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9월 1일(토) 낮 2시부터 박물관 강당에서 열아홉 번째 ‘책사람’ 강연을 진행한다. ‘책사람’은 책을 대출하고 열람하듯이 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강연 형식으로 열람하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정기 프로그램이다. 한글이 쓰인 최초의 그림 <안락국태자경변상도> 이번 책사람은 중앙승가대학 문화재학과 강소연 교수이다. 강소연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동국대 연구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BK연구원, 홍익대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30여년간 불교문화재를 조사·연구한 학자이다. 또한 일본 최고 명예학술상 ‘국화상’ 장려상과 ‘불교소장학자 우수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강연에서는 한글이 적힌 한글이 쓰인 최초의 그림인 조선 전기 불화 <안락국태자경변상도>를 다룬다. 불교문화재 전문가를 통해 이 작품 속 한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안락국태자경*변상도>는 1576년(선조 9)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월인석보 권8》(1459년)에도 실린 <안락국태자경>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 시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10월 20일(토)부터 8주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성인을 대상으로 멋진 한글 상표 이름을 만들고 이를 개성 있게 디자인해보는 교육 ‘한글 상표 공방’을 운영한다. 널리 알려진 상표나 거리의 간판 중에는 외국어 문자로 표기된 것이 많다. ‘한글 상표 공방’ 교육은 이러한 현 상황을 개선하고자 우리말의 어감을 살린 아름다운 한글 상표 이름을 만들고 이를 디자인하여 전시함으로써 한글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널리 드러내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한글 상표 공방’ 교육은 한글 상표 이름을 만들고 디자인하는 두 가지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 초반에는 상표 이름 짓기 전문가의 한글 상표 개발 전략과 사례 강의를 통해 한글 상표 만들기 실습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글꼴 디자인 전문가의 지도를 통해 개성 있는 글꼴 디자인 작업을 진행한다. 조별로 만든 결과물은 국립한글박물관에서 2주간 전시할 예정이다. 본 교육은 지난 2017년에 처음 선보인 한글, 상표, 디자인 등이 융합된 전문 교육을 한 자리에서 연계하여 받는 국내 유일의 프로그램이다. 그간 이론과 실제 영역을 두루 배워 실무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탈춤이란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따위로 분장한 뒤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으로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하던 가면놀이입니다. 이는 17세기 중엽에 궁궐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상연하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였는데, 인조 때 궁궐에서 연희를 하지 않게 되자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탈춤 가운데는 황해도 강령 지역에서 연희되다가 6•25한국전쟁 때 남하한 실향민들에 의해 인천과 서울에서 재현된 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도 있지요. 강령탈춤은 단오를 중심으로 새해ㆍ정월대보름ㆍ초파일ㆍ한가위 등에 행해졌는데 사자춤ㆍ말뚝이춤ㆍ목중춤ㆍ상좌춤ㆍ양반과 말뚝이춤ㆍ노승과 취발이춤ㆍ영감과 할미광대춤의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마부ㆍ사자ㆍ원숭이ㆍ말뚝이ㆍ목중ㆍ상좌ㆍ맏양반ㆍ둘째양반ㆍ재물대감ㆍ도령ㆍ영감ㆍ할미ㆍ용산삼개집ㆍ취발이ㆍ노승ㆍ소무 등 모두 20명입니다. 강령탈춤의 중심이 되는 말뚝이춤은 두 말뚝이가 똑같은 가면ㆍ옷ㆍ소도구를 갖추고 왼손에 5∼6자(1자 30.3cm) 가량 되는 곤장을 드는데 옷은 흰 바지저고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배우자를 “와이프(wife)”라는 영어로 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하지만 언어사대주의에 찌들지 않았던 예전 사람들은 “마누라”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마누라”라는 말이 중년이 넘은 아내를 허물없이 이르는 말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마누라”는 존칭의 뜻으로 쓰던 말입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는 “뎐 마누라 젼”으로 시작됩니다. 이때 “마누라”는 아주 높인 마무리 말과 함께 종종 같이 쓰여 궁중의 높은 인물을 가리키는 데 쓰던 말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겨레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서로를 가리키며 ‘이녁’이라 했습니다. 전에 우리 신문에 <우리 토박이말의 속살>을 연재했던 고 김수업 명예교수는 이를 서로가 상대 쪽을 가리키며 자기 스스로라고 하는 셈이라며, 아내와 남편 사이는 둘로 떨어지는 남남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 곧 한 사람이니 ‘그녁’으로 부를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라고 풀이 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평등할 뿐만 아니라 아예 한 사람이기에, 상대가 곧 나 스스로라고 여겼다는 남녀평등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말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쉬듯 물어볼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이는 2001년 5월부터 2002년 7월까지 KBS 2TV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명성황후”의 삽입음악(OST)으로 조수미가 불렀던 “나 가거든” 가사입니다. 조선의 국모였지만 일제의 칼에 비참하게 쓰러져간 명성황후의 울부짖음과 통곡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노래입니다. 1895년 오늘(8월 20일)은 을미사변(乙未事變) 곧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 일어난 날입니다.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 쪽 우두머리는 부임한지 37일밖에 안 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그 하수인들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배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미우라는 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하였으며 왕후의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우겼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 피우진)는 3ㆍ1만세운동과 임정수립 100돌을 계기로, 효창공원의 독립운동 기념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과 관련하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에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여덟분의 독립유공자가 안장되어 있으나, 독립유공자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 아닌 한낱 공원으로 방치하고 있다.” 라고 지적하면서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돌을 계기로 효창공원을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재조성할 것”을 권고 하였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혁신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하여,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돌을 계기로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기념공원화를 본격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권고를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효창공원 성역화에 대한 각계각층의 요구가 있었던 점도 작용하였으며, 효창공원 안 독립유공자 묘역에 대한 국가의 직접 관리와 독립운동기념공원 조성을 골자로 한 사업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 추진방안 마련을 위해 국가보훈처는 ’18년 8․15부터 세부 계획을 수립하고 관계부처와도 사전협의를 거쳐 ’19년에 관련 연구용역 등 독립공원화 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목해시계 곧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한데다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오목해시계는 세종 때 처음 만든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해서 제작되었고 가장 많이 만들어진 대표적인 해시계입니다. 궁궐이나 관공서 그리고 때로는 양반집에서까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정원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대부분은 이런 거치식이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 제852호 “휴대용 오목해시계”처럼 가지고 다니며 쓸 수 있는 것도 있었지요. 그런데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오목해시계의 가장 큰 의의는 세종의 백성사랑입니다. 곧 거치형 오목해시계는 1미터 남짓한 3단의 돌계단 위에 시계를 설치해 계단을 오르면 키 작은 어린이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에 만든 오목해시계는 시각을 나타내는 12간지를 그림으로 새겨놓았지요. 이는 한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특별히 배려한 것입니다. 곧 새벽 다섯 시에서 일곱 시까지를 가리키는 묘시(卯時)는 토끼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은 이 해시계를 서울 혜정교와 종묘 남쪽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말복이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지만 11일의 날씨는 찌는듯하여 가로수의 녹음마저 더위에 지친 듯 꼼짝도 안하고, 관상대에 의하면 이날 최고기온은 33도나 되어 예전보다 약간 높은 편. 길가를 지나는 살수차의 포말도 한결 가을을 재촉하는 듯이 이글이글한 아스팔트 위를 적셔주고 있다.” 이는 동아일보 4293년(1960년) 8월 12일 치 기사 내용입니다. 오늘은 더위가 한고비로 치닫는다는 말복입니다. 장마가 끝나고 입추와 말복 무렵이 되면 날씨가 좋아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벼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말복 나락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고 하여 귀가 밝은 개는 벼가 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땡볕도 지나쳐서 아예 벼가 타들어가기에 농민들이 애가 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겨레는 복날을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 하여 “더위를 꺾는 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 하여 더울 때 뜨거운 것을 먹었지요. 여름이 되면 사람 몸은 밖의 높은 기온 때문에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 제73돌입니다. 그런데 1945년 이날은 민족지도자 여운형 선생이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이하 ‘건준’)를 발족시킨 날이기도 합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부터 여운형, 안재홍, 조만식 등을 주축으로 일본으로부터 치안권 등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든 조직입니다. 건준은 8월 18일에 제1차 위원회를 개최, 건준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고 8월 25일 선언과 강령을 채택했지요. 이때 채택한 건준의 강령을 보면 ①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전민족의 정치적ㆍ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가지였습니다. 또 선언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 국가건설의 준비기관과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집결체로서 결성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건준은 각 지역 지부를 통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상태에서 반민주적 세력을 제외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적인 정권 예비기관이었지요.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운형은 극우세력으로부터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