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이는 산 모습이 점점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는 기러기가 놀라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하지만 근심이 되는 것은 늙은 농부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맞으며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위는 조선 중기 문신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 나오는 상강 기록으로 오늘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입니다. “상강(霜降)”은 말 그대로 물기가 땅 위에서 엉겨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첫 얼음이 얼기도 하지요.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으며,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른데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누렇고 빨갛게 바뀝니다. 옛 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는 뜻이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는 고려 때 놓은 것으로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농다리”가 있습니다. 농다리는 대그릇 농(籠) 자를 써서 큰물을 담을 수 있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위에서 보면 커다란 지네 같다고 하여 지네다리, 장마 땐 물이 다리 위를 넘어간다 하여 수월교(水越橋)라고도 합니다. 이 다리와 관련된 전설로는 고려 고종 때 임행(林行) 장군이 눈보라가 치는 겨울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때마침 젊은 부인이 친정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에 차가운 물을 건너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 효심에 감탄, 용마를 타고 하루아침에 이 다리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다리는 보랏빛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리도록 쌓았으며 돌 사이를 석회로 채우지 않았지만 즈믄 해(천년) 동안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요. 요즘 같은 신건축공법이 아닌 기술임에도 천 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딘 농다리는 건축학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라고 합니다. 이 다리는 28칸의 교각을 물고기 비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백자에서 병(甁)은 기본적으로 술병입니다. 그 술병 가운데 제사를 지내려는 제주병(祭酒甁)은 아무 무늬도 없는 순백자로 빚었지만 잔치용 술병에는 갖가지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술맛이 났던 모양입니다. 술병에 그리는 그림으로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과 십장생, 매화와 난초가 많지요. 그림 대신 목숨 ‘수(壽)’, 복 ‘복(福)’, 술 ‘주(酒)’ 자처럼 글자 한 자만 쓴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기발하게도 병목에 질끈 동여맨 끈을 무늬로 그려 넣은 보물 제1060호 “백자철화끈무늬병”이 있지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병은 높이 31.4㎝, 입지름 7㎝, 밑지름 10.6㎝의 크기인데 옛날 술병을 사용할 때 병목에 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병을 빚은 도공은 술을 마시다 남으면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 가라는 뜻으로 그림을 그려넣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도공의 기막힌 재치와 해학 그리고 익살과 여유가 살아있는 명작입니다. 또 특이한 것은 굽 안 바닥에 적갈색이나 흑갈색을 띄는 철화 물감으로 ‘니ᄂᆞ히’라고 쓴 한글이 있습니다. 그 뜻은 명확치 않으나 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밀양 숭진리 삼층석탑 - 이 달 균 종소리 대신에 벼 자라고 익는 소리 목어소리 대신에 농투성이 노랫소리 고맙다, 전답이 된 절집 거룩한 부처님 세상 한때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역은 꽤나 부산하고 번잡했다. 삼랑진역에 내려 부산에서 오는 서울행 경부선 열차를 갈아타는 곳이기에 규모는 작아도 제법 오일장이 번성했다. 낙동강이 흐르기에 주변의 늪지대에서 나는 민물고기들로 어탕이나 추어탕이 유명했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서 반대로 너무도 조용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내비게이션은 절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안내하는데 인내를 가지고 따라가면 논 가운데 작은 탑이 하나 나온다. 화려하지 않은 작고 소박한 탑은 저 홀로 외로이 고려를 지켜왔다. 탑을 빼고는 전혀 절의 흔적을 찾긴 어려운데, 근처 논밭과 개천에서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기에 가리사(加利寺)의 옛터라고 전해진다. 절터는 세월이 흐르면서 경작지로 변했다. 고려 사람들은 절을 세워 마음부자를 기원하였는데 지금은 벼 익는 소리와 농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니 그때나 지금이나 부처님 세상은 넉넉하고 거룩하기만 하다.(시인 이달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으뜸 충신이라 할 것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허위 선생에 대해 평한 말입니다. 111년 전(1908년) 오늘은 허위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날이지요. 선생은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하여 한국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고 하자 언 나라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했습니다. 선생은 배일통문에서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포천 등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지요. 그리고 원수부 13도의병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의병 2,0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와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 그리고 백성과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을 해왔고 이때 민ㆍ관ㆍ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진주성 싸움에서는 “날틀”이 활약했었다고 합니다. 날틀은 한자말로 ‘비거(飛車)’라고 하여 하늘을 나는 차입니다. 일본 쪽 역사서인 《왜사기》에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날틀은 포위된 진주성과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10만의 왜적 앞에서 진주성 사람들에게 이 ‘날틀’은 희망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장편역사소설 《진주성전쟁기》를 쓴 박상하 작가는 말합니다. 18세기 후반에 쓴 신경준의 문집 《여암전서(旅菴全書)》와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 ‘비거’ 곧 날틀이 등장하지만 정확한 모양이나 어떤 쓰임새였는지는 확실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고흐로 불리는 최북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아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최북은 자신의 이름자 북(北)을 둘로 나누어 스스로 칠칠(七七)이라고 했는데 ‘칠칠치 못한 놈’이라고 자기를 비하한 셈입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붓으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풍류를 즐겼지만, 직업적인 화가였던 그는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살아야 했는데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자신의 눈을 찌르며까지 거부했고, 도화서 화원에 얽매이기도 거부하는 자존심의 예술가였습니다. 여기 선문대박물관이 소장한 최북의 ‘게’ 그림 ‘지두해도(指頭蟹圖)’가 있습니다. 일찍이 게를 그리는 것은 과거시험에 갑(甲)으로 통과하라는 뜻이 있어서 수묵화의 좋은 소재였으며 그래서 단원 김홍도의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 같은 그림도 있지요. 그런데 최북 그림의 게는 통통하고 살이 찐 김홍도의 게와는 달리 남성적이고, 칼칼한 느낌이 드러나 보입니다. 그것은 붓으로 그린 김홍도의 그림에 견주어 최북의 그림은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두화는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손톱, 손바닥, 손등 등을 써서 그리는 것이기에 부드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兒旣生矣當洗(아기생의당세) 아이 태어나면 마땅히 씻어야 할 터 盆中貯來淸水(분중저래청수) 동이에 맑은 물 담아 오거라 水雖冷兮兒莫啼(수수랭혜아막제) 물이 비록 차더라도 아이야 울지 말라 百病消除堅骨理(백병소제견골리) 온갖 병 없애고 뼈와 피부를 튼튼히 하려는 것이란다 北方苦寒又多風(북방고한우다풍) 북쪽 지방 너무 춥고 또 바람이 많아 耐寒耐風從今試(내한내풍종금시) 추위 바람 참는 것 나서부터 경험하게 하네 이는 조선 후기 문신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한시 ‘아기생(兒旣生)’으로 한시집 《북새잡요(北塞雜徭)》 62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북관(北關, 함경도 지방 가운데 마천령 이북 지역) 사람들의 독특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홍양호는 그의 책 《북새기략(北塞記略)》에서, “아이가 배에서 나오자 곧바로 동이물에 넣어서 피를 씻어내는데, 이것을 ‘태열(어린애가 태 안에서 받은 열이 태어나서도 있는 병증)을 없애준다.”’고 기록했는데, 따뜻한 물이 아닌 차가운 물로 아이를 씻어내는 이 방식은 북관 사람들의 고유한 생활방식라고 합니다. 홍양호는 사헌부대사헌ㆍ평안도관찰사ㆍ이조판서를 지냈으며, 홍문관ㆍ예문관 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단법인 토박이말바라기(으뜸빛 강병환)는 오는 10월 20일 국립진주박물관 앞뜰에서 토박이말 어울림 한마당 잔치를 벌인다. 국립진주박물관을 비롯하여 경남교육청, 진주교육지원청, 창원교육지원청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모임과 가게가 힘을 보태서 마련하는 이 잔치는 올해로 네 돌을 맞게 되었다. 첫해에는 진주교육지원청 앞마당, 둘째 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안팎, 셋째 해에는 경남도청에서 마련을 했었는데 올해는 다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잔치를 펼친다. 잔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마루(무대)에서는 아이들이 가진 여러 가지 솜씨를 뽐내게 되는데 노래ㆍ춤ㆍ가락글(시)ㆍ이야기와 함께 아름다운 소리꽃(음악)을 들을 수도 있을 거라고 한다. 마당에서는 열 가지가 넘는 겪배움자리(체험부스)가 마련될 것인데 이 자리는 (사)토박이말바라기와 운힘다짐(업무협약)을 한 모임에서 맡기로 되어 있다. ‘토박이말 00랑 놀자’라는 이름으로 멋글씨, 딱지, 뽑기, 말판, 버림치, 한글, 달력, 책갈피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놀면서 토박이말을 익힐 수 있게 된다고 하니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돈 하나 없이 그저 할 수 있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종이 인형, 엘피(LP) 음악, 추억의 과자와 음료, 문방구… 복고풍을 좋아하고 즐기는 데에 세대가 정해져 있을까?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추억을 되살려 주는 ‘복고풍’과 다르게,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이전에 접하지 못한 과거의 음악이나 물건, 문화 등을 즐기는 ‘신(新)복고’ 열풍이 불고 있다. 옛것을 즐기는 일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국립국어원은 ‘신복고’를 포함하여 지나치게 쓰이고 있는 외국어를 알기 쉽게 다듬어 2019년 제3차 다듬은 말을 발표했다. 지난 2019년 7월 15일부터 2019년 8월 16일까지 ‘뉴트로’, ‘마이크로 미디어’, ‘미스터리 쇼퍼’, ‘에어 커튼’, ‘유니버설 디자인’, ‘커뮤니티 케어’, ‘팩트 체크’, ‘제네릭’, ‘코스터’를 갈음할 우리말을 공모하였다. 국민이 제안한 다듬을 말을 바탕으로 말다듬기위원회에서 의미의 적합성, 조어 방식, 간결성 등을 고려하여 지난 9월 25일 다듬은 말을 뽑았다. 뽑힌 9개의 다듬은 말은 1주 동안 국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최종 결정되었다. 이번에 다듬은 말들은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다. - 청춘의 불안과 위로는 세대를 넘는 음악의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