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2 (일)

  • 흐림동두천 23.5℃
  • 흐림강릉 30.0℃
  • 서울 24.7℃
  • 대전 24.5℃
  • 대구 28.9℃
  • 흐림울산 27.3℃
  • 광주 26.0℃
  • 부산 23.5℃
  • 흐림고창 25.6℃
  • 흐림제주 29.7℃
  • 흐림강화 22.9℃
  • 흐림보은 24.4℃
  • 흐림금산 25.4℃
  • 흐림강진군 26.3℃
  • 흐림경주시 28.5℃
  • 흐림거제 24.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북한산 순례길에서 만난 참 선비 김창숙 선생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36]

[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북한산 둘레길 1구간부터 4구간까지에는 애국지사들의 묘소가 많습니다. 1구간 소나무 숲길에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2구간 순례길에는 심산 김창숙,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등 애국열사 12분의 묘소가 있고, 또한 동방석, 김유신 등 광복군 18분이 한 묘소에 같이 잠들어 있네요. 

뿐만 아니라 순례길을 가면서는 419 국립민주묘지도 만나볼 수 있군요. 그리고 2구간이 끝나고 3구간이 시작되는 곳에는 이준 열사의 묘가 있습니다. 이 묘소들 중에는 아무래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제일 잘 단장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제일 많이 알려진 이준 열사의 묘가 잘 꾸며져 있습니다. 

   
▲ 참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이분들 중에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1879~1962)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김창숙하면 탤런트 김창숙씨를 먼저 떠올릴 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김창숙을 검색하여도 탤런트 김창숙씨가 먼저 나오데요. 심산 김창숙 선생, 선생은 진짜 선비이셨지요. 단순히 옛것만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학자가 아니라 새것도 받아들이려는 열린 유학자이셨습니다. 

아마 조선이 일본에 먹히지 않고 잘 돌아갔다면 심산은 통상의 유학자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상황은 심산을 그냥 글만 읽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심산은 말합니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따위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논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조선은 가짜 선비들 때문에 망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그렇게 혼이 나고, 전란 후 백성들은 굶어 죽어나가는 데도, 조선의 양반들은 자기들 기득권만 지키는 데 급급하여 주자학의 교리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사문난적으로 처단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는커녕 계급 차별, 남녀 차별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비록 영, 정조 시대에 실학사상이 잠깐 반짝이기는 하였지만 정조가 죽자 노론 일당독재는 더욱 강화되었지요. 이덕일 선생은 일본이 조선인 76명에게 훈장과 돈을 주었는데, 대부분이 노론계였다는군요. 

   
▲ 북한산 둘레길에서 가까운 심산 김창숙 선생 무덤

심산은 을사늑약 후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립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후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듭니다.  

우리들이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장차 조국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조국을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구습의 혁파부터 시작해야 하며, 구습을 혁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계급을 타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우리의 이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심산이 1908년 대한협회 지부를 성주 향사당(鄕射堂)에 세우고 총무를 맡아 활동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심산이 얼마나 열린 마음의 신유학자인지 알 수 있지요? 심산은 31만세운동 때에 유림이 민족대표 33인에도 끼지 못한 것에 자괴감을 느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巴里長書) 작성을 주도하였지요. 저는 오래 전에 남산 장충단 공원에 세워진 파리장서비(巴里長書碑)을 보고 심산 김창숙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저도 처음에는 김창숙 선생이 여자인가 하였네요. 

   
▲ 장충단 공원에 있는 <파리장서> 비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때 북경에서 천고(天鼓)라는 잡지를 발행하였었는데, 이때 신채호 선생과 같이 잡지를 발행한 이가 또 심산입니다. 심산은 상해에서는 나석주를 국내에 잠입시켜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왜놈들은 이런 심산을 예의주시하다가 심산이 상해조계의 영국인 병원에 입원하자 192751일 납치하여 국내로 압송합니다. 당연히 혹독한 고문이 이어지며, 심산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하게 됩니다.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의 심산의 별호인 벽옹(躄翁)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지요. 

해방 뒤 심산은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성균관 대학을 재건하여 총장을 역임합니다. 대쪽 같은 선비 심산은 이승만이 독재정치를 펼치자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심산은 1951년 이승만 하야를 경고하다가 40일간 수감되기도 하고, 1952년에는 테러를 당하였으며 결국 1957년에는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196251084세를 일기로 영원한 유림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시대의 참선비 심산, 눈 질끈 감고 곡학아세의 길을 걸었다면 편안한 삶을 살았을 심산. 그러나 심산은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심산이기에 심산의 묘소를 두르고 있는 돌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네요. 심산의 큰아들도 1927년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둘째 아들도 중국 충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32살의 나이로 병사하였습니다. 오직 바른 길만 걸었기에 말년에 집도 없이 여관이나 친지의 집을 전전하여야 했던 심산(心山). 심산은 제 마음 속의 산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