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부산의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조선왕조 마지막 황후인 순종 비 순정효황후[1894~1966]가 썼다고 전해지는 ‘주칠나전삼층장’이 있습니다. 105.5×48.5×196㎝ 크기의 이 장은 ‘농’이 아니라 ‘장’입니다.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쓰던 가구에는 ‘농(籠)’과 ‘장(欌)’이 있습니다. 여기서 ‘농’은 여러 층일 때 층이 각각 분리되어있는 것을 말하며, ‘농’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도 옆널판지가 길게 1개의 판으로 된 것을 말합니다. 장은 먹감나무ㆍ느티나무ㆍ오동나무 등으로 만들며 자개를 박기도 하지요. 쓰임에 따라 찬장ㆍ의걸이장ㆍ책장ㆍ약장 등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이 장의 이름엔 ‘나전’이란 말이 붙었습니다. 나전(螺鈿)이란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내 그릇이나 가구 겉면에 박아 넣어 장식하는 칠공예 장식기법입니다. 다만, ‘나전’이란 말은 한국ㆍ중국ㆍ일본이 함께 쓰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자개’라고 합니다. 또 조개껍데기 말고도 대모(거북 등딱지를 가공한 것)ㆍ호박(노란빛을 내는 보석)ㆍ상아(코끼리 송곳니)ㆍ보석 등을 새겨 넣는 것도 나전이라고 하지요. 이 ‘주칠나전삼층장’은 순정효황후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온 나라 곳곳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만든 평화의 소녀상 이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000차 수요집회 때 맨 처음 세워졌다. 특히 서울에서는 25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현재 강북구, 도봉구, 서초구 등 15개 자치단체에 소녀상이 세워졌고, 강동, 송파, 영등포가 현재 추진 중에 있다. 그런데 추진 중인 3곳의 추진 현황을 보면 강동구는 3천만 원, 송파구는 4천만 원을 구청이 지원하는 등 민관합동으로 활발한 진행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유독 영등포구는 구의회에서 ‘영등포구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이 보류되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영등포구평화의소녀상 건립시민추진위원회’(상임대표 배기남, 이하 영등포소녀상)에서는 영등포구의회 윤준용 의장 면담을 신청하고 7월 2일 낮 2시 의장실에서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영등포소녀상 배기남 상임대표는 “민관합동으로 소녀상을 세우려고 어렵사리 출발한 ‘영등포구평화의소녀상 건립시민추진위원회’가 현재 조례제정 보류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초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6월 26일 문화재청은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를 보물 제2032호로 지정했습니다. <혼개통헌의>는 해시계와 별시계를 하나의 기구에 통합해 만든 천문관측 도구인데 별의 위치와 시간을 확인하는 원반형의 모체판(母體板)과 별의 관측지점을 알려주는 여러 모양의 침을 가진 T자 모양의 ‘성좌판(星座板)’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밖에 이 기구와 함께 밤 시간에 특정한 별을 관찰하는 ‘규형(窺衡)’, 별의 고도(위치)를 확인하는 ‘정시척(定時尺)’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모체판과 성좌판만 남아 있지요. 모체판과 성좌판에는 북극성ㆍ직녀자리ㆍ견우자리ㆍ처녀자리ㆍ천칭자리ㆍ안드로메다(Andromeda)ㆍ오리온(Orion)ㆍ페가수스(Pegasus) 등 계절별 주요 별자리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혼개통헌의>를 만든 유금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의 작은아버지로 당대 학술ㆍ예술ㆍ과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실학자이자 발명가입니다. <혼개통헌의>는 서양의 관측기기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를 받아들여 만든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천문 도구이자 서양 천문학과 기하학을 이해하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95년 전 독립운동가 신팔균(申八均) 선생이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강계진위대(江界鎭衛隊)에 근무하였는데 그해 8월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당하자 통분하여, 항일구국군을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낙향하였습니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ㆍ이원식(李元植) 등 80여 명의 동지와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활동을 하였지요.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이 강탈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동지 규합에 나섰고, 1918년에는 김동삼 등 38명의 동지와 함께 3·1독립운동의 서막과도 같았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했습니다. 또 1919년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으로 지청천ㆍ김경천ㆍ오광선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앞장섰습니다. 1922년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는데 선생은 1924년 6월 21일 대한통의부 비상회의에서 군사위원장과 의용군 사령장을 겸임하게 되었으며, 이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서 일본군과의 수십차 교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지요. 1924년 7월 2일 독립군의 훈련지인 흥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6월 4일 (재)삼한문화재연구원은 ‘거제-마산3 국도건설 현장’ 발굴조사에서 아라가야 시기의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등 670여기의 무덤과 배ㆍ오리모양 등 상형토기, 갑옷과 투구, 말갖춤 등이 발굴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배모양토기는 387호 나무덧널무덤에서 나왔는데 길이 29.2cm, 높이 18.3cm의 크기로 배면에 조밀한 톱니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최근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배모양토기는 뭍(육지) 인근의 좁은 바다를 다니던 내해용으로 추정되지만, 이번 발견품은 노를 고정하는 고리가 없는 범선(돛단배)으로, 국제항로를 다니던 외항선용으로 봅니다. 이러한 배모양토기는 뛰어난 예술품이자 당시 사람들의 해상 교역을 증명해 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335호 나무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오리몸체에 낙타머리가 결합되어진 토기지요. 원삼국 시대부터 많이 만든 오리모양토기와 달리 오리(조류)와 낙타(동물)가 결합한 형태로는 처음 확인된 토기로서, 우리나라에 없던 낙타 모양이 등장한 것은 당시 국제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고 하지요. 삼한문화재연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98년 전인 1921년 6월 28일 우리의 독립군부대는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러시아 적군에게 총격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난 날입니다. 이전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1921년 3월 일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로 갔지요.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았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혁명 후 내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소련은 이를 받아들여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은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당황한 독립군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요. 그러나 소련군은 강물에 빠진 독립군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고 그 결과, 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에 가면 험상궂게 생긴 거북 한 마리가 등에 비석을 짊어진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노려보는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奉先弘慶寺 碣記碑)”가 있습니다.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세운 절이지요. 고려 때 학자 이규보가 편찬한 《동문선》에서는 이 봉선홍경사가 “200여 칸의 당우에 여러 공덕상을 그리고 봉선 홍경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마치 도솔천과 같이 신비롭고, 종과 탑이 있었다.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어 등이 1,000개나 이어져 켜져 있었다.”고 썼으니 당대로서는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갈비(碣碑)’라는 것은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 몸체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일반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거북 머리가 아닌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지요. 비 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은 6월 25일 《조선왕조실록》 96책을 확인해 국보로 추가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에 추가로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들은 모두 《성종실록(成宗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처럼 임금 이름 뒤에 ‘실록(實錄)’이란 말이 붙어 있지만 유독 광해군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처럼 뒤에 ‘일기(日記)’라는 말이 붙어 있지요. 이는 왕자 때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조선시대 내내 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광해군일기》는 단 두 권만 완성본으로 제작되었고, 특이하게도 중간수정본도 남아 있지요. 따라서 중간 수정단계에서 어떤 부분이 고쳐졌거나 지워졌는지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약상이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황급히 의주로 도망을 갑니다. 이때 왕세자였던 광해군은 분조(分朝) 곧 임시정부를 이끌어 황해도와 함경도, 전라도 일대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백성과 병사들을 격려하며, 민심수습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 덕분에 온 나라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떤 대장이 아내를 몹시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붉은 깃발과 푸른 깃발을 세우고 명령하기를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붉은 깃발 쪽으로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푸른 깃발 쪽으로’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붉은 깃발 쪽으로 갔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푸른 깃발 쪽에 있었다. 그 사람 말하기를 ‘아내가 항상 경계해서 이르기를 세 사람이 이상 모인 데는 당신은 가지 마세요라고 했는데 붉은 깃발 아래를 보니 모인 사람들이 매우 많아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대장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아내를 두려워하는 것이 이 늙은이 뿐만은 아니로구나.’라고 했다.” 이는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설화집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나오는 우스갯소리입니다. 서거정은 책에서 “거정(居正)이 일찍이 일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있을 때 글을 쓰는 것으로 놀이를 삼았다. 이에 일찍이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를 했던 바를 써서 《골계전(滑稽傳)》이라 말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책 제목도 바로 "태평한 시대 한가한 때에 주고받은 우스갯소리"라고 풀어볼 정도인데 흔히 ‘골계전’이라고 줄여서 말하는 것으로 어떤 이는 이를 지배계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