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용정의 3ㆍ13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어린 학생들이 일제에 무참히 희생되어 묻힌 무덤을 찾았을 때의 그 비애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리디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되찾겠다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죄로 일제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 부모의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지요?” 2014년 9월, 간도지역의 여성독립운동가 유적지를 답사한 이윤옥 시인은 <용정 3ㆍ13 반일 의사릉>에 참배한 심경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3월 13일은 북간도 용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입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 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 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는 <독립신문>1920년 1월 1일치 기사입니다. 1919년 3월 1일, 대대적인 고국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서도지역)에서 전승되던 소리로이제 북한 지역에 속해버린 지역적 특성 때문에 더는 본고장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달래려는 시도가 어제 3월 9일 밤 8시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있었다. 국립국악원의 대표적인 정통 국악 공연 <목요풍류>의 하나로 열린 “두고온 소리, 보고픈 산하” 공연이 그것이다. 공연은 130석 규모의 풍류사랑방을 가득 메운 가운데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었다. 사회와 공연의 두 가지를 함께 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유지숙 명창은 먼저 이 공연을 열게 된 배경을 소개한다. “서도소리 본고장의 소리를 들려드리고픈 일념에서 이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도소리 1세대 선생님들이 이제 거의 고인이 되고 살아계신 분들마저도 고령이라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이 의욕적으로 참여해주셔서 성사되었습니다. 중국 연변에서 힘들게 서도소리를 전승해나가시는 전화자ㆍ최성룡 교수님과 고령임에도 소리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박기종ㆍ김경준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공연의 시작은 연변 동포들의 몫이다. 연변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7 10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5 50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4 100원까지 1개월이자 원금의 백분의2.5(중간 줄임) 1원 이내의 것이면 한달 이자가 원금의 백분의7이라고 하엿스니까 7전(錢)임니다그려. 한달에 7전이니까 기한까지 넉달이면 28전이요 연리로 계산한다하면 1년에 84전... 즉 연리 8할4푼의 이자임니다. 연리 8할4품의 이자! 아! 얼마나 무서운 폭리냐!“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33호(1930년 10월 01일)에 나온 “지상공개(誌上公開)폭리대취체(暴利大取締-단속, 제2회), 젼당포ㆍ셋집ㆍ양복점(洋服店)”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거의 사라진 풍속이지만 예전엔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맡긴 물건 따위를 마음대로 처분하여도 좋다는 조건하에 돈을 빌려주는 일종의 사금융업 ‘전당포(典當舖)’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급하게 돈이 쓸 데가 생기면 집안에 있던 온갖 물건을 전당포에 가서 전당을 잡히면서 한 푼이라고 더 받으려고 전당포 주인에게 사정을 하는 풍속이 있었지요. 《별건곤》은 연리 84%나 되는 이자에 폭리라며 고발을 합니다. 돈을 일 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터”에 가면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습니다. 높이 9.3m로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지요. 모전석탑은 멀리서 보면 마치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돌을 하나하나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탑으로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라 하여 모전석탑이라 부릅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지요. 기단 네 귀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습니다. 문 좌우에는 불국토(佛國土)를 수호하는 수문장(守門將)인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새겨져 있구요. 신라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비슷한 때 세워진 익산 미륵사터 석탑(국보 제11호)과도 견주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하여 개축ㆍ보수된 모습이며, 처음 만들어진 이후에 수없이 고쳐 쌓았을 것이라고 하지요. 1989년 문화재관리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함경도 원산을 지나다 명태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한강에 땔나무를 쌓아놓은 것처럼 많아서 그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는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조선 말기의 문신 김기수(金綺秀:1832∼?)의 견문기록 《일동기유(日東記游)》에는 “물속에서 활발하게 살아 헤엄치는 명태가 구경거리가 아닐 정도로 너무 많이 잡히고 값이 싼 까닭에 두메산골에 사는 노인들과 여자는 물론 아이들까지 명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라는 기록이이 나올 정도로 명태는 흔했습니다. 겨울이면 원산 앞바다에서 명태가 많이 잡히는 바람에 원산에서는 다들 명태 말리는 일에 매달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것을 주고서 지나치게 생색낸다는 뜻의 “북어 한 마리 부조한 놈이 제사상 엎는다.”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겠지요. 또 별 볼일 없는 명태장사를 하는 척 하면서 다른 장사를 한다는 뜻의 “명태 한 마리 놓고 딴전을 본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싱싱한 생물 상태면 ‘생태’, 얼린 것은 ‘동태’, 말린 것은 북어 또는 건태, 한 겨울에 덕장에 걸어 차가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버선은 우리 겨레가 옷감으로 발 모양과 비슷하게 만들어 발에 신는 물건입니다. 그 버선은 형태에 따라 곧은버선(고들목버선)과 누인버선,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홑버선ㆍ겹버선ㆍ솜버선ㆍ누비버선 따위가 있습니다. 그 밖에 어린이들이 신는 것으로 타래버선ㆍ꽃버선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 속담에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옛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가난한 백성들은 버선을 신지 못하고 그냥 짚신을 신은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다가 시집ㆍ장가를 가면 그때서야 혼례복에 맞춰 버선도 신게 되지요. 이때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혼례를 치르는 사람은 버선도 마흔에야 처음 신게 되는 것입니다. 머슴들은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심지어 마흔을 넘겨 겨우 장가를 들기도 했습니다. 마흔이 넘어서 버선을 신으면 그 감회가 남다를 것입니다. “갓 마흔에 첫 버선”은 그래서 나온 속담일 것입니다. 조선후기 학자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이 쓴 《송남잡지(松南雜識)》를 보면 버선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양반집 부인이 워낙 바느질 솜씨가 없어서 남편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목해시계 곧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조선 세종 때에 처음 만든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해서 만들었고 가장 많이 만들어진 대표적인 해시계입니다. 궁궐이나 관공서 그리고 때로는 양반들이 집에서까지 널리 사용하였습니다. 《세종실록》 77권 19년(1437년) 4월 15일 내용을 보면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仰釜日晷, 오목해시계)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하여 세종의 백성사랑이 드러난 과학기기입니다. 오목해시계는 뜰에 설치해 놓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가지고 다니면서 볼 수 있는 휴대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뜰에 설치하는 것은 대개 받침대 위에 올려놓게 만들었는데, 청동제와 돌로 깎아 만든 것이 많았고 자기제품도 있지요. 이것들은 대체로 아름답고 품위 있게 만들었고 조각을 한 돌받침대에 올려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휴대용은 표면을 반둥근꼴로 오목하게 파고 가운데에 침을 세우게 되어 있는 간략한 것이 있고, 자석을 붙여 남북을 정확하게 맞춰 시각을 측정하게 만든 정밀한 것의 2종류가 있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 제852호 휴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셋째 절기(節氣)로 경칩(驚蟄)이다. “경칩”이란 말은 겨울잠 자는 벌레가 놀라서 뛰어 나온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돼지날(亥日, 해일)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하였으며, 경칩 뒤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기도 했다. 《성종실록》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는다고 하였듯이, 우수와 경칩은 새싹이 돋는 것을 반겨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절기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면 대동강물이 풀린다고 하여 완연한 봄을 느끼게 되는데 이날 농촌에서는 산이나 논의 물이 괸 곳을 찾아다니며, 몸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면서 개구리(또는 도롱뇽, 두꺼비) 알을 건져다 먹는다. 또 경칩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하여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기도 하며, 빈대가 없어진다고 하여 일부러 흙벽을 바르기도 한다. 또 이때 고로쇠나무(단풍나무, 어름넝쿨)에서 나무물[水液]을 받아 마시는데, 위장병이나 속병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특히 경칩에 처녀 총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옛 사람들이 입었던 옷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문헌이나 벽화에 남아 있는 그림 따위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다만, 옛 사람들의 무덤에서 옷들이 출토되면 그거야말로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 가운데 지난 2006년 경북 문경시 영순면에 있는 전주최씨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로, 현재 문경새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59호 “문경 최진일가묘 출토복식 (聞慶 崔縝一家墓 出土服飾)”도 그 하나입니다. 최진(崔縝)과 그 부인의 무덤, 그리고 후손으로 추정되는 무덤 등 3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자, 중치막(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입던 겉옷), 액주름(겨드랑이 아래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옷), 저고리, 바지 따위로 모두 65점이며, 이 가운데 훼손이 심한 유물을 뺀 59점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였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중치막(中致莫)'과 '족두리형 여모(女帽)'는 지금까지 발굴된 출토복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중치막은 사대부들이 나들이할 때 입던 옆트임이 있는 곧은 깃의 도포(袍)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것이었으나 '문경 최진일가묘 출토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7년 2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국내 거주 38명, 나라밖 거주 1명뿐이다. 어제 삼일절을 맞아 서울 종로구 평화로 평화비 소녀상 앞에서 ‘제1272차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이날 집회를 주최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2015 한일위안부협정 무효와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책임 인정과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이렇게 살아있는 역사들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가 나왔다. 3월 1일 삼일절 98돌을 맞아 개봉한 영화 이나정 감독 김향기, 김새론 주연의 '눈길'이 그것이다. 영화 ‘눈길’은 학교도 다니고 글도 읽을 줄 아는 부잣집 막내딸 ‘영애(김새론 분)’와 그런 영애를 동경하던 가난한 소녀 ‘종분(김향기 분)’이 끔찍한 곳으로 끌려가게 되면서 같은 비극을 겪게 된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 영화 '눈길'은 개봉 첫날인 3월 1일 3만7,269명을 끌어 모아 박스오피스 순위는 6위를 차지했다. 2년 전 2015년 3월 1일 텔레비전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