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바탕에 자양화(紫陽花)를 수놓은 일본 옷을 입은 세쓰코는 여학생의 정복을 입고 있을 때는 느껴 보지 못한 성숙한 여성을 느끼게 했다.” 소설가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오는 꽃 이름 자양화는 무슨 꽃일까? 감이 안 잡히겠지만 수국(水菊)이라 하면 얼른 알아차릴 사람이 많다. 베이지색깔에 꽃송이가 탐스러워 보이는 이 꽃은 부처 머리같이 생겨서인지 불두화(佛頭花)란 이름도 갖고 있다.
이 꽃을 일본에서는 “아지사이(あじさい)”라고 부른다. 이 말의 원뜻은 남색이 모인 것이라는 뜻의 “아즈사이(集眞藍)가 와전되어 아지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지사이가 한자로 자양화(紫陽花)라고 불리는 것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라일락 비슷한 꽃에 붙인 이름을 헤이안시대 학자 원순(源順)이 아지사이에 갖다 붙인 것으로 중국의 자양화와 일본의 아지사이는 다르다. 한국에도 중국산 자양화로 추정되는 꽃이 영의정을 지낸 만정당(晩靜堂) 서종태(1652-1719) 시문 등에 보인다.
아지사이는 장마 무렵에 피는데 한국보다 장마가 한 달이나 빠른 일본에는 지금 아지사이 천국이다. 꽃 색깔도 연보랏빛부터 붉은빛까지 실로 다양한데다가 시내에도 가로수(화)로 흔히 볼 수 있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꽃임을 알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우리나라에는 아지사이(수국)꽃이 눈에 잘 안 띈다. 절집 마당이나 부잣집 넓은 정원에 한그루 정도 있을지는 모르나 가로수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아니다.
도쿄에서 생활할 때 칙칙한 장마철 울적한 마음이 들면 가마쿠라(鎌倉)에 활짝 핀 아지사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중세시절의 절들이 즐비한 가마쿠라에는 절 정원 가득 아지사이며 꽃창포를 심어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게만든다. 지방에 있는 절에도 어김없이 아지사이는 사랑받고 있는데 며칠 전에는 우지시(宇治市) 미무로도지(三室戶寺)의 유명한 아지사이정원을 다녀온 지인이 화사한 꽃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한국에서는 많이 볼 수 없는 꽃이지만 배고픈 유학시절 향수병을 달래주던 아지사이가 사진 속에서 반갑게 손을 흔든다.
미무로도지(三室戶寺)라 하니 백제스님 행표(行表)가 생각난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고승 사이쵸(最澄, 767-822)의 은사스님인 행표(722-797)스님은 한반도인 집성촌인 야마토(大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백제계 출신 히노쿠마 씨로 ‘나라문화재연구소(奈良文化財究所)’에 따르면 아스카(飛鳥) 일대의 많은 절은 한반도인들의 손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입증하듯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천수관음도량으로 유명한 미무로도지(三室戶寺)는 백제여인으로 일본 황후가 된 고야신립의 남편 광인천황(제49대)꿈에 천수관음이 오색광채를 띄고 나타나 행표스님에게 발원하여 절을 짓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절이다.
일본열도는 지금 다양한 색깔의 아지사이(수국)꽃 축제로 술렁인다. 아지사이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러 나온 사람들은 천여 년 전 백제출신 황후 고야신립과 광인천황이 발원하고 행표스님이 지은 이 절의 유래를 알고 있을까? 푸른 꽃만이 그 역사를 아는 듯 우중충한 장마철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일본한자는 구자체로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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