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양승국 변호사] <난잎으로 칼을 얻다>를 보았습니다. 제가 ‘난잎으로 칼을 얻다’를 보았다고 하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하실 것입니다. 지금 덕수궁 중명전에서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다시 생각하는 전시회 <난잎으로 칼을 얻다>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당 이회영’이라고 하면 지금은 모르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우당 선생과 ‘난잎으로 칼을 얻다’가 무슨 관계인가 갸우뚱 하시는 분들은 많을 것입니다.
▲ 뒤로 중명전이 보이고, 정문에 "난잎으로 칼을 얻다" 전시회 선간판이 걸려있다.
삼한갑족(三韓甲族) 우당 형제들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전 재산을 팔아 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많던 재산도 봄눈 녹듯이 독립운동에 다 사라지고, 우당 선생은 배를 주려가면서 난(蘭)을 칩니다. 우당 선생이 난 그림을 잘 그렸거든요. 그러니까 전시회 제목은 우당이 난 그림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는 뜻이지요. 전시회에 걸려 있는 서해성 작가의 시 ‘난잎으로 칼을 얻다’가 이를 잘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이레에 세 끼 먹는 주린 북경의 밤,
홀로 부는 젓대가락에 얼었던 호야등은 펄럭이는데
붓을 높이 들어 난을 쳤다.
김정희가 여기 청국(淸國) 스승을 기려 완당이었던가.
붓을 세 번 꼬아 제 이파리 끝으로 가는 난잎에 이슬 맺혀
저 끝에 조국 있어라.
그 제자 이하응, 흥선이라 대원군 볼모로 끌려와 난을 쳤던가.
땅을 잃어 뿌리 없는 난초를 그릴지언정 붓을 꺾지 않으리니
5백년 묵은 눈물로 먹을 갈아
조선 마지막 붓끝으로 그려 올린 난을 내다 팔아 칼을 얻었더라.
난잎 한 줄기에서 혁명의 시가 함께 번져 나와
삼천리를 화선지로 삼았음이여.
백년 뒤, 지나는 사람 있어,
그 난잎에 베어 푸른 피가 도는 까닭에 따라 읽노니
난잎으로 칼을 얻다.
시를 음미하다보니 우당 선생이 배고픔을 잊기 위하여 젓대(대금)를 부시는 모습, 밥을 굶어 몸은 파리해졌겠지만 그 곧은 기개로 붓을 들어 난을 치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우당 6형제! 조국이 무너졌어도, 그냥 눈 질끈 감고 외면했으면 편하게 밥 잘 먹고 등 따습게 살 수 있었던 삶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였던 우당 형제들.
전시회에는 우당이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 입고 있던 옷, 우당의 묵란(墨蘭) 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전시물이 빈약합니다. 우당에게는 늘 망원(감시자 끄나풀)이 붙어 있었기에 자료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동지들과 중요한 대화는 필담으로 나누고 대화가 끝나면 곧바로 종이를 불태우곤 하였지요. 전시회에는 우당을 이렇게 표현해놓았네요. “이회영은 그림자였다. 그는 보이되 보이지 않아야 했다.”
▲ 우당 선생의 아내 이은숙 선생의 육필회고록 《서간도 시종기(始終記)》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우당 선생의 아내 이은숙 선생도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한 독립투사입니다. 전시회에는 이은숙 선생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始終記)>의 육필원고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 내용을 한 번 볼까요?
서사헌정(西四軒町)은 유곽(遊廓)들이 많아서 바느질감을 받아들이는 집이 많이 있어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대부분 큰 벌이를 하고 지내는 터라, 하루는 바느질감을 구하려고 종일 유곽 근처를 여러 군데 다니고 있었더니... 그날부터 일감을 얻어 빨래를 해서 잘 만져 옷을 지어 주면 여자 저고리 하나에 30전, 치마는 10전씩 하고, 두루마기 하나에는 양단이나 합비단은 3, 4원 하니, 두루마기나 많이 입으면 입양이 넉넉하겠지만 두루마기가 어찌 그리 있으리요.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 가량 되니, 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삼한갑족의 대부인이 기생들 옷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니... 시집 올 때에 이런 빈궁한 상황은 꿈이라도 꿨겠어요? 그러나 이은숙 선생은 그런 것에 대해 한마디 원망도 안 하고 겨우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 20원도 남편의 독립운동에 바칩니다. 그런 우당과 이은숙 선생의 손자에 제 고교 동기인 이종걸 의원도 있습니다. 전시회에는 이 의원이 2009년 1월 22일 독립투사인 규숙 고모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 <규숙 고모님을 떠나보내며>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규숙 고모님(1910~2009)의 별세는 우리 집안 항일독립운동 1세대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뜻한다... 강보에 잠시 머무를 틈도 없이 차가운 압록강을 넘는 어린 규숙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운명 자체가 망국이요, 망명이요, 일생 자체가 고난에 찬 항일 노정이었다.......
독립운동세력이 러시아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시기에 고모님은 항일독립단의 유명한 무기 운반책이었다. 감시하던 러시아 군인들조차 어린 중국 여자아이 몸 앞뒤에 무기가 즐비하게 붙어 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마적으로 추정되는 무리들에게 이회영 할아버지 거처가 습격을 받았을 때 일이다. 할아버지는 용케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할머님(이은숙)이 어깨에 총상을 입으셨다. 할머니는 피를 흘리면서 집이 불타고 있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다락방에 몰래 모아두었던 할아버지의 편지 뭉치를 찾기 위하여 서슴없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이가 소녀 규숙이었다. ........
고모님의 서사시 같은 일생 100년은 오늘 애국지사묘역의 동지 장해평(남편) 곁에 나란히 묻히셨다. 두 분 동지여, 평안하시라. 임시정부 법통이 부인당하는 등 항일투쟁을 폄훼하고 있는 시대와 공간에 두 분을 묻는 것이 죄스러워 어리석은 조카는 엎드려 울면서 글을 올린다. 규숙 고모님은 한국 근대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여성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장렬한 방법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었다. 여기 희미하게 한 줄을 남겨 그 분의 자취를 기리나니.
▲ 중국이 2000년 1월 12일 발급한 우당 선생에 대한 혁명열사 증명서
전시물 중에 제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이 2000년 1월 12일 발급한 우당 선생에 대한 혁명열사 증명서입니다. 우당은 1932년 11월 초순 65세의 나이에도 안전한 상해에 머무르지 않고 만주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배를 타고 대련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경에 체포되어 지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1월 17일 끝내 순국합니다. 중국도 그런 우당 선생의 혁명의 정열을 인정하고 증명서를 주었군요. 그런데 중국 정부로부터 이런 혁명열사 증명서를 받은 한국인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붕 외에는 우당 선생 밖에 없다네요. 우당 선생 이외에 또 하나의 인물이 양씨 제 선조라니, 저 또한 자랑스럽습니다.
전시회는 3월 11일까지 열립니다. 한 번 시간 내어 중명전을 찾아 조선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우당을 만나보지 않으시렵니까? 더구나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던 곳이고,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장소적 의미도 있습니다. 중명전에 가면 1층은 이러한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해 상설전시를 하고 있고, 2층에서 <난잎으로 칼을 얻다>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을사늑약’ 하니까,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을사늑약이 체결된 을사년(1903)이 얼마나 원통했으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참! 중명전 갈 때에 미리 위치를 잘 확인하고 가십시오. 중명전은 덕수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덕수궁 바깥으로 정동극장 뒤쪽에 있습니다.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시키면서 중명전은 바깥으로 나앉게 되고, 1925년에는 화재로 외벽만 남고 불에 타는 등 수난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덕수궁과 중명전 사이를 미대사관이 차지하고 있어, 중명전이 덕수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당분간 힘들어 보입니다. 하루빨리 중명전도 제 자리를 찾기 바라는 마음도 곁들여서 ‘난잎으로 칼을 얻다’에 대한 제 글을 마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