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청송군 파천면 관동리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193호 “청송 관리 왕버들”이 있습니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의 따뜻한 곳에서 자랍니다. 버드나무에 견주어 키가 크고 잎도 넓기 때문에 왕버들이라 불리는데, 잎이 새로 나올 때는 붉은 빛을 띠어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무의 모양이 품위가 있는데 진분홍색의 촛불 같은 모양의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답지요. 청송 관동의 왕버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높이가 10.2m, 뿌리부분 둘레는 7.14m, 가슴둘레는 6.5m에 달합니다. 원래는 굵게 자란 나무였지만, 벌집을 꺼내기 위해 서쪽 가지를 자른 뒤, 자른 쪽이 썩어 들어가 지금은 대부분 죽은 상태지요. 그런데 가까운 곳에는 지름이 1m 정도 되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는데 이 왕버들과 옆의 소나무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한 총각이 마을 처녀와 결혼하려고 처녀의 아버지 대신 군대에 갔는데 그 총각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러자 처녀는 왕버들에 목을 매었는데 그 곁에서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서낭나무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 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느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이는 제국주의의 심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10년 오늘(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입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습니다. 이윤옥 시인이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지사의 심정이 되어서 쓴 시 “비굴치 말고 당당히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는 구절처럼 의사는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다가 순국한 정말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조사했던 일본인 검사는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중국의 석학 '장타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내산 연습용 바이올린이 30만 원대, 연주용이면 100만 원 가량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악기 해금은 연주용이 보통 600만 원 정도는 줘야 삽니다. 이렇게 해금 값이 비싼 것은 국악기 제작자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해금의 품질을 더욱 높여 600만 원 정도의 소리를 내면서도 반값에 팔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국악이 더욱 발전하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악기를 소유하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악기 값에 덧붙여진 거품을 빼주어야만 합니다.” 1986년에 궁중국악기라는 악기 제조업체를 설립하여 30년 넘게 오로지 한길에 매달려온 경기도 하남시 (주)궁중국악기 박성기 대표이사는 힘주어 강조했다. 자신이 새롭게 개량한 해금을 보여주었다. 해금 공명통 아래 ‘복판’에 옻칠을 해서 품격이 있어 보인다. 또 해금줄의 줄감개인 ‘주아’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렇게 해금의 완성도를 높이고도 오히려 반값에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가야금도 보통 2,500만 원에서 3,000만 원 정도는 주어야 쓸 만한 것을 살 수 있는데 이도 반값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시모시 남방! 남방!”(‘여보세요, 몇 번입니까’의 일본말)하고 날마다 아츰브터 밤까지 몸에는 검정 사무복을 입고 귀에는 수화긔(受話機)를 끼고 신호의 뎐등불이 반적어릴 때마다 어엽븐 소리로 물으며 뎐화 가입자와 가입자 사이에 말을 할 수 잇도록 중매하여 주는 것이 교환국 교환수 즉책임니다. 이 직업도 남이 알기에는 감안히 안저서 번호방 뭇고 얼른 그 번호에 대여주는 것이라 그닥지 어렵지 안케 생각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이 직업도 방송국의 『아나운써』 와 가티 쉬운 듯 하면서도 남모를 고통과 설흠이 잇는 것임니다.“ 위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5호(1927년 03월 01일)의 “여자직업안내(女子職業案內), 돈 업서서 외국 유학(外國 留學) 못가고 취직(就職) 할 곳은 몃치나 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 일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외국 유학을 못가고 대신 여자가 취업할 수 있는 직종으로 교사, 의사, 부인기자(婦人記者, 당시 여기자는 기혼자여야 했음), 유치원 보모(교사), 간호부, 아나운서 등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직종인 산파(産婆)와 전화 교환수도 등장하지요. 그런데 전화 교환수의 자격으로 “여자 보통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남해군 상주면에 가면 명승 제39호 <남해 금산(南海 錦山)>이란 절경이 있습니다. <남해 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절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으로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남에서는 금산이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우열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견주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 또는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금산이 작은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어서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며, 중국 서불이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려고 이곳을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 차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싶어라 당신의 눈물로 나의 손을 씻고 가끔씩 나의 창문을 두드리는 허전한 나뭇잎의 마음을 잡고 싶어라 새순은 돋아나는데 아장아장 봄볕이 걸어오는데 당신이 그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살고 싶어라“ 위는 원재훈 시인의 시 <춘분> 일부입니다.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이지요. 봄이 열리는 춘분, 새싹이 돋아나고 아장아장 봄볕이 걸어옵니다. 당신이 그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고 싶은 날입니다. 이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가 진 뒤에도 얼마간은 빛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낮이 좀 더 길게 느껴지지요.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밥 먹기가 고작이었지요. 보통은 음력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아침저녁 두 끼만 먹고, 2월부터 8월까지는 점심까지 세끼를 먹었습니다. 낮 길이가 짧은 탓도 있지만 일하지 않는 겨울엔 두 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춘분이 지나면 농번기가 닥쳐오기 때문에 일꾼들의 배를 주리게 할 수는 없었지요. 옛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랑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 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졌다.“ 이는 나태주 시인의 <산수유꽃 진 자리>라는 시 일부입니다. 이제 완연한 봄 저 멀리 남녘, 전남 구례에서는 “산수유꽃축제”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곧 남원 주천면 “용궁산수유축제”, 경북 “의성산수유축제”, 경기 “이천백사산수유꽃축제”, “양평산수유한우축제” 등이 연이어 열리게 될 것입니다. 3월에 노오란 꽃이 피고, 10월에는 열매가 빨갛게 달리는 산수유. 우리나라에서 산수유가 가장 많이 자라고 있는 전남 구례 산동마을에는 즈믄해(천년) 전 중국 산동성에서 살던 처녀가 이 마을에 시집올 때 산수유를 가져다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산수유 열매는 신선이 먹는 것이라 하는데 간과 콩팥(신장)을 튼튼히 하고 원기와 혈을 보하며, 혈압을 내리고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도 산수유는 정력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애터미(주)에서 새로운 임페리얼마스터(최고직급)가 탄생했다. 애터미는 지난 3월 16일, 일산 킨텍스 제1 전시장에서 열린 ‘애터미석세스’를 통해 뉴 임페리얼마스터인 이덕우 임페리얼마스터를 비롯해 새로운 직급을 달성한 900여명의 판매원에 대한 승급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이덕우 임페리얼마스터는 “나는 애터미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봤다. 하지만 아직 못해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회공헌>이다. 나는 이제 애터미를 통해 세상에 공헌하는 임페리얼마스터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하여 큰 손뼉을 받았다. 임페리얼마스터가 되면 현금 10억 원이 일시불로 주어지는 애터미의 최고 직급이다. 이번에 새로이 임페리얼마스터를 달성한 이덕우 임페리얼마스터는 지난해 애터미 최초로 달성한 박정수 임페리얼마스터에 이어 두 번째다. 애터미에서 성공 못하면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덕우 임페리얼마스터는 한 때 비닐하우스에서 살 정도로 실패를 거듭했었으나 애터미에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람이다. 박한길 애터미 회장은 이덕우 임페리얼마스터 승급에 “애터미는 회원 모두의 성공을 위해 모든 회원이 함께 손잡고 달려가는 기업이다. 이덕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이야 신을 만드는 장인을 보기 어렵고 거의 기성화를 신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조선시대만 해도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장인을 일러 토박이말로 ‘갖바치’라 했고 한자말로는 ‘화혜장(靴鞋匠)’이라고 했지요. 화혜장은 목이 있는 신발 ‘화(靴)’를 만드는 ‘화장(靴匠)’과 목이 없는 신발 ‘혜(鞋)’를 만드는 ‘혜장(鞋匠)’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에 화장은 16명, 혜장은 14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요. 하지만 가죽신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신의 대부분을 서양 구두가 차지함에 따라 갖바치의 명맥도 거의 끊겼습니다. 그러나 전통신을 만드는 것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제작공정을 거쳐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문화재청은 전통신을 만드는 장인곧 “화혜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하여 전승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혜(鞋)’의 종류로는 코와 뒤축 부분에 흰 줄무늬를 새긴 주로 남자들이 신던 태사혜(太史鞋), 여자신으로는 앞코에 구름무늬를 놓은 운혜(雲鞋), 코와 뒤꿈치에 당초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글자가 없었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 곧 선사인들은 바위에 그림을 새겨서 자신들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에 새겨진 그림들 곧 암각화는 경북 울주군 언양면 〈반구대암각화〉와 그에 가까운 곳인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 그리고 포항 흥해읍 칠포리 〈칠포리 암각화〉 등이 있습니다. 이곳 말고도 경상북도 고령군 아래알터길 15-5 (대가야읍) 알터 마을 입구에도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바위그림 보물 제605호 <고령 장기리 암각화>도 있습니다. 이 바위그림은 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심원, 불분명한 사각형 안에 전(田)자 모양으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진 십자형, 가면모양 등이 새겨진 이형화도 있지요. 이 바위그림은 가까운 곳에 금산령 석기 유적과 고인돌 유적에서 석기와 토기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암각화로 짐작된다고 하지요.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먹거리, 다산과 풍요, 자연에 대한 경외감 등을 그려서 남기고자 했을 것으로 보여 당시 신앙과 사회생활 등 선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조각사와 회화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