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흉년 들자 자신의 녹봉과 사창미 풀어 규제 경술국치 땐 단식 일경들이 미음 먹이려하자 날 총으로 쏴서 죽여라 호통 24일 만에 숨져 愛民과 절개 조선 선비의 기개 몸소 보여줘 ▲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어 1976년 현재의 안동시 안막동으로 옮겨온 향산고택 얘 얘 이 책도 담아라. 단식원을 가려고 짐을 꾸리는 나에게 엄마는 《향산 이만도》라는 책을 찔러 넣어 주셨다. 나는 올해 스물여섯 살로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나 고질적인 아토피로 이 약 저 약을 쓰다 급기야 엄마 손에 이끌려 화순군에 있는 한 단식원에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 아마도 엄마는 내가 밥을 먹지 못할 때 이분을 떠올리라고 책을 넣어 주신 것 같다. 새삼 엄마의 마음 씀에 눈가가 촉촉이 적셔옴을 느낀다. 단식은 죽음에 이르는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자결보다 고통스럽고 강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이번 단식을 통해 깨달았다. 향산 이만도 애국지사의 강인한 저항정신이 절절이 몸에 와 닿았다. 이 글은 기자가 1만여 명의 독자들에게 누리편지로 보내는 한국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에 어떤 독자가 보내온 글이다. 아토피를 고치기
[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돈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으며 고초를 겪던 중 순국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우뚝 선 임병찬 선생 동상 명성황후 시해 후 원수 갚으려 가산정리‧노복 해방 돈헌 선생은 집안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1888년 전라도에 큰 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구휼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이듬해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로도 구휼을 잘한 공로로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백성에 대한 관아 벼슬아치들의 행패를 막았음은 물론 한 대의 매일지라도 억울하게 맞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감독했다. 그뿐만 아니라 체납된 세금 6만 7000량과 쌀 1800여 섬을 추징하여 문란했던 세정을 바로잡는 개가도 올렸다. 그러나 39세 때인 1890년 교육의
[그린경제/얼레빗 = 김영조 기자]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마을 인량리는 앞에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만괴헌”이라는 평산신씨 인량문중 종택이 있다. 이 종가는 고려초의 대표적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의 후손들이 충효 사상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만괴헌(晩槐軒)이란 이름은 1798년에 태어나 1855년 세상을 뜬 신재수(申在洙) 선생의 호다. ▲ 만괴헌 전경 두해의 흉년, 가난한 이들 구제에 4천 냥을 쓰다 1836(병신)과 1837(정유)년 두 해에 거듭된 흉년으로 온 나라가 기근에 허덕일 때 만괴헌 선생은 병신년 겨울부터 이듬해 정유년 봄까지 4번에 걸쳐 곳간을 활짝 열고 굶주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 영해지방은 흉년에 대비한 식량 비축도 없었고, 경상감영이나 나라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괴헌 선생이 고을 사람들이게 나눠준 구휼미는 당시 가치로도 무려 4천 냥에 이르렀다. 이에 굶어죽는 것을 모면한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알리기 위해에 앞 다투어 부사와 관찰사에게 등장(等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하는 문서)과 의송(議訟, 조선시대 백성이 관찰사에게 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