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미리 했다. 하나는 주문을 외우면서 복숭아씨를 먹는 것이요, 하나는 헌 신 바닥을 불에 태워서 가루로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서 코 밑에 대고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부터 쓰던 방법으로서 효과가 가장 좋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어렵지도 않은 것이다.” 위는 오희문이 임진왜란 기간 9년 3개월 동안 쓴 그 일기 《쇄미록(䨏尾錄)》에 소개된 학질 떼는 방법입니다. 또 조선 후기의 문신 정재륜이 궁궐 출입 때 보고들은 것을 적은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나옵니다. “현종이 아직 동궁이었을 때 학질에 걸린 지 10여 일이 지났다. 침이나 약, 부적이 모두 효험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놀라게 하면 뗄 수 있다”고 해서 효종께서 현종을 징광루 아래에 있게 하고 궁녀를 시켜 항아리를 몰래 가지고 다락에 올라가 떨어뜨려 깨도록 했다. 또 수십 명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궁녀 아무개가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소리를 지르게 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때에는 가장 흔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시루는 밥을 찌거나 떡을 찌는데 쓰는 도구로 예전에는 보통 가정에 한두 개쯤은 있던 물건입니다. 그러나 절에서 쓰던 시루는 몇 백 명이 먹을 만큼 큰 용량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된 “속초신흥사청동시루(束草新興寺靑銅甑)”도 큰 시루 가운데 하나지요. 이 시루에는 “襄陽雪岳山神興寺□上室鍮銅道光四年甲申五月日買□奠百斤都監□玄別坐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제작연도와 용도를 알 수 있게 합니다. 글씨의 내용으로 보아 이 시루는 양양 설악산 신흥사에서 1824년(도광 4) 왕실의 제사를 위해 청동 백근을 써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루는 신흥사 유물 가운데서 왕실과 관련된 것인데, 절의 규모와 사세(寺勢)를 알려주는 자료로 글씨 가운데 도광 4년은 신흥사가 본격적으로 왕실의 원찰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던 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청동시루는 왕실의 제사인 국기일(國忌日)과 관련된 의식에 필요한 제물을 만드는데 쓰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큰 시루로는 통도사 청동시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가 있는데 통도사에서 600여명의 승려가 이 시루에 떡과 밥을 쪄서 먹었다고 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호미로 2122번 길을 달리다 보면 길가에 노란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을 볼 수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모감주나무는 노란 꽃을 피우고, 병아리꽃나무는 흰 꽃을 피우지요. 병아리꽃나무는 키가 작고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로 잎은 봄에 돋아 가을에 지고 꽃은 4~5월에 피며 열매는 9월에 맺습니다. 한편 모감주나무는 키가 크고 줄기가 굵으며 위쪽으로 가지가 퍼져 자라는 나무로 노란 꽃은 한여름에 피며 열매는 10월에 익지요. 특히 병아리꽃나무의 까만 열매는 빈혈 치료에 좋고 허약한 콩팥 기능을 회복시켜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꽃말은 ‘의지와 왕성’입니다. 꽃이름에 ‘병아리’ 란 말이 들어가 꽃이 노란색일 것 같지만 사실은 흰색 꽃이 핍니다. 반대로 모감주나무꽃은 병아리 색처럼 노란 빛을 띠는 것이 재미납니다. 해안을 따라 경사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리의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알려진 곳 가운데 크기와 면적, 개체수가 가장 크고 많으며 생태적ㆍ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4~5월, 차창 문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足凍姑撤尿(족동고철뇨) 언 발에 오줌 누어 무엇하랴? 須臾必倍寒(수유필배한) 금방 반드시 배나 추워질 것인데 今䄵糴不了(금년적불료) 금년에 환곡을 갚지 못했으니 明年知大難(명년지대난) 내년은 큰 곤란함 알 수 있겠네 이 시는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로 호가 초정(楚亭)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함경도 종성 지역의 문물과 풍속을 다룬 연작시(連作詩) <수주객사(愁洲客詞)>의 일부분입니다. 언 발에 오줌을 눈다고 따뜻해질 수 있을까요? 아니 잠시 따뜻해질 뿐 금방 발이 얼어버릴 것입니다. 올해 환곡(還穀)을 갚지 못했으니, 내년에는 얼마나 더 큰 시련이 닥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시구를 보면 살림이 어려워 환곡을 받아도 금방 먹어 버려 흔적도 없고, 환곡을 갚아도 형체가 없습니다. 탐관오리들이 백성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뺐는지 심지어 우물까지 독점하여 물도 세금 내고 먹어야 한다고 한탄합니다. 박제가는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그 견문한 바를 쓴 책《북학의(北學議)》를 썼는데, 당시 조선의 근본문제가 가난이라고 보고, 백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위는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7월 17일 기록이다. 이 내용에 보면 족친(族親), 내정(內庭), 청사(廳事), 거조(擧措), 침문(寢門), 합사(合辭) 같은 6개의 어려운 한자말이 주석도 없이 실려 있다. 아무리 원문을 살려 뒤쳤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한자말을 마구 그대로 쓰고서야 누구더러 읽으라 하는 것인지 안타깝다. 그뿐이 아니다. 정부기관이 보내는 보도자료들에도 이런 현상은 여전하다. 글은 사람과 사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발갱이(발검들)는 경상북도 구미시 지산동 앞에 있는 들판 이름입니다. 지산동은 약 1,500세대 4,8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농사일을 해오던 마을이지요. 이 마을에 전해오는 발갱이들소리는 구미 지산동의 넓고 기름진 평야에서 일할 때 부르던 토속민요로 1999년 4월 15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으로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면서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지요. 들소리는 모두 10가지로 영남아리랑으로 시작하여 나무를 하거나 풀을 벨 때 부르는 어사용, 가래질소리, 망깨소리, 목도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초 작업을 마친 뒤에 모찌기 소리, 모심기 소리, 논매기 소리를 메기고 받으면서 부르고 이어 타작소리로 이어지지요. 마지막으로 풋굿이 베풀어질 마을을 향하여 상머슴을 깽이말(들채)에 태우고 흥겨운 칭칭이를 부르면서 행진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미 발갱이들소리는 토속민요로 도시화, 산업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오늘날에도 비교적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 예능보유자 백남진 선생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지산동을 중심으로 발갱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맛은 뚝배기”라는 말이 있듯이 뚝배기는 우리 고유의 음식 조리용 오지그릇(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린 뒤 위에 오짓물을 입혀 구운 그릇)의 하나입니다. 뚝배기는 찌개를 끓일 때 또는 삼계탕ㆍ설렁탕ㆍ해장국과 같은 음식을 담거나 끓일 때 쓰며, 지방에 따라 툭배기ㆍ툭수리ㆍ툭박이ㆍ투가리ㆍ둑수리 등으로도 불립니다. 뚝배기는 아가리가 넓고 속이 약간 깊은 그릇인데 잿물을 입혀서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웠기 때문에 윤기가 나고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지요. 뚝배기는 김칫독, 장독처럼 높은 온도에서 구울 때 그릇 안에 있던 결정수가 증발되어 그 증발한 자리에 아주 작은 미세구멍이 생깁니다. 이 미세구멍은 그릇 밖의 공기와 그릇 안의 공기가 순환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러한 통기성은 그릇 안의 음식이 상하지 않고, 발효하도록 돕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뚝배기는 불에 강한데다가 직접 불 위에 올려놓고 음식을 끓이면서 먹을 수 있어서 보온성이 좋고, 금속제 그릇과 달리 쉽게 끓지는 않지만, 일단 끓고 나면 그 열이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된장찌개를 비롯한 찌개류, 탕류의 음식에는 아주 제격입니다. 또 금속제 그릇이 녹이 슬어 사람
[우리문화신문= 김영조 기자]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여 불교관련 작품사진을 찍는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이 올해도 불기 2561년을 맞이하여 서울 불일미술관서 5월 1일부터 7일까지 7일간 열린다. 이번 사진전은 올해로 22회째를 맞이하는 역사 깊은 사진전으로 한국불교사진협회(회장 최우성)주최,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주관,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BBS불교방송 등의 후원으로 열리며 전시회 주제는 ‘불전사물’을 대상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한국불교사진협회 소속 사진작가들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전국 절에 성보(聖寶)로 되어있는 불전사물을 찾아 지난 1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화했다. 불기 2561년 봉축기념사진전은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열리며 개막식 행사는 서울 불일미술관(법련사)에서 5월 1일(월) 오후 5시에 갖는다. 특히 이번 불교사진전에는 청소년불교사진공모전 시상식도 아울러 갖는다. <제22회 불교사진협회 회원전 안내> *서울전시: 불일미술관(법련사) 경복궁 앞(지하철 3호선 안국역 하차 도보 10분) 5월 1일(월)부터 7일(일)까지 7일간 전화: 02-733-5322 개막행사 오후 5시 *대구전시: 대구문화예술회관 5전시실 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 조국의 상황을 생각하니 참으로 참담하고 우울하다. 독립국이 보호국이 되었다가 이제는 합병되는 신세로 변해버렸다. 이런 때 일본 유학생이라는 처지에 있으니 옛날이나 앞으로나 나처럼 조국의 비운을 당하는 자가 있을까?” 이는 일본유학시절 조소앙 선생이 쓴 《동유략초(東遊略抄)》에 나오는 글로 《동유락초》는 1904년 10월 9일부터 1912년 5월까지 조소앙 선생이 일본유학 시절의 일기입니다. 그는 일기에서 말합니다. “내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 떨 끝만큼이라도 있었는가? 고개 숙이고 학교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고 말입니다. 조소앙(1887 ~ 1958) 선생은 당시 22살 이상만 입학 할 수 있는 성균관에 16살의 나이로 입학이 허용될 정도로 우수한 인재였으며 신채호, 유인식, 변영만 등 독립운동가와 함께 수학하였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정부에서 황실특파유학생을 50명 모집하였는데 무려 700명이 지원하여 1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조소앙 선생은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그곳에서 국치일을 맞게 되자 “오장(五臟)이 끊어지는 듯 통탄함”을 느껴 이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되지요. 조소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70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광무(光武, 대한제국 연호) 3년(1899년) 5월 17일 기록을 보면 “漢城電氣會社(한성전기회사)에서 電車開通式(전차개통식)을 始行(시행)하다. 이에 앞서 지난 4日 試運轉(시운전)을 한 바 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광무 5년(1901년) 6월 17일 기록을 보면 “漢城電氣會社(한성전기회사)에서 電燈點燈式(전등점등식)을 擧行(거행)하다.”라는 내용이 보이지요. 우리나라는 1887년 처음으로 경복궁 향원정 연못가에 발전기가 설치되고 건청궁에 전깃불이 켜졌습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899년 전차개통식을 열고 동대문에서 신문로를 잇는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개통한 전철은 백성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었지요. 멀리 시골에서도 전차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전철은 하도 신기해 한번 타면 내리려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1900년 4월 10일엔 민간에도 전깃불이 밝혀졌습니다. 동대문발전소를 세우고 전등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차를 밤에도 운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종로 매표소 앞에 3개의 가로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곤 다음 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