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앞집의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의 총각은 목매러 간다 앞집의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의 총각은 목매러 간다 사람 죽는건 아깝지 않으나 새끼 서발이 또 난봉나누나 에에헤 허야 허야 더허야 내 사랑아“ 유지숙 명창과 그 제자들이 ‘사설난봉가’를 부르자 장내는 폭소가 터졌다. 그것은 노래를 하기 전 유지숙 명창이 청중들에게 난봉가에 대해 재미난 해설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바로 이어서 서도소리로 기막힌 해학을 표현했기에 나올 수 있는 장면인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설난봉가에 대해 유 명창은 스승 오복녀 명창과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그야말로 익살스러우면서도 풍류가 담긴 가장 흥겨운 소리”라고 정의했다. 어제 9월 19일 저녁 6시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에서는 유지숙 명창의 “서도소리, 북에 두고 온 우리소리” 공연이 있었다. 명원민속관에서는 지역사회와 함께 격조높은 우리문화를 공유하고자 예술감독 김희선 교수(국민대 교양대학)의 주도로 “풍류나누기 명인시리즈”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날 공연은 먼저 서도소리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서도시창(西道詩唱) ‘관산융마’로 시작되었다. 시창(詩唱)은 시를 창으로 부른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옷감으로 만들었던 ‘당’은 오랜 세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당간지주’는 곳곳에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까닭은 그 재료를 주로 돌이나 쇠 또는 금동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경북 경주시 보문동에는 보물 제123호 <경주 보문사터 당간지주>도 있지요. 이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보문(普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이곳이 보문사라는 절이 있던 터임을 알게 해줍니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금당터ㆍ쌍탑터ㆍ건물의 주춧돌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발굴했다고 하지요. 높이 3.8m의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2㎝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 기둥 가운데 북쪽 기둥은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남쪽만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지주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마련한 구멍이 위ㆍ가운데ㆍ아래 3곳에 있는데,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할린, 망향1세’. 동토(凍土)의 바람이 훑고 지났음인지, 어딘지 이국적인 낯빛이다. 탄광에서의 중노동으로 마디가 굵어진 손가락들을 깍지 끼고, 등 뒤에 걸려있는 자물통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는 그에게는 일설로 할 수 없는 무수한 세월이 잠겨 있는 듯 보인다. 사진가 허남영이 찍은 <망향 1세>의 사진이다. 현재 사할린에는 한인 1세와 그 후손들이 4만 명 넘게 살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사할린을 차지하였고, 전쟁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인 6만여 명을 강제징용 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귀환 대상자를 일본군 포로와 일본 국적을 가진 자로 한정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끝내 막혔다. 그리하여 다시 러시아 땅이 된 그곳에서 일평생 망향의 한을 품고 살아간 이들이 바로 사할린의 한인 1세대들이다. 논 앞에 한 노인이 꼿꼿이 서 있다. 우리네 농촌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농투성이 얼굴인데 입성은 어딘지 낯선 ‘연변, 망향1세’.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고향을 떠나, 중국 동북지역 길림성에서 일평생을 산 농부다. 미처 다 여미지 못한 인민복 단추처럼, 그 가슴 내부에도 평생 여미지 못한 ‘망향’의 그리움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수원 화성은 조선시대 수원의 도심 전체를 둘러싼 전체 길이 5.4km 가량의 성곽입니다. 화성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으로 옮겨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치고는 현릉원 능행을 위한 행궁을 지은 것이지요. 물론 화성 성곽 전체 길이는 처음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명했을 때는 길이가 4.2km 정도였지만 1794년에서 1796년까지의 축성 과정에서 1km가 늘어났습니다. 성곽을 쌓을 때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이어 들쭉날쭉 지은 것입니다. 화성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비석 ‘화성기적비’에는 “봄의 버들잎 같은 모양으로 지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팔달산 아래에 버들개천 곧 유천(柳川)이라는 땅이름이 있었는데 정조도 “성벽을 세 번 구부리고 세 번 꺾으면서 이름처럼 ‘내 천’자 모양이 됐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지요. 성곽이 구부정하게 된 것은 정조가 영의정 채제공에게 화성을 쌓을 때 그곳에 살던 백성을 쫓아내지 말라고 명을 했던 데에 있습니다. 기존의 집을 피해서 성곽을 쌓자니 자연 꾸불텅하게 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성성역의궤》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海禁開時國已愚(해금개시국이우) 바다 금지를 풀었을 때 나라 이미 어리석었으니 空聞關稅較錙銖(공문관세교치수) 부질없이 관세를 약간 붙인다고 들었네 漆箱磁盌知安用(칠상자완지안용) 옻 상자와 자기 사발을 어디에 쓸 것인지? 擲盡東南萬斛珠(척진동남만곡주) 동남쪽으로 만곡의 구슬을 다 던지는구나 이 시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로써 항거했던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쓴 <발학포 지당산진(發鶴浦 至糖山津)>이란 한시입니다. 황현은 “문호 개방을 금지했던 바닷길을 개방하여 불평등 조약으로 외세가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라의 정책이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또 “외국상품에 관세를 붙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옻 상자와 자기 사발과 같은 사치품을 어디에 쓸 것인가? 사치품에 대한 댓가로 만곡의 구슬 같은 곡식을 다 던져 주다니.”라고 개탄하지요. 그렇다고 황현이 개화를 반대하여 무조건 “위정척사(衛正斥邪, 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를 반대했던 사상)”를 고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개화를 ‘개물화민(開物化民)’ 곧 물질문명의 발전이며 풍속과 제도의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매천 황현은 1910년 8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복군은 한ㆍ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창립 취지로 한 말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제정하였지만 임시정부가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겨우 1940년이 되어서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광복군 총사령부는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임명되었고, 총사령부 아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해 대원들이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을 모았지요.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ㆍ일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또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익산 미륵사터 석탑 - 이 달 균 미륵은 언제 오시나 이미 다녀가셨나 별이 명멸하듯 예언자는 떠났지만 백제의 푸른 하늘은 내가 받들고 있으리라 나를 중심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왕조를 지우기 전에 먼저 나를 지우고 가라 역사의 시작과 끝은 여기서 비롯되나니 굳건한 존재를 두고 멸망을 논하지 말라 하늘에 고하고 하늘에 묻는다면 이녁이 곧 부처임을 깨달을 날 있으리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인 미륵사터탑이 19년 동안의 해체보수 공사를 마치고 2019년 4월 30일 마침내 위용을 드러냈다. 일반에게 공식적으로 공개된 다음날 새벽, 이곳을 찾았다. 멀리서 여명이 오는 시각, 탑도 긴 꿈에서 깨어난다. 탑 위로 백제의 하늘이 열린다. 왕조는 역사와 함께 흘러갔으나 탑은 아직 백제의 건재함을 웅변한다. 그래서 탑은 “나를 중심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원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고 국제기준에 따라 보수과정을 이행해 석탑의 진정성과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층수는 9층과 6층의 논란 끝에 기존 탑의 자취에 따라 6층으로 준공되었는데, 오랜 역사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홀로 만향헌에 앉아서 서글피 인왕산을 마주했도다 하늘은 넓고 구름 빛도 맑은데 돌아간 기러기는 어느 때에 돌아올까“ 이는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명온공주(明溫公主)에게 보낸 편지로 한시에 음을 나란히 적고 한글 번역과 풀이를 달아 한글로 문자생활을 한 공주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리던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때의 세자였지요. 그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온 ‘세도(勢道)정치’를 누르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지만 22살의 짧은 나이에 병으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왕세자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오는 9월 22일까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을 열고 있지요. 이 특별전에서는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본 3년 동안의 대리청정 기간(1827~1830)에 궁중 잔치와 궁중정재(呈才, 궁중잔치의 악기연주와 노래 그리고 춤), 궁궐 영건(나라가 건물이나 집을 짓는 것), 궁궐도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과 이러한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의 성장 과정과 교육, 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지병목)은 오는 9월 22일까지 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효명세자(1809~1830년)가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본 3년 동안의 대리청정 기간(1827~1830)에 궁중 잔치와 궁중정재(呈才), 궁궐 영건, 궁궐도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과 이러한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의 성장 과정과 교육, 문예적 재능 등을 주제로 조명한다. * 궁중정재(宮中呈才): 궁중 연향에서 공연되는 악기연주ㆍ노래ㆍ춤으로 이루어진 종합예술 * 영건(營建): 국가가 건물이나 집을 짓는 것 특별전은 ▲ 효명세자의 생애, ▲ 조선왕실을 대표하는 시인 효명, ▲ 궁궐도에 나타난 효명세자의 공간, ▲ 궁중잔치의 개최와 궁중정재의 창작 등으로 내용을 구성하였으며, 110여 건의 유물과 다양한 매체와 영상기법, 재현공간 전시로 효명세자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효명세자(孝明世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리던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때의 세자였다. 그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온 ‘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김낙중)은 오는 9월 27일(금) 낮 3시부터 국립한글박물관 강당에서 2019년 제4회 소장자료 연계 강연회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만남>을 연다. 이번 강연회는 소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대장 김창수》, 《허균, 최후의 19일》 등의 저자이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등의 원작자인 김탁환 작가가 《명주기봉》과 고시조집 《청구영언》 등 한글 자료를 소개하고, 고전소설을 활용한 글쓰기 방법을 들려줄 예정이다. 조선후기 고전 소설 《명주기봉》은 현씨 가문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장편 소설이며, 《청구영언》은 1728년(영조 4) 가객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이다. 특히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명주기봉》은 지식인층에서 주로 읽혔던 소설인데 20세기에 들어 민간으로 널리 퍼진 작품이며, 관내 소장본 《청구영언》은 현전하는 170여 종의 가집 가운데 펴낸 시기가 가장 빠른 원고본으로 알려져 있다. 김탁환 작가는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명주기봉》과 《청구영언》에 등장하는 고전 속 숨겨진 인물을 발굴하여 알려주면서, 잊힌 고전을 현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