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매주 수요일 야간개장 시간(21:00까지)에 큐레이터의 상세한 전시품 해설과 관람객과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된 참여형 프로그램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운영한다. 2019년 12월 큐레이터와의 대화에서는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2019.12.3.~2020.3.1.)의 전시 설명회가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말 탄 사람 모양 토기’, ‘로만글라스와 용’, ‘봉황이 새겨진 칼’ 등을 비롯하여 나라안팎 가야의 주요 문화재 1,000여 점이 선보인다. 주변 세계와의 교역을 통해 성장한 고대 국가의 면모를 살펴보고, 근래 발굴 성과를 토대로 새롭게 복원한 가야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설전시관에서는 ‘유리 문화재의 보존’(12.4.), ‘함평 초포리 유적으로 본 초기철기시대’(12.11.), ‘벽에 그린 세계’(12.18.) 등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전시품에 대한 설명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들을 수 있다. ※ 박물관 사정에 따라 진행자 및 주제, 장소 변경 가능(세부일정 붙임 파일 참조) 관람객과 박물관의 소통 공간이기도 한 “큐레이터와의 대화”는 별도의 예약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단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고, 고려의 황궁인 송도 수창궁에서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말하자면 송도 곧 개성은 조선왕조의 첫 번째 서울인 것이지요. 그러다 태조 2년인 1393년 3월 15일 마침내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이듬해인 1394년인 태조 3년에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천도했습니다. 그 뒤 정종이 임금에 오르자 형제 사이 골육상쟁에 회의를 느껴 1399년 개성으로 서울을 옮깁니다. 그런데 조선의 세 번째 임금 태종이 등극하면서 조선은 다시금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서울이 되려면 첫째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편리한 곳, 둘째 강과 해상을 통하여 물자를 수송하기가 편리한 곳, 그리고 셋째는 사방으로 거리가 균등하여 교통이 편리한 곳인데 한양은 이 세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요. 하지만 서울을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서울이 되려면 지리적 여건도 중요하지만 명분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양으로 옮겼다가 다시 송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는데 다시 한양으로 옮기려면 중요한 명분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예배(禮拜)한 뒤에, 조상의 혼백을 모신 묘당(廟堂)에 들어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산통도사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 이 달 균 임진 그 전쟁 통에 산과 절은 타버려도 받침돌 각 면에 새긴, 형형한 코끼리 눈 안으로 나이테를 가진 목질의 기단과 기둥 석탑 말하기를 출가인 산승들은 영축산 통도사 수행의 계단 아래 죽비에 문득 깨닫거든 중생제도에 힘쓰시오 영축산에 둘러싸인 통도사 경내엔 부처님의 영험한 기운이 넘쳐난다. 불타께서 법화경을 설법한 인도 영축산(靈鷲山)의 불국토를 이곳으로 옮겨온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햇살 따라 멋대로 굽은 솔향의 송림불토(松林佛土), 고색창연한 부도림,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일주문현판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글씨 등등은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배도 고프고 괜스레 걸음 빨라지지만 곧장 영산전 찾지 말고 마당에 선 오래된 탑 구경도 하고 가자.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말엽)와 고려 초기 역사가 궁금하다면 잠시 이 탑 앞에서 당시를 상상해 보라. 다행스러운 것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전체적인 규모와 양식 등을 볼 때 9세기 후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 보물이라고 하니 예사로이 지나칠 것은 아니다. 하층 받침돌 아래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로 장희빈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그 김만중은 또 다른 고대소설 《구운몽(九雲夢)》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한글본과 한문본이 모두 전하는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모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지요. 《구운몽》은 《옥루몽》, 《옥련몽》 등 후대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구운몽》은 이전에 있었던 다른 소설에 견주어 새로운 형식의 작품으로서 한국 고대소설문학사에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힙니다.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순국하자 어머니 해평 윤씨가 형 김만기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길렀습니다.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 윤신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인 정혜옹주의 남편이었는데 윤신지는 손녀딸과 이야기를 하면 가슴속이 활짝 열린다면서, 그녀가 사내라면 대제학이 되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고 하지요. 김만중은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률(唐律)》을 모두 윤씨에게 배웠습니다. 윤씨는 자식들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가난하여 책을 사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곡식을 주고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무째로 첫눈이 내린다고 하는 “소설(小雪)”입니다. 소설 무렵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부르지만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많이 추워집니다. 한편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또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습니다. 대개 소설 무렵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에는 배를 잘 띄우지 않습니다. 이는 고려시대에 '손돌'이라는 사공이 배를 몰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흔들리자,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든 것이라 하여 배에 타고 있던 임금이 사공의 목을 베었다는 강화(江華) 지역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소설은 겨울이 시작되는 때로 서둘러 문에 문풍지도 바르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땔나무도 해놓습니다. 또 시래기를 엮어 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기도 하며 목화를 따서 이불을 손보기도 하지요. 또 겨우내 소먹이로 쓸 볏짚도 모아두면서 미처 해놓지 못한 겨울준비를 마저 합니다. 이때 감이 많이 나는 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96년 11월부터 1997년 4월까지 SBS 드라마 <임꺽정>이 44부작으로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임꺽정>은 난세를 살다 간 의리의 도적이자 풍운아인 임꺽정의 한 많은 생애를 그린 벽초 홍명희(洪命憙)의 소설 《임꺽정》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많은 시청자들은 임꺽정에 자신을 이입시켜 큰 감동을 받았지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에 우리는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드라마의 바탕이 되었던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 91년 전인 1928년 오늘(11월 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 아닌 위대한 개인으로 보는 영웅사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와 달리 《임꺽정》은 주인공은 물론 다양한 신분의 백성들을 등장시켜, 당시의 민중들의 삶을 폭넓게 묘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임꺽정만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고, 청석골 여러 두령들도 임꺽정 못지않게 큰 비중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아울러 임꺽정은 휘하의 두령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도 있지만 인간적인 약점을 함께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어 남다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함경도 ‘산천굿’에 담긴 신화를 소재로 한 국악과 뮤지컬이 만난 특별한 공연이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주중 밤 8시, 주말 낮 3시)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오른다. 어제(11월 19일) 낮 2시에는 기자들을 위한 프레스리허설을 먼저 선보였다. 이번 작품은 국립국악원이 한국의 신화를 바탕으로 전통 예술을 접목시켜 관객들에게 색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고 국악을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마련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기획한 공연이다. 이번 공연의 소재가 된 함경도 ‘산천굿’은 함흥지방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망묵굿’에서 행하는 굿거리 가운데 하나로, 이때 불리는 무가가 ‘붉은 선비와 영산각시’라는 무속 신화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함경도의 굿과 신화가 공연물로 제작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글공부를 하던 붉은 선비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켜야 하는 네 가지 금기에 대해 듣게 되는데, 산을 내려가는 과정에서 금기를 모두 어기게 된다. 그로인해 용으로 승천하는데 실패한 대망신(大亡神)이 붉은 선비를 잡아먹으려 하자, 붉은 선비의 아내 영산각시가 기지를 발휘하여 대망신을 물리친다. 그 시신을 불태워 재를 팔도에 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사적 제32호 <독립문(獨立門)>이 있습니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습니다. 바로 122년 전 오늘이지요. 45×30㎝ 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높이 14.28m, 넓이 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든 건축물입니다.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지요. 모양만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지 쌓는 방법은 우리나라 전통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무지개문 좌우의 받침기둥, 모서리의 귓돌, 꼭대기의 난간만이 서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하지요. 1979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7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보물 제636호 “도기서수형명기(陶器瑞獸形明器)”가 있습니다. 여기서 서수형 명기란 서수(瑞獸) 곧 기린 따위의 상서로운 짐승 모양을 한 그릇으로 장사 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껴묻거리(부장품)로 묻었습니다. 이 “도기서수형명기(陶器瑞獸形明器)”는 경주 미추왕릉 앞에 있는 무덤들 가운데 C지구 제3호 무덤에서 출토된, 거북 모양의 몸을 하고 있는 높이 15.1㎝, 길이 17.5㎝, 밑지름 5.5㎝의 토기지요. 머리와 꼬리는 용 모양이고, 토기의 받침대 부분은 나팔형인데, 네모꼴로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등뼈에는 2개의 뾰족한 뿔이 달려 있고, 몸체 부분에는 앞뒤에 하나씩, 좌우에 2개씩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지요. 머리는 S자형으로 높이 들고 있고 목덜미에는 등에서와 같은 뿔이 5개나 붙어 있습니다. 눈은 크게 뜨고 아래ㆍ위 입술이 밖으로 말려 있고, 혀를 길게 내밀고 있으며, 꼬리는 물결모양으로 꾸불꾸불하지만 끝을 향해 거의 수평으로 뻗었는데, 여기에도 뿔이 붙어 있지요. 가슴에는 물을 따르는 주둥이가 길게 붙어 있고, 엉덩이에는 밥그릇 모양의 사발이 붙어 있습니다. 그릇 겉은 진한 흑회색을 띠었고, 받침ㆍ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17일)는 ‘순국선열의날’ 80돌을 맞는 날이었다. 근세기,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선열들이 항일투쟁에 목숨을 걸었다. 이 뜻깊은 날을 맞아 KBS 한국방송은 시청자 80여 명이 참가한 'KBS시청자역사기행(아래, 역사기행)'을 마련했다. 이들은 아침 8시 40분에 모여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역사기행에는 86살의 어르신부터 초등학생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띤 시청자들이 함께했다. 역사기행은 건청궁에서부터 시작했다. 건청궁이란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참살(慘殺)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이날 역사기행의 해설은 특별히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이자 의병연구소장 이태룡 박사가 맡아주었는데 그는 독립운동가 2,200명을 발굴하여 서훈을 받게 한 의병연구의 대가이다. 이태룡 박사는 “흔히 ‘명성황후시해’라고 말하는데 ‘시해(弑害)’란 자식이 부모의 생명을 해치거나 백성이 임금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일컫는 말이므로 이 말은 적절치 않다.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죽인 자들이 명성황후의 자식도 아니고 임금(고종황제)의 백성도 아니므로 시해(弑害)보다는 참혹하게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