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 - 이 달 균 난 그저 말없이 천년을 견뎌왔다 남한산성 이성산성이 날 둘러 감쌌으니 오늘은 삼층탑이랑 바둑이나 둘란다 아서라 보채지 마라 벗 하나면 족한 것을 진자리 마른자리도 익히 앉아 보았으니 허명에 목숨 건 이들 진즉 다 죽었다 하네 탑 찾아가는 길은 다소 산만하다. 낚시터와 즐비한 음식점들 때문이지만 이내 어수선한 마음 추스르고 하남 동사터에 닿는다. 절터는 동북으로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이 보이는 분지에 있다. 하남 동사터는 고려 초기 하남을 중심으로 한, 한강 이남 지역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정사각형의 석탑으로, 건립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오층탑은 삼층탑과 이웃해 있으니 그리 외로워 보이진 않는다. 화려한 외형보다는 외려 담담한 격이 있어 보물다운 느낌이 든다. 탑신 구조상 불규칙하게 얹혀 있지만, 그 조화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산그늘 이우는 고즈넉한 오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 탑 사이 먼 능선에 솟아오른 첨탑도 꼭 탑을 닮았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뉴스를 보면 “구정 앞두고 사랑 나눔 봉사활동 실시”, “구정 연휴 아시아 여행자의 선택은?”, “태국 두번째 ‘우한 폐렴’ 환자, 구정 앞 확산 우려”처럼 ‘설날’이 아닌 ‘구정’이란 말을 쓰는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이 ‘구정’이란 말은 양력 신정에 대해 음력으로 쇠는 ‘설날’을 말하는 것이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향토오락》이란 책을 펴낸 이후 우리말ㆍ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창씨개명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았으며, 풍물굿 등 민속놀이도 맘대로 즐기지 못하게 함으로써 겨레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양력설 곧 ‘신정’을 설날로 쇠는 일제는 우리 겨레가 오래전부터 쇠던 설을 ‘구정(舊正)’이란 말을 써서 지내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런데, 광복 뒤에도 정부가 양력을 기준력으로 삼으면서 양력설은 제도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989년까지만 해도 양력 1월 1일부터 3일 동안을 공휴일로 했기에 성탄절과 함께 연말연시를 잔치처럼 지내는 게 굳어질 정도였지요. 그리고 우리 고유의 음력설은 ‘민속의 날’이라 하여 ‘이중과세’라는 허울 좋은 말로 하루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는 설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서 슬기전화(스마트폰) 연하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연하장의 대부분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 한 해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소망하는 일들이 모두 이뤄지기를 비손합니다.’ 등 거의 특성이 없는 엇비슷한 문구들뿐입니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새해 인사를 나눴을까요? “고모님께서 새해는 숙병(宿病)이 다 쾌차(快差)하셨다 하니 기뻐하옵나이다.” 이 글은 숙종임금이 고모인 숙희공주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숙종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쁩니다.”라며 아직 병중이건만 이미 병이 다 나은 것처럼 표현했지요. 그런가 하면 정조 때 사람 한경(漢經)은 하진백(河鎭伯) 집안사람들에게 문안 편지를 보냈는데 하진백이 과거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에 있을 과거에서 급제했다며 미리 축하의 덕담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밖에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 비)가 셋째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보낸 편지, 인선왕후(어머니)가 숙휘공주(딸)에게 보낸 편지, 순원왕후(재종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원장 소강춘, 이하 국어원)은 ‘다크 패턴’과 ‘애니멀 호더’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눈속임 설계’와 ‘동물 수집꾼’을 뽑았다. ‘다크 패턴’은 사용자를 속이기 위해 설계된 접속 환경(인터페이스)을 뜻하는 말로 인터넷이나 슬기전화(스마트폰) 응용프로그램(애플리케이션) 등에서 사용자들이 원치 않는 물건을 구입하거나 서비스를 받도록 은밀히 유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애니멀 호더’는 동물을 모으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나, 기르는 일에는 무관심해 방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체부와 국어원은 지난 1월 9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새말모임*을 통해 ▲ ‘다크패턴’의 대체어로 ‘눈속임 설계’를, ▲ ‘애니멀 호더’의 대체어로 ‘동물 수집꾼’을 뽑았다. * 새말모임: 어려운 외국어 신어가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제공하기 위해 국어 전문가 외에 외국어, 교육, 홍보ㆍ출판, 정보통신, 언론 등, 다양한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로서, 누리소통망(SNS)를 통해 진행됨. 문체부와 국어원은 국민들이 어려운 용어 때문에 정보에서 소외되지 않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설날 아침이면 일찍이 남녀노소가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낸 뒤에 할아버지ㆍ할머니, 아버지ㆍ어머니 등 집안 어른에게 세배한 다음 일가친척과 이웃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렸습니다. 요즘엔 직장인들이 회사 윗사람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조선시대엔 새해 초 대문 안에 세함(歲銜)을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와 각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높은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아문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김매순(金邁淳)이 한양(漢陽)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들이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고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높은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지영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최근 일제 말기인 1944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북규슈 사가현 탄광에 강제동원됐던 소설가 안회남(1909~?)이 징용 경험을 바탕으로 광복 직후 펴냈던 자전적 소설 《탄갱(炭坑)》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이 소설은 안회남이 잡지 《민성(民聲)》을 통해 14회에 걸쳐 연재했던 것으로 1945년 12월 25일 《민성》 창간호는 '탄갱' 첫 회를 연재하면서 작가의 징용 체험에서 비롯한 작품이라고 소개했지요. 또 잡지는 "우리 문단의 중진 안회남씨가 작년 여름에 포악한 일본의 학정으로 규슈(九州) 탄광에 징용당해 갔던 사실은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수많은 동포와 함께 괭이를 들고 탄갱 속에서 굶주림과 헐벗음과 한숨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여기 실리는 '탄갱'이야말로 그가 친히 체험한 생지옥의 적나라한 기록"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소설 《탄갱》에 소개된 강제징용은 일제가 1938년 4월 공포한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에서 비롯되었지요. 특히 일제는 노동력 보충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는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113만 혹은 146만 명에 달하는 것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왕 전하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는 《순종실록부록》 순종 12년(1919년) 1월 21일 기록입니다. 101년 전 오늘 고종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공식적인 발표로는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였지만, 건강하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로 번졌습니다.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으며,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는 데서 고종의 독살설이 일었다고 하지요. 또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입속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30센티미터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는 것도 독살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고종의 장례는 국장이 아닌 대행태왕의 장례로 격하되었으며, 조선의 전통 장례가 아닌 일본 황족의 장례였고 행렬에만 조선 관례대로 하는 왜곡된 장례였습니다. 국장 절차를 기록한 《고종태황제어장주감의궤(高宗太皇帝御葬主監儀軌)》와 국장에서 의장 행렬을 담당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 장항리서오층석탑 - 이 달 균 신라를 갖고 싶다면 역사도 갖고 가라 부장품이 탐난다면 정신마저 앗아가라 동탑(東塔)의 잔해 구를 때 서탑(西塔)은 울지 않았다 탑은 토함산이 굽이치다 한 호흡 가다듬는 능선 끝자락에 서 있다. 절 이름과 연혁에 대해서는 자료나 구전이 없어 마을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터’라 부르고 있다. 탑 구경 다니다 보면 애잔한 심지 돋을 때가 한두 번 아니다. 이 탑도 그중 하나다.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서에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서탑은 그런대로 제 형상을 갖추었기에 국보(제236호)로 지정되었으나 동탑은 원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계곡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1층 몸돌을 가져와 다섯 지붕돌을 겨우 모아 세워두었다. 서탑을 자세히 보면 정교한 장인의 손놀림이 상상된다. 어떤 연유,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이렇게 정교한 숨결을 불어넣었을까. 1층 몸돌 4면(面)에 도깨비(鬼面) 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2짝의 문, 그 좌우에는 연꽃 모양 대좌(臺座) 위에 서있는 인왕상(仁王像)의 정교함은 가히 걸작이라 할 만하다. 이런 서탑의 아름다움을 보면 원 형체를 잃어버린 동탑이 더욱 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마지막 스물넷째로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大寒)입니다. 하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꼭 소한보다 더 춥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크게 힘쓸 일도 없고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 놀고먹기에 삼시 세끼 밥 먹기 죄스러워 점심 한 끼는 반드시 죽을 먹었거나 걸렀지요. 또 죽을 먹는 다른 까닭은 양식이 있는 겨울에 아껴서 돌아오는 보릿고개를 잘 넘기려는 의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대한을 일컬어 겨울을 매듭짓는 절기로 보아, 대한의 마지막 날 곧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여 섣달그믐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날 밤을 해넘이라 하여,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지요. 그 절분의 다음날은 정월절(正月節)인 입춘으로, 이날은 절월력(節月曆)의 새해 첫날이 됩니다. 이즈음에 해 먹는 음식은 호박죽인데 겨울철 호박죽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는 효과가 있어 손발이 찬 사람이 먹으면 매우 좋습니다. 또한, 호박 속 풍부한 비타민A가 감기에 대한 저항력도 높여 준다고 하지요. 또 추위를 이기는 데에는 생강차만 한 마실거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