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유배형(流配刑)의 하나로 보통 왕족이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만 적용하였다. 집 둘레에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것인데, 죄가 무거운 자에게 적용하였다.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으므로 위리안치를 선고받은 사람은 주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냈다.” 이는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6월 1일치에 나오는 탱자나무 관련 기사입니다. 탱자나무는 5월에 하얀 꽃이 피고, 9~10월에 노랗게 열매가 열리는데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부터 성벽주위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던 나무입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팎으로는 쥐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가시가 날카로워 도둑 또한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던 나무지요. 탱자나무는 울타리뿐 아니라 껍질과 열매를 약재로 쓰는 등 예부터 우리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입니다. 탱자나무 가운데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바로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가 그 나무입니다. 문화재청에서는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58호로 승격했습니다.(2019.12.2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에 단군은 자기네 대화족(大和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 소잔명존)의 아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두 인물의 생존연대만 보더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니 최수봉이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이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 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했고, 그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는 최수봉 지사와 함께 밀양공보를 같이 다녔던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선생이 뒷날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 책에서 증언한 말입니다. 지사는 99년 전인 1920년 오늘(12월 27일) 아침 경남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날은 월요일이어서 경찰서장 와다나베가 훈시하고 있었는데 두 번의 투탄에도 폭탄의 불발과 폭발의 위력이 약하여 타박상을 입은 순사부장 외에는 다치거나 죽은 자도 없었습니다. 이후 지사는 실패한 것을 알고 식도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못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해인 1921년 7월 8일 사형당해 순국했습니다. 하지만 최수봉 지사의 의거는 박재혁 의거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 석 달 만에 식민통치의 맨 앞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표준국어대사전》은 ‘겨레’를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국어사전이 ‘겨레’를 한자말 ‘민족’으로 바꾸어놓으니까 사람들이 우리말 ‘겨레’는 버리고 남의 말 ‘민족’만 쓰면서, 남녘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 하고 북녘 조선에서는 ‘조선민족’이라 합니다. 같은 겨레이면서 저마다 다른 반쪽을 도려내 버리고 남은 반쪽인 저만을 끌어안는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남이나 북이나 틈만 있으면 “통일, 통일” 하는 소리를 반세기 넘도록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배달겨레’라는 말이 요즘은 거의 꼬리를 감춘 듯하지만, 일제 침략 시절까지만 해도 자주 쓰던 낱말이다. 그러나 광복 뒤로 남북이 갈라진 다음, 친일 세력이 남쪽 한국을 다스리면서 제 나라만 챙기고[국수주의] 제 겨레만 내세우는 [민족주의] 낱말이라고 몰아붙여서 너도나도 쓰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온 세상 모든 사람과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왔으니 이런 낱말 곧 ‘겨레’도 새삼 쓸모가 생겨난 듯하다. 온 세상 사람들과 손잡고 더불어 살아가자면 먼저 갈라진 제 겨레부터 하나로 싸안는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8년 전인 1971년 오늘(12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던 대연각호텔에서 큰불이 일어났습니다. 화재진압을 위해 거의 모든 소방차가 출동했고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되었는가 하면 주한미군의 소방차와 헬리콥터까지 투입되었지만, 불로 죽은 사람만 163명이었고 다친 사람은 63명이나 되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사건이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 화재로 기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4년 11월 3일에도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불이 나 88명이 숨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때도 한성에 큰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31권, 8년(1426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한성부에 큰불이 나 행랑 1백 6간과 중부 인가 1천 6백 30호와 남부 3백 50호와 동부 1백 90호가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 죽었는데,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당시에는 한성의 집들이 목조건물이거나 초가였고, 심지어 집집이 처마가 붙어 있을 정도여서 그 피해가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세종은 소방서격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선종(善宗)이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했다. 바깥나들이 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를 장식하고, 동남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해 앞에서 인도했으며, 승려 200여 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했다." 이는 《삼국사기》 권 50, 궁예 편에 나오는 기록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후고구려(뒤에 태봉)를 세운 궁예는 늘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했다고 하지요.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시기를 간절히 비는 뜻을 담았습니다. 이 미륵신앙은 시골길을 걷다가 문득 풀숲 사이로 나타나는 미륵상이나 절에 모셔진 미륵보살상으로 나타나는데 근세 우리나라에서 생긴 증산교, 용화교 등도 미륵신앙이지요. 어느 시대건 지배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억압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구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억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당진 안국사터 석탑 - 이 달 균 낮이면 멈추고 밤이면 걸었다 그 뒤로 고려의 별들이 따라 왔다 쉼 없는 삼보일배(三步一拜)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묵언으로 걸어온 기나긴 수행의 날들 언제나 배경이 되어 함께 한 동반자여 어엿한 삼존불(三尊佛)이 있어 예까지 왔으리 아쉽다. 하긴 이런 모습이 안국사터 석탑뿐이랴. 1층 몸돌은 남아 있는데 2층 이상의 몸돌은 사라지고 지붕돌만 포개진 채 기형으로 서 있어 어딘지 엉성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세웠을 때 모습은 제법 어엿했으리라 짐작된다.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은 것이 그렇다.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기에 1963년에 보물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절은 사라졌으나 이 탑을 배경으로 입상의 석조여래삼존불이 있어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보인다. 가운데 본존불은 발 모양을 형상화한 부분을 빼곤 하나의 돌로 이뤄진 대형 석불인데, 머리 위에는 화불이 장식된 보관을 착용하고 있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이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협시ㆍ우협시 보살상이 함께 서 있는데 이 역시 훼손의 흔적이 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실학자며, 과학자였던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어린 시절 묻습니다. "성리학에 나와는 있지만 농사짓는 법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어른은 대답합니다. "그런 것은 잡학으로, 농부들이나 경험하여 아는 것이다." 그러자 홍대용은 다시 묻습니다. "잡학은 버려야 하나요? 잡학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홍대용은 어려서부터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한쪽이 세계 문명의 중심(화-華 )이고, 어느 쪽이 오랑캐(이-夷)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해 자주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도 더 우월할 수가 없다는 주장을 펼쳐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하여야 함은 물론,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해 당시 지식인 가운데서 가장 진보적인 주장을 한 사람입니다. 홍대용은 서양 과학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黃眞伊)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지, 해가 부활하는 날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이며 명절로 지내기도 했던 ‘동지(冬至)’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는데 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른 다음 차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날을 해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잔치를 벌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서 동지를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첨치(冬至添齒)’라 하여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고 생각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불렀다. 동지팥죽, 귀신 쫓고 더불어 살고 이날 가장 흔한 풍속으로는 팥죽을 쑤어 먹는 일이다. 팥죽에는 찹쌀로 새알 모양의 단자(團子) 곧 ‘새알심’을 만들어 죽에 넣어서 끓여 만드는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가면 사적 제317호 “충주 미륵대원(彌勒大院)터”가 있습니다. 해발 378m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미륵대원터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지요. 석굴 가운데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옆과 뒤 석벽의 가운데는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며, 석굴 윗부분은 목조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인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요.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바로 가 곡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입니다. 흥도의 절의를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자손들이 본 영월군에 있기도 하고 괴산(槐山) 땅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절의를 부추기어 장려하는 것으로 뽑아서 쓰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 이는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1699년) 1월 5일치 기사입니다. 여기서 노산군은 단종임금을 가리키며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하여서 거기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지요. 그때 목숨을 걸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엄흥도(嚴興道, 1404-1474)입니다. 그 뒤 엄흥도는 어명을 어기고 단종임금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러준 일로 평생을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중종 때 그의 충절이 조정에서 논의되어 1698년에 공조좌랑, 1743년에 공조참의, 1833년에 공조참판, 마침내 1876년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게 됩니다. 엄흥도의 자손들 곧 영월엄씨 충의공계 광순문 종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