑룡회에서 1933년 펴낸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에서는 아래와 같이 김옥균을 선각자로 소개한다. “자(字)는 백온(伯溫), 고균(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나더러 누가 우리 역사상 혁명가를 단 한 명만 꼽으라 한다면 김옥균(1851-1894)을 꼽고 싶다. 김옥균처럼 혁명가의 모든 요소를 한 몸에 지닌 이는 드물지 않을까 한다. 알면 알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사상가였고 선(禪) 수행가였으며 불꽃 같은 혁명가였다. 무엇보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한 초인이었다. 게다가 글씨, 노래, 화술, 바둑 등 사람을 홀리는 재주와 매력이 탁월하였다. 그 때문에 많은 일본 여성이 그를 흠모하였고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런 기록들이 나라 안팎에 흩어져 있다. 여태 두서없이 김옥균에 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해왔다. 앞으로도 두서없는 이야기를 이어가 보련다. 요즈음 창비 출판사에서 ‘한국사상선’을 펴내고 있는데 그 17번째(2024)가 《김옥균/ 유길준/ 주시경》이다. 여기 소개된 김옥균을 참고하여 짚어본다. 김옥균이 망명 중에 임금에게 보낸 상소문 일부다. 이제 조선을 위하여 도모하건대 청국은 본래 믿지 못할 것이요 일본도 또한 그러하여 이 두 나라는 각기 자기 집 유지에 여력이 없는 모양이온데, 어느 겨를에 타국을 도우리까…. 우리나라는 오직 밖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