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양승국 변호사] 한명기 교수가 쓴 《병자호란》을 읽었습니다. 한 교수는 병자호란 발생 전부터 후까지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파헤쳐 1권으로도 부족하여 2권으로 책을 냈네요. 책을 읽으면서 인조정권의 무능함에 혀를 차고, 쓸 데 없는 명분에만 사로잡혀 전쟁을 자초하더니, 전쟁이 발발하자 백성의 안전은 생각함이 없이 자기들만 내빼는 비겁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강화도를 책임진 검찰사 김경징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는 세월호 선장이 승객들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내빼던 생각과 겹쳐 잠시 책을 덮고 분을 삭이기도 하였습니다.
▲ 《병자호란》, 한명기, 푸른역사
그래서 《병자호란》을 읽으면서 얘기하고 싶은 많은 부분이 많지만, 김경징에 대해서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김경징의 멸공봉사>입니다. 한 교수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제목을 이렇게 붙였겠습니까? 청군이 남진하자 인조는 며느리 강빈과 봉림대군 등 왕실의 피붙이들과 조정 대신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인조도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청군의 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는 조선군이 워낙 허약한 것도 있었지만, 청군이 속전속결로 한양을 점령하기 위하여 중간 중간에 있는 조선 산성은 공략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내달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조선의 봉수 체계가 이를 빨리 한양으로 알렸으면 되었을 텐데, 이나마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인조는 강화도로 갈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인조는 이들을 강화도로 들여보내면서 이들을 호위하고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를 물색합니다. 이때 영의정 김류가 자기 아들 김경징을 추천하지요. 인조반정의 원훈인 김류가 추천하니, 인조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김경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익만 챙깁니다.
우선 강화도 들어가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시는 겨울이라 바다에 얼음이 많아 배가 하루에 한 번 밖에 뜰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럴 때 누굴 먼저 배에 태워야 하겠습니까? 왕조국가이니 강빈과 봉림대군을 먼저 태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을 먼저 배에 태우고 자신의 재물을 먼저 배에 싣습니다. 이 바람에 강빈은 추위에 떨면서 “경징아! 경징아! 네가 그럴 수 있느냐!”고 소리칩니다. 김경징이 인조반정 최고 1등 공신의 아들이라 눈에 뵈는 것이 없군요.
강화도에 들어가서는 어떻습니까? 김경징은 청군이 감히 바다 건너오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광성진 부근에 약간의 수군만 배치했을 뿐, 강화 수비는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수비만 소홀히 했다면 그래도 낫겠습니다.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술독에 빠져 삽니다. 보다 못한 신료들이 뭐라고 말을 하여도 듣지도 않습니다.
이제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1637년 1월 21일 통진가수 김적으로부터 청군의 배가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 들어옵니다. 그런데 김경징은 김적이 허위보고 하여 군정을 어지럽힌다고 목을 베려고 합니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목을 베려고 하는데, 갑곶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 같은 보고가 들어옵니다. 그때서야 김경징은 다급해졌습니다.
청군이 갑곶으로 상륙하려고 하니, 뒤늦게 허둥대는 김경진은 주사대장 장신에게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합니다. 이 때 갑곶에는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는데, 뒤늦게 도착한 장신은 청군 함단이 몰려오자 강진흔이 도와달라는 호소도 외면하고 내뺍니다.
조선 수군은 도망가고 이제 청군은 거칠 것 없이 갑곶에 상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군은 처음에는 당연히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심스레 척후병만 내보냈다가, 척후병으로부터 특별한 것 없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상륙합니다.
당시 김경징은 이런 유리한 지세를 포기하고 강화성으로 도망간 뒤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임진왜란 때 문경 새재가 생각납니다. 당시 왜군은 문경 밑까지 거침없이 진격한 후, 문경 새재와 같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형에는 당연히 조선군이 매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지요. 그러나 당시 조선군을 지휘하던 신립 장군은 이런 유리한 지세를 포기하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김경징이 그나마 신립 장군처럼 자기 목숨을 걸고 강화성을 지켰으면 그나마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김경징은 나룻배를 옮겨 타고 도주합니다. 이게 강화를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할 짓입니까? 천총 구일원은 김경징과 장신의 행태에 격분하여 차마 상관을 죽이지는 못하고, 자신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습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그랬을까요. 이런 상관 밑에 있어보았자 앞날이 뻔 하다고 생각하여 몸을 던진 것일까요?
이제 청군은 강화성으로 몰려듭니다. 오랑캐에 무릎을 꿇을 수 없었던 많은 대신들이 자결합니다. 봉상시정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을 볼까요?
장강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내 유해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 강화도 갑곶돈대의 대포
인조 정권이 하는 것이 오죽했으면, 아들 보고 세상에 나오지 말고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라고 하였을까요. 이시직의 아들이 실제 산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동계 정온 선생의 경우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처음에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이나마도 마음대로 죽지 못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백이숙제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지내다 죽었다고 합니다.
강화도에는 대신들과 군인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가족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강화도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육지에서 건너온 백성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을 보호해줄 관료와 군인들이 없어진 이상, 이들은 이제 ‘도마 위의 고기’가 될 뿐입니다. 아녀자들의 경우에는 약탈에 더하여 겁탈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아녀자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하였습니다. 이중에는 스스로 자결한 여인네들도 많았지만,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많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들이 여기저기서 펼쳐집니다. 사서(史書)는 말합니다.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눈 위를 기어 다니거나,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김경징이 자기 목숨을 걸고 강화도를 지켰다면 과연 이랬을까요? 설혹 끝까지 항전은 하지 못하더라도 청군이 강화도를 피의 섬으로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도망간 김경징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쟁이 끝난 후 당연히 김경징을 참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합니다.
그런데 인조는 오히려 강화도가 함락된 것은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가 적었기 때문이며, 수군대장 장신도 조수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어서 그랬다며, 사형은 지나치다고 유배형에 그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에 굴복하여 죽이지만, 그나마도 김경징을 대우하여 참수형은 하지 않고 사약을 내립니다.
위에서 충청수사 강진흔이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인조는 강진흔이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고 참수합니다. 이런 지휘관은 그 부하 장졸들이 알아봅니다. 강진흔을 참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충청도 수영의 군관과 병졸들이 대궐로 몰려들어 목 놓아 울면서 강진흔의 원통함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이미 판단능력을 상실한 인조는 이들의 호소를 차갑게 외면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모습에서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을 알 수 있다던가요? 김경징은 자신의 사형 결정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었음에 비하여, 강진흔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조실록》에서 김경징의 죽음을 기록한 사관은 김경징을 가리켜 ‘미친 어린 아이(狂童)’라고 하며 “아는 것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식을 김류가 잘못 천거하여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쳤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어리석음과 잘못은 그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김경징의 잘못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세월호 선장의 잘못으로 구할 수 있었던 많은 생명이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김경징의 멸공봉사’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지도자는 어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