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신라와 고려에서는 근친혼의 나라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근친혼이 흔했습니다. 먼저 신라의 경우 《신당서(新唐書)》 신라 전기에 보면 “형제의 딸이나 고종ㆍ이종 자매를 다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 왕족은 제1골이며, 아내도 역시 그 족속으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또 제1골은 제2골의 여자에게 장가가지 않으며, 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첩으로 삼는다.”라는 구절이 있어 근친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진흥왕의 아들 동륜은 고모와 혼인하였고, 무열왕의 아버지 용춘은 7촌 조카와 혼인하였다고 하지요. 고려 왕실에서도 물론 근친혼을 했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 가족과 의식주, 송기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 따르면 고려시대 왕실에서 63건의 동족혼이 확인되고, 이 가운데 8촌 이내 근친혼이 70퍼센트에 달하였을 뿐 아니라 이복형제자매 간의 혼인도 10건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고려 중기 권신이었던 이자겸(李資謙, ?-1126)은 권력을 독점하려고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들였고, 셋째와 넷째 딸은 예종의 아들인 인종의 왕비로 바쳤을 정도입니다. 자매 사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로 바뀌었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어느 날 영혼이 맑은 조선 청년 윤동주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다. 그 청년 윤동주(1917~1945)는 올해로 태어난 지 100돌이 되었다. 그 100돌을 맞아 “윤동주 100년 생애” 특별전이 어제 3월 29일 늦은 3시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1관에서 막을 올렸다. “윤동주 100년 생애” 전시회는 “윤동주 100년문화예술제”와 경기문화콘텐트진흥원(이사장 서정돈)이 공동주최하고, 서울시인협회와 스타로고(대표 김상철)가 공동주관한다. 윤동주 삶의 흔적이 담긴 사진 200여 점이 중심인데 시인의 생애를 31개 장면으로 나눠 구성한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윤동주의 가족이 함경북도 고향을 버리고 이주하던 시절의 북간도 풍경, 은진중학교 터,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서울시인협회 회원들이 현지에서 촬영한 일본 도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와 나주시 문평면 사이에는 보물 제1372호 함평고막천석교(咸平古幕川石橋)가 있습니다. 고막천(古幕川)에 동서로 가로놓인 돌다리 고막천석교는 1273년(고려 원종 14) 무안(務安) 법천사의 고막대사가 도술을 부려 놓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떡을 만들어 이 돌다리를 건너 나주와 영산포에 떡을 팔았다 하여 일명 “떡다리” 혹은 “똑다리”라고도 불립니다. 다리 모양은 좀 투박해 보이지만 멋 부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줍니다. 자연을 닮은 화강암 돌 4~5개를 포개어 교각을 만들고 네모난 돌을 한두 개 받쳐 굄돌로 삼았지요. 그 위에 다시 시렁돌을 올렸는데 이 돌은 노면보다 양쪽으로 50cm가량 튀어나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다리의 날개처럼 보입니다. 전체 길이 20m, 너비 3m, 높이 2.1m인 이 다리는 옛날엔 수수, 조를 널어도 한 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상판에 틈이 없었다고 하는데 700여년이 지난 세월 때문인지 다리 상판 위에 서면 약간의 틈새가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다리 원형은 7∼8m 정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최근 콘크리트로 잇대어 놓았는데 이왕이면 손상된 부분도 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가면 사적 제214호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이 있습니다. 이는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입니다.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532년 왕비 그리고 세 아들과 함께 돈과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방의 전설에 보면 구형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고 하여, 살아남은 군졸들이 주검을 묻고 돌들을 하나씩 포개어 얹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예전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있다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지요.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 중간에 전체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농악 곧 풍물굿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크게 경기농악ㆍ영동농악ㆍ호남우도농악ㆍ호남좌도농악ㆍ경상도농악으로 나뉩니다. 농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진주삼천포농악(晋州三千浦農樂, 제11-가호), 평택농악(平澤農樂, 제11-나호), 이리농악(裡里農樂, 제11-다호), 강릉농악(江陵農樂, 제11-라호), 임실필봉농악(任實筆峯農樂, 제11-마호) 등 다섯 지방의 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오른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활발한 임실 필봉농악은 전북 임실 강진면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풍물굿으로 호남 동부지역의 좌도농악에 속합니다. 필봉농악의 굿패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는데, 쇠잡이(꽹과리나 징을 치는 사람)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풍물굿에서 쓰는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쓰지요. 농기, 용기(그릇), 영기(깃발), 긴 쇠나발, 사물(꽹과리, 징, 북, 장구), 법고(불교의식 때 쓰는 작은 북), 잡색(대포수, 창부<남자광대>, 양반, 조리중<삼태기를 맨 중>, 쇠채만 든 농구, 각시, 화동과 무동<사내아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이인수(李仁壽)는 본디부터 재주와 덕망이 없으며 다만 음식을 요리하는 일만 알았을 뿐이 온데, 지금 새로운 정치를 하는 때에 추부(樞府, 중추원) 에 오르게 되니, 사림(士林, 조선시대 유교를 닦는 선비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관직을 파면시키고 다시 벼슬을 주지 마소서." 이는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8월 19일 치 기록입니다. 이인수란 사람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오래 전부터 태조의 밥을 책임지던 사람으로 태조는 이인수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이에 다른 벼슬아치들이 반발을 했습니다. 학문을 닦지 않고 오로지 음식만 할 줄 아는 천한 사람에게 벼슬을 준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그러자 태조는 그에게 병권(兵權) 등 다른 권한은 주지 않고 오직 사옹(司饔, 대궐 안에서 쓸 음식물을 만들던 요리인) 일만 맡긴 것이라며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인수는 어쩌면 조선 최초의 궁궐요리사 “숙수(熟手)”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세종 때는 이교(李皎)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추원 부사 김익생(金益生)을 이교(李皎) 대신으로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로 삼았다. 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시청 로비에 온갖 나방세상이 열렸다. 바로 “시민 허운홍의 나방이야기전”이 3월 23일(목) 시작하여 4월 7일(금)까지 16일 동안 열리는 것이다. 전시회를 여는 서울시청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비가 아닌 나방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방이 아닌 나비표본도 있지만, 나방들은 나비에 뒤지지 않고 아니 더욱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호랑나비처럼 화려하고 큰 것들도 있지만, 아주 작아 바람만 좀 세게 불면 훅 꺼지거나 날아갈 것만 같은 정말 작은 것들 있다. 나방들을 꼼꼼히 표본을 해놓은 것을 보니 허운홍 선생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가 있다. 전시장에는 수십 년 동안 나방애벌레를 채집하고 길러낸 나방표본 900여 종 2천여 마리(표본액자 45점)가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표본만 전시한 것이 아니다. 선생은 벽면에 나방의 큰 사진과 함께 “생태, 왜 나방 연구가 중요한가?, “수분 매개자로서의 나방”, “먹이사슬 고리로서의 나방” 같은 설명판을 붙여놓아 나방이 비교적 생소한 일반인의 이해를 돕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 내용을 보면 “지구상 현 종수는 약 1천만~1,400만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화강암을 다듬어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8각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8각형 기둥의 맨 위의 가운데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멍을 뚫었다. 깃대 끝에는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었다.” 이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있는 내용인데 이로 미루어 조선 후기에는 궁궐에 돌로 만든 풍기대를 설치하여 바람을 관측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국보 249호 <동궐도(東闕圖)>에 풍기대 그림이 있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지요. 지금도 창경궁(昌慶宮)과 경복궁(景福宮) 그리고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앞뜰에 풍기대가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편서풍이 불면 날씨가 좋고, 동풍이 불면 궂은 날씨가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지요. 이러한 것을 좀 더 과학적인 생각으로 가다듬어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를 재기 위하여 풍기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업을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상북도 기념물 제98호인 경주 석장동 암각화는 다른 암각화에서 보기 힘든 동물 발자국 따위의 암각화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27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들 암각화 가운데는 기하무늬 8점과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자성기(女子性器) 3점, 배 1점, 그 밖에 동물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따위가 새겨져 있습니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근처로 경주 시가지 북서쪽 서천과 북천이 합쳐져 형산강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은 경치가 좋은 곳이라 조선시대에는 금장대라는 정자가 있던 곳으로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되는 바위에 새겨져있으며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모양이 많습니다. 석장동 암각화는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특히 검과 결합된 여자성기(女子性器)의 그림 따위는 포항 칠포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KTV 국민방송(원장 류현순)은 오는 24일 늦은 4시 40분, 화제의 인물을 찾아가 시청자들과 공감의 시간을 갖는 새 프로그램 『직격 인터뷰』(진행 이충현, 연출 최정윤) 첫 방송을 내보낸다. 『직격 인터뷰』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리더와 멘토, 작은 영웅, 자신만의 철학과 경륜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이들을 찾아간다. 사람과 세상, 세대와 세대를 잇는 ‘휴먼 메신저’로서 현 시기 한국인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는 인터뷰이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얻고자 기획됐다. 첫 회에선 ‘생각이 에너지다’, ‘사람을 향합니다’, ‘진심이 짓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등의 명카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광고계 미다스의 손으로 자리매김한 TBWA코리아 박웅현 대표를 만난다.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인문학 전도사이기도 한 박 대표는 창의력과 진정성을 갈구하는 청년들에게 손꼽히는 멘토다. 이날 방송에선 2030 젋은이들에게 꿈과 창의력을 키워주기 위해 진행해온 강의 프로젝트인 ‘망치 프로젝트’의 취지와 성과, 그리고 향후 계획을 들어본다. 또 광고만의 틀에 갇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