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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장대장타령>,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다

[국악속풀이 150]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명예교수]  지금 속풀이는 백영춘이 자료를 찾고 복원하여 공연해 온 <장대장타령>에 관한 재담극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백영춘이 복원한 장대장타령은 구한말 경서도 민요의 1인자 인 박춘재 작품인데, 박춘재는 경ㆍ서도 소리의 명창일 뿐만 아니라, 발탈, 재담소리, 만담 등에도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이야기, 이 시기의 잡가집에는 그를 가리켜 조선 제일류가객 박춘재군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는 당시 일본 축음기회사에서 만들어낸 레코드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제작했다는 이야기, 장대장 내용 중 “너와 초록이 된다”는 말은 곧 남(藍)이 된다는 의미이고“ 누루 황(黃), 샘 천(泉), 돌아갈 귀(歸)하겠소!. 라는 말은 “그게 꼭 죽는다는 말!”을 의미한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현재의 세련된 개그나 코미디에 비하면 별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대를 약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일제의 치하에서 별다른 구경거리 없이 웃음을 잃고 살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이러한 능청스런 재담이나 연기는 충분히 위안거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1945년 해방을 맞고,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6.25, 그리고 페허를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던 50년대, 그래서 문화와 예술의 관심을 갖지 못한 상황이 이어졌고 수용의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맞이해야 했던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모든 장르의 전통예술은 수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속에는 전래하는 재담극 역시 그 사정이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히 궁중음악과 같은 전통음악은【국립국악원】이라는 국가의 음악기관을 설립하여 보존이 가능했고, 또한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한 부설 학교를 설립하여 체계적으로 국악인들을 양성해 왔기 때문에 올바른 전승이 이루어졌지만, 기타 민간들의 음악이나 연희물 등은 국가의 지원 없이 힘겹게 명맥을 유지해 올 수 밖에 없었다.
 

   
▲ 백영춘 명창 공연장면들

한 때는 인기 절정에 있던 재담이나 재담극이었다고 해도 박춘재의 뒤를 이어  이를 시연하는 사람도 없고, 무대도 없고, 무대가 없어졌으니 관객의 발걸음을 모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다른 대중 오락물들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새로운 무대로 자리를 옮겨 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재담극과 같은 분야는 설 자리를 잃고 단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해방을 전후한 시기 서울의 재담극은 그 전승의 맥이 끊겨졌다.

이러한 근세사의 역경 속에서 50여년 이상 잠자고 있던 재담극을 되찾고 부흥시켜 무대에 올리기까지는 백영춘 명창의 공로가 크다고 하겠다. 그는 대중들의 재담극이 단절되었음에도 누구하나 이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재담의 부흥을 위해 문헌이나 음반관계의 자료, 또는 생존해 있는 원로들의 구슬자료를 확보하여 박춘재의 재담을 되찾는 작업을 지속해 온 것이다. 그리고 고증을 받고 무대공연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백영춘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일찍이 벽파 이창배 문하에서 경서도의 긴소리와 민요, 산타령 등을 익힌 정통파 사범이다. 벽파 선생이 심사를 담당했던 KBS 민속 잔치에 출연한 것이 동기가 되어 벽파 선생의 눈에 들었고, 처음에는 민요를 배우다가 차차로 진전 향상되어 시조와 가사, 경기 12잡가를 다 습득하였다고 한다.

68년도에 선소리 산타령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고, 전수장학생을 지정할 당시 백영춘은 여성 5명과 함께 선정된 유일한 남자로서 <산타령>을 하게 되면 장구잡이로 선창하여 잘 이끌어 나갔다고 하며 가요를 익혀 독보력도 대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독보력이 있어서일까?  12잡가 전곡도 남보다 단기간에 배웠으며, 스승에게 한문을 익혀 노래 사설에 대한 식견도 상당 수준이어서 그 후로는 선생의 조교로서 선생을 보필한 굴지의 유망주였다고 벽파 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백영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전승의 맥이 끊긴 박춘재의 <장대장타령>과 <장님타령>과 같은 재담극들을 복원하여 무대공연물로 정착시켜 놓았다. 이러한 복원 작업은 국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특히 소리와 아니리, 그리고 연기와 동작이 종합적으로 연출되는 분야가 취약한 경기권 음악계에 매우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민중의 삶 속에 녹아내린 전통적인 해학물이 서울의 토박이 소리와 함께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나 무대에 오르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격변기를 보내면서 알게 모르게 잃어버린 귀한 유산들 가운데 중요한 한 장르를 되찾는 결과이기에 더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돈이나 명예가 되는 길도 아닌데, 오르지 사라져 가는 재담을 지키고 가꾸어 후대에 전수하려는 그의 전통예능에 대한 열정은 높이 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나 할까?
얼마 전, 서울특별시는 <장대장타령>을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그 예능보유자로 백영춘을 인정한 것이다. 늦었지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익살과 해학의 소리극이 당당히 제도권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널리 알려져 경기소리극의 활력소가 되기 바라마지 않는다.

이제는 눈도 어둡고 몸도 성치 않지만, 소리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그야말로 숙명적인 소리꾼 백영춘 명창이 이 어렵고도 열악한 상황에서 최영숙, 노학순 등을 비롯한 재담소리 보존회원들과 함께 또다시 재담극을 무대에 올리는 용기는 실로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