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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임진란서 일제까지 400년을 면면히 이어온 ‘항일독립 가문’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17)] 안동 ‘검제마을’ 학봉 김성일 종택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김용환 선생, 노름판 파락호 위장 종가 전답 팔아 만주독립군 자금 보내
“할일 했을 뿐 아무 말 말라”, 외동딸도 몰라

 

   
▲ 현 15대 종손 김종길 선생

“(앞줄임)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뒷줄임)”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 선생의 외동딸은 파락호로 알고 평생을 원망했던 아버지가 건국훈장을 추서 받던 날,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위와 같은 편지글을 남겼다. 시집간 날 외동딸이 그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김용환 선생은 안동에서 악명 높은 파락호였다. 당시 학봉 집안은 사방 십리 땅을 전부 소유했을 만큼 엄청난 부자였는데, 종손이 노름에 빠져 그 많은 가산을 모조리 탕진한 것이다.  

김용환은 안동 일대 노름판을 주름잡았는데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모두 걸고 막판 내기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면 노름판 주변에 숨어있던 하인들을 시켜 판돈을 덮치는 수법까지 쓰곤 했다.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다 결국 종택까지 남의 손에 넘겼다. 종가 재산으로 내려온 전답 18만 평(요즘 돈 350억 원 가량)을 팔아버린 것은 물론 사당의 신주까지 손대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린 것도 여러 차례.  

급기야 외동딸이 시댁에서 받은 장롱 살돈까지 가로채 노름으로 날렸다. 이에 딸은 집에서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며 시댁에 갔는데 시댁 어른들은 “나쁜 귀신이 붙어 왔다”며 그 장롱을 불태웠다. 비정한 아비는 외동딸이 죄지은 것도 없이 주눅 들어 살 수밖에 없도록 했다. 심지어 마을에서는 “학봉 집안사람들과는 사귀지도 말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다. 임종 무렵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오랜 벗이 “이제는 말할 때도 됐다.”고 권했다. 하지만 그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는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후 여러 증언과 사료를 통해 그가 학봉 종가의 모든 재산을 노름빚으로 탕진한 것이 아니라 만주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알려졌다. 그는 파락호로 위장하며 철저히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감추었던 진정 나라사랑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것은 어렸을 때 봤던 할아버지의 굴욕 때문이다. 할아버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은 의병대장인 사촌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들켜 왜경에 의해 종가 마당에 꿇어앉는 치욕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이를 본 김용환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 이미 항일운동에 몸 바칠 것을 각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을 쉽게 만주로 보낼 수 없었기에 그는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평생을 노름과 주색잡기로 꾸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말없이 감수했다. 그리고 1995년, 죽은 뒤 반백년이 흘러서야 우리는 선생의 가슴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달아줄 수 있었다.

 

   
▲ 서산 김흥락 선생 훈장증(왼쪽), 김용환 선생 훈장증

 

학봉선생, 왜놈과 맞서 싸움터 누비기를 목숨이 다하고야 그만 두었네
“바다에선 이순신, 육지에선 김성일” 진주대첩 이끈 전략가이자 큰 선비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이른바 “검제마을”에 김용환 선생의 학봉종가가 있다. 그런데 이 학봉종가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류인 퇴계학의 큰 줄기를 근세에까지 이어온 정신문화의 중심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이라는 나라의 큰 위기 속에 400해를 가열 차게 이어온 구국활동의 산실이었다. 

그 처음엔 학봉 김성일이란 거목이 우뚝하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시작되던 1592년 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란 중임을 맡고 진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목사는 도망가고 진주성은 텅 빈 채였다.  

선생은 진주 판관 김시민을 진주목사에 임명해 성을 지키도록 하고 “진양(晋陽, 진주지방의 다른 이름)은 호남을 지키는 곳이므로,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있을 수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있을 수 없다.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며 진주 사수를 선언했다. 선생은 왕명을 받드는 초유사로서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여 민중이 얻어낸 진주대첩 승리를 이끈 뛰어난 전략가며 의병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선생은 임금에게 보낸 장계에서 김시민, 이광악, 최덕량, 이눌, 이찬종 같은 이들을 일일이 밝혀 전공을 칭찬했지만 자신의 공은 전혀 드러내지 않은 위대한 덕장이었다.《선조실록 26년-1593 1월 22일》그뿐만 아니라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성일”이라는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선조수정실록》 26년(1593) 4월 1일 기록에는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의 졸기”를 보면 “당시 혹심한 병란에 백성은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크게 돌았다. 이에 성일이 손수 밤낮으로 보살피다가 전염병이 옮아 죽었다. 군사와 백성이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 학봉 선생이 죽지 않았다면 진주성이 함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 학봉이 왜국에 통신사로 갔을 때 쓴 시를 모은 해사록

   
▲ 학봉 선생이 진주성에서 부인 권씨에게 써보낸 언문편지

   
▲ 학봉 선생이 진주성 사수의지를 담아 쓴 촉석루중삼장사시 편액.

우리는 학생 때 왜국에 통신부사로 갔던 김성일이 “왜국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잘못 보고한 바람에 조선이 임진란의 치욕을 겪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 학봉 선생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임진왜란의 희생양을 찾은 선조의 탓과 함께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왜곡한 식민사학자들이 학봉 선생에게 올무를 씌운 탓이라고 한다.

 

당시 학봉 선생은 왜국이 쳐들어올 가능성은 이미 알려졌는데도 통신사를 뒤를 따라 바로 쳐들어올 것처럼 정사가 수선을 떨어 백성이 크게 혼란스러워 한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진정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학봉 선생이 아닐까? 정말 학봉 선생의 보고 탓에 전란에 대한 대비가 안 된 것이라면《조선왕조실록》이 그를 칭찬하는 기록을 남겼을 리도 없지 않은가?

 

심지어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제문을 내려 선생의 공적을 다음과 같은 치하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하늘이 뽑은 호걸, 산이 내린 신령스러운 사람. 덕을 갖추고 문장까지 뛰어난 우뚝한 정신. 왕명을 받들어 사신을 가니 섬 오랑캐 혼이 빠지고 국방의 중책을 맡아 왜적 토벌하니 참 선비라 맞설 적이 없었네. 몸을 달려 싸움터 누비기를 목숨을 다해서야 그만 두었네.”

 

후손 김흥락 안동 항일운동 중심인물로 가문서 42명 독립유공자 배출
 

   
▲ 종가 사람 24명이 독립유공자가 되어 항일명가가 되었다는 기사

경상북도 안동. 여기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의병이 일어난 곳이다. 임진왜란에 이어 안동 땅은 왜를 몰아내는 그 중심에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학봉 선생의 11대 주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학봉 선생에 이어 300년 만에 퇴계학의 적통을 잇는 큰 학자가 되었고, 그에 따라 학봉종가는 “연원회귀가(淵源回歸家)”라 불리기에 안동에서 서산 선생이 왜를 몰아내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퇴계학의 제자들도 모두 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후 선생의 제자 70여 명이 독립유공훈장을 받았음은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다. 또 선생의 후손도 16명이나 독립유공자가 되었고, 방계 후손에서도 26명이나 나와 한 집안에서 무려 42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산 선생의 좌우로 이어진 혼맥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 선생, 내앞마을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독립운동 하러 간 김대락 선생, 한일강제병합 직후 24일 동안 단식한 뒤 순국한 이만도 선생, 만주의 호랑이 김동삼 선생이 모두 얽혀 있으니 안동의 독립운동에는 서산 선생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이곳 독립운동가들은 뒤에 변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수백 년 내려온 퇴계학의 깊은 학문적 바탕이 독립운동으로 꽃을 피웠다는 말이 분명할 터이다.  

선생의 문인록에 오른 제자만 해도 705명이었음을 물론 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만 4천여 명이 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선생이 당시 얼마큼 존경을 받은 어른이었는지 여실히 증명되고도 남는다.

   
▲ 학봉종택 사랑채에 걸린 미수 허목이 쓴 문충고가 편액

   
▲ 종택 정자에 걸린 학봉 손자 김시추 선생이 쓴 풍뢰헌 편액

 

퇴계학 이어 온 한국 정신문화의 본향 … 후손들도 ‘따뜻한 마음’ 주변에 나눠줘 

파락호 김용환 선생은 노름판에서는 악착같았지만 새우젓 장사처럼 어려운 백성에겐 값을 두 배로 쳐주면서 모두 내려놓고 가라고 했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 정신은 이후 후대에도 이어졌다. 종손이 어렸을 적 김용환 선생이 가산을 거덜 내 어려웠음에도 보릿고개 때 쫄쫄 굶던 아이들이 감자를 캐는 밭에서 빙빙 맴돌면 어머니는 보이는 것만 캐도록 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그 아이들이 캐가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또 마을 집 가운데 며칠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좁쌀이나 보리쌀을 전해주었다고 하니 독립운동에 이은 가난 구제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 김용환 선생은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류인식 선생이 협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했을 때도 적극 협력했다고 한다.  

“나눔의 철학이 있는 종가”를 취재하는 도중에 만난 어떤 종가는 ‘적선’을 크게 실천했다고 알려졌지만 귀찮은 듯 기자의 취재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봉종가 종손은 “종가의 재산이 개인 사유재산이 아닌 것처럼 종손도 개인이 아니라 이미 공인이기에 대담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종손 김종길 선생은 안동 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을 맡아 현대인들의 정신수련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학봉과 서산의 큰 정신이 후손에게 면면히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 지금 시대에도 학봉종가 큰 어른들의 위대한 정신을 이을만한 큰 선비가 있을까?

 

   
▲ 학봉종택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