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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자야의 <내 사랑 백석> 1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0]

   
▲ 《내 사랑 백석》, 김영한, 문학동네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병호사]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온 《내 사랑 백석》을 읽었습니다. 부제(副題)는 ‘백석 시인과 자야 여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자야 여사가 백석 시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백석 시인(1912~1996)은 80년대 말에 해금될 때까지는 월북시인이라고 하여 우리에게는 잊혔던 시인이나, 소월을 계승하고 오히려 소월을 능가할 수 있는 민속적 감성의 풍부함으로 인하여 지금은 꽤 알려진 시인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월북시인이란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백석은 해방 전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온 것뿐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재북(在北)시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 시인을 오랜 세월 남한에서는 묻어두었으니,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사상의 질곡 속에 살았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재북시인뿐만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시인들 중에도 월북이 아니라 강제로 납북된 시인들이 많은데, 그 동안 우리는 이를 싸잡아 월북시인이라고 하여 경원시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인이 정지용 시인이라 하겠습니다. 

백석 시인까지는 어느 정도 아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자야여사(1916~1999)라고 하면 ‘또 누구지?’ 하며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자야 여사는 백석 시인이 붙여준 별명이고, 본명은 ‘영한’입니다. 본명을 말씀드려도 남자 이름 같은 게,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네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법정 스님의 ‘무소유’ 설법에 감명을 받아 일급요정 대원각을 통째로 기부하여 대원각을 길상사(吉祥寺)라는 향기로운 절로 탈바꿈시킨 요정 주인, 그리하여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은 요정 주인. 이렇게 말하면, ‘아! 그 길상화가 자야 여사야?’라고 하실 분은 많을 것 같네요. ^^ 

백석 시인이 해방 후 남한에 내려오지 못했으니까,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이야기이네요. 그런데 이 책은 1995년에 초판이 나왔으니까, 자야 여사는 50년간 백석 시인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책을 보면 50년 동안의 세월도 그들의 사랑을 결코 시간의 흐름 속에 날려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석 시인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조선일보사, 영생여고 등에 근무하였고,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지식인이었으며, 자야(앞으론 그냥 자야라고 하겠습니다)는 기생이었습니다. 벌써 이들의 신분 차이에서 책의 부제에서 밝히는 것처럼 애절한 사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겠지요? 자야가 기생이기에 백석의 부모는 아들의 사랑을 결사반대하면서 아들을 고향 정주로 불러 강제로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은 치루지만 며칠 안 되어 고향을 뛰쳐나와 자야를 찾아오곤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여 백석은 3번 결혼하고 3번 도망쳐 나옵니다. 백석도 그 부모님도 참 어지간하네요. 

백석이 이러는 동안 자야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자야는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자기가 백석 앞날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백석이 고향에 간 동안 이사를 하여 숨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자야를 향하는 백석의 뜨거운 열정은 얼마 안 있어 자야를 찾아내고야맙니다. 그러면 몸은 숨지만 마음은 항상 백석에게 향해 있던 자야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뜨겁게 백석을 끌어안습니다. 두 번째로 숨은 자야를 백석이 찾아내던 순간을 자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 자야(길상화 보살)의 젊었을 때 사진

“자야! 자야!”
그 순간이었다. 삼수갑산이 바로 내일이라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잔뜩 도사리던 나는 일시에 간 곳이 없었다. 나는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다만 내 혼이 맨발로 뛰쳐나간 것인가. 어느 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 당신께 안기고 말았다. 

백석이 3번째로 도망쳐 나온 이후 백석은 심한 번뇌 속에 자야더러 만주로 가자고 합니다.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하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자야는 아직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는 조선의 여인이었습니다. 자야는 백석의 앞날을 위해 끝내 백석을 따라가지 않았는데, 이것은 결국 그들의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자야가 기생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웃음 팔고 몸을 파는 기생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야도 그런 기생의 사회로 들어간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자야는 기생이 되지 않았다면 백석 이상의 신여성 지식인이자 문학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런 제 생각이 억측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야가 어렸을 때 조선에는 황금 광풍이 불었습니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다른 산업 활동은 억제하면서도 광산만큼은 허가를 쉽게 해주고 오히려 광산업을 조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인들이 예뻐서 그랬겠습니까? 자야는 책에서 이는 일제가 자기들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니까요.  

당시의 황금광(黃金狂) 세태를 풍자한 문학작품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이라 하겠네요. 자야의 친척도 이 광풍에 휩쓸려 자야네 집을 담보로 잡혔다가 쫄딱 망하여, 자야 네도 거리에 나앉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야는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어머님의 승낙도 받지 않고 – 이 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 권번에 들어갑니다. 

당시의 기생은 아직은 조선 기생의 전통이 남아 있었기에 단순히 웃음만 파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기생처럼 음악과 춤, 글을 해야 합니다. 자야는 금하 하규일 선생에게 열심히 기예를 익혀 3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전체 과정을 마치고 수료식에서 아창(亞唱, 혼자 부르는 두 번째 여창가곡)을 부르는 영예도 얻습니다. 그리고 문학에도 정진하면서 글씨를 쓴 자리가 마르면 또 거기에다 덧쓰기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우리의 전통 문학을 익힙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기생은 오늘날로 치면 예술인이라고 해야겠네요. 그러한 예술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었기에 조선의 기생들은 3.1. 만세운동 때 온 나라 여기저기서 만세 운동에 동참한 것입니다.  

한편 자야의 이런 치열한 공부는 자연 소문이 나게 되어, 주위의 관심을 끕니다. 그런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조선어연구회 학자들이 있어 이들은 일부러 자야를 찾아와서 자야가 글씨 쓰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 해관 신윤국 선생이 자야의 향학열을 가상히 여겨 자야를 일본으로 유학 보냅니다. 자야는 먼저 동경 문화학원에 편입하여 늦은 공부를 만회하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여자 의전이나 나라 고등사범에 진학할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입시준비에 몰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을 때인 1937년에 자야를 후원하던 해관 선생을 비롯한 몇 몇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해관은 1941년 11월 무렵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는데, 자야는 자신의 후원자가 그렇게 고초를 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해관 선생을 면회하기 위하여 귀국하면서 더 이상 공부의 길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참 아쉬운 대목이네요. 자야가 계속 학업을 이어갔다면 우리 문화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리고 자야가 그런 정도로 소양과 인품이 있었고, 모든 일에 성심성의로 열심히 하였기에 대원각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고, 또 그렇게 번 것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자야이기에 <삼천리> 잡지를 운영하던 파인 김동환은 자야에게 삼천리 잡지에 수필을 기고하도록 강권을 하였었지요. 그리고 자야는 해방 후에 아쉽게 놓아버린 학업의 끈을 다시 이어 1953년에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90년에는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참! 《나의 사랑 백석》인데 자야가 어떻게 백석을 만나게 되었는지 말씀을 안 드렸군요. 일본에서 귀국한 자야는 곧바로 홍원으로 해관을 면회하러 갑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을 보존하겠다는 한글학자의 면회를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자야는 어떻게 하든 선생을 만나려고 함흥 권번에 들어갑니다. 기생이 되면 유력 인사들이 술자리를 찾아올 테이고, 그러면 이들에게 부탁하여 해관 선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해관은 1급 공안사범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결국 면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일제가 억울한 사람을 잔인하게 고문하였기에 면회를 시켜줄 수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함흥 권번으로 들어간 것이 백석을 만나는 길이 되었습니다. 당시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그만 두고 1936. 4. 영생 여고의 영어 선생으로 와 있었습니다. 자야가 함흥 권번에 소속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처음 나가던 날, 백석은 이임하는 어느 교사의 송별회 자리로 함흥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기들이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을 느낍니다. 자야는 이렇게 말하네요. “어쩌다 우리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 그렇게도 어이없이 사로잡히고 말았는지.” 

그러나 이들의 꿈결 같은 사랑은 백석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자야가 숨으면 백석이 찾고 숨으면 다시 찾고 하다가 3년 만에 끝납니다. 자야는 만주 신경으로 가는 백석을 육신은 따라가지 않았지만 마음은 당연히 백석과 함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찾아온 해방과 남북분단은 이제는 백석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이별이 되었지만 백석을 향한 자야의 그리움은 사라질 줄 모릅니다. 자야는 백석이 그렇게 같이 가자고 함에도 따라가지 않은 죄스러움에 백석의 생일날이면 하루 온종일 곡기를 끊고 오직 경건한 마음으로 깊은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 자야(길상화 보살)가 아름다운 회향을 꿈꾸며 무주상보시를 하여 새로 태어난 <길상사>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석이 만주에 있을 때 쓴 시인데, 자야는 이 시를 보자마자 금방 자기들 시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하 생략) 

자야는 시를 읽고 말합니다.
“어찌타 당신은 그처럼 처량한 지경에까지 이르셨던가? 나는 너무도 비통하고 절절한 이 시를 읽다가 그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너무도 가슴 깊이 사무쳐서 혼자 흐느끼고 말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엉엉 울면서 자리에 대굴대굴 뒹굴어버리고 말았다.”
 

3년의 짧은 사랑 끝에 찾아온 영원한 이별. 60년의 헤어짐의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도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은 전혀 식지 않았습니다. 새삼 자야라는 여성을 다시 봅니다. 그 절절한 사랑의 끈을 죽을 때까지도 놓지 않던 그 지고지순한 사랑에 입을 벌려 탄성을 발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길상사라는 아름다운 빛과 향기를 내놓음에 저절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의 독백을 내놓으며 《내 사랑 백석》을 덮습니다. 

이제 당신은 영원히 잠이 드셨다. 온 세상이 온 누리가 몇 번씩이나 천지개벽을 한다 해도 다시는 못 올 불귀의 객. 내 사랑하던 그 임이 못 오실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여전히 나는 당신의 팔베개에 누워서, 당신을 생각하는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이 밤도 가슴 조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