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국보 제92호 “청동 은입사 물가풍경 무늬 정병[靑銅 銀入絲 蒲柳水禽文 淨甁]”이 있습니다. 정병(淨甁)이란 원래 인도에서 승려가 여행을 할 때 밥그릇이나 의복과 함께 메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인데, 부처님 앞에 깨끗한 물을 바치는 공양구(供養具)로서의 쓰임새로 발전했습니다. 이 병에 들어 있는 감로수(甘露水)를 통해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정병인 것입니다. 처음 이 정병을 본 사람은 병 전체에 초록빛이 띄는 것을 보고 청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이 병의 재질인 청동이 부식되어 나타난 빛깔이지요.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나타난 부식이 병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몸체에는 어깨와 굽 위에 여의두무늬를 돌리고, 그 사이에 갈대가 우거지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이 있으며, 그 주위로 오리를 비롯하여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는 아름다운풍경이 펼쳐집니다. 또 먼 산에는 철새가 줄지어 나르고 물에는 사공이 조각배를 젓고 있습니다. 그밖에 주둥이는 뚜껑이 있고, 뚜껑 윗면은 당초무늬로 투각(透刻, 구멍을 뚫어 무늬를 드러내는 것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임금은 모두 27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적 암투 끝에 암살되었다고 의심되는 임금은 고종과 정조를 비롯하여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 선조, 효종, 현종, 경종 등 모두 10명에 이릅니다. 게다가 임금이 아닌 세자들도 아버지 인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의심되는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효장세자, 문효세자, 효명세자 등 4명이나 됩니다. 하지만 이들도 학계에서 인정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단종이나 고종, 소현세자를 빼면 정황증거조차도 대부분 없다고 하지요. 가장 분명한 독살로 보는 것은 고종의 죽음입니다. 1907년 7월 20일 헤이그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고종은 순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됩니다.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고종은 망명을 꾀했지만 1919년 1월 21일 새벽 6시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망명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고종이 죽은 뒤 그 주검은 처참했는데,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 했고, 이가 빠지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고 하지요. 또한 검은 줄이 목에서 배까지 30cm가량 나 있었다고 했습니다. 고종이 죽은 것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누구나 태어난 출생연도의 십이지(十二支)를 띠로 구분하여 자신만의 ‘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올 4350년(2017) 정유년(丁酉年)은 육십갑자에서 정유(丁酉)년에 해당하는데, 10천간(天干, 갑을병정무시경신임계)에서 붉은색을 의미하는 정(丁) 자와 12지지(地支,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가운데 닭을 뜻하는 유(酉) 자가 만나는 붉은 닭의 해입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듣고 날이 밝아옴을 알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판단하고 이를 세상에 알려내는 슬기로움을 가진 닭은 옛 사람들의 시계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닭이 홰를 치는 소리는 귀신을 쫒는 영험함이 있다고 믿었지요. 또 닭의 홰치는 소리는 새벽을 밝혀 빛을 되찾게 하기에 닭은 상서롭고 신비로운 길조로 통했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선조들은 새해 첫날에 닭 그림을 벽에 붙여 액이 물러나고 복이 오기를 비손하였다고 합니다. 또 닭의 머리 위에 달린 ‘볏’이 마치 장원급제했을 때 쓰는 관모(冠帽)와 비슷하고, 발음 또한 ‘볏’과 ‘벼슬’이 비슷하기 때문에 닭 그림은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선비들이 좋아했던 그림으로 손꼽히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광주박물관에 가면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 영산강 구릉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국보 제143호 “화순 대곡리 청동기일괄(靑銅器一括)”이 있습니다. 1971년 동네 배수로를 설치하다 나무관이 놓여 있는 토광묘(土壙墓)에서 함께 출토된 것들로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관 조각으로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과 출토 유물의 조합 관계로 보아 대체로 BC 3세기 후반경의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이때 출토된 유물 가운데 세형동검(청동검) 3점, 청동팔령두 2점, 청동쌍령구 2점, 청동손칼(청동삭구) 1점, 청동도끼(청동공부) 1점, 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 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청동팔령구는 8각형의 별모양으로 생겼는데, 각 모서리에 방울이 달려 있지요. 그 안에 청동구슬을 넣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것으로,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로 보이며, 방울 표면에는 고사리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청동쌍령구도 양끝에 방울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 안에 청동구슬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납니다. 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은 상태가 양호하며, 거울 뒷면에 기하학적인 무늬와 거울을 매달 때 사용하는 두 개의 끈이 달려 있습니다. 대곡리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7년 정유년 닭의 해가 밝았다. 지난 해 나라가 온통 어수선해 온 국민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 밝아온 새해는 지난해의 시름을 떨쳐 버리고, 힘찬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설날,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여 세배를 하고 성묘를 하며, 정을 다진다. 또 온 겨레는 “온보기”를 하기 위해 민족대이동을 하느라 길은 북새통이다. “온보기”라 한 것은 예전엔 만나기가 어렵던 친정어머니와 시집 간 딸이 명절 뒤에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반보기”에 견주어 지금은 중간이 아니라 친정 또는 고향에 가서 만나기에 온보기인 것이다. 설날의 말밑들 그러면 “설날”이란 말의 유래는 무엇일까? 먼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 ~ 1628년)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설날을 “달도일(怛忉日)”이라 했다. 곧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다. 그리고 '사리다',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는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본다. 또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말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의 큰 명절 설날이지요. 설날 음식 가운데 떡국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떡국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떡국은 집에서 가래떡을 만들어 끓여먹었는데 가래떡은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자루달린 떡메로 여러 번 쳐서 둥글고 길게 떡을 뽑아 만들었지요. 떡메로 여러 번 쳐대기 때문에 떡이 차져서 쫄깃 거렸지만 지금은 거의 떡국용 떡을 편의점에서 사다 끓이는 집이 많습니다. 가래떡이란 말의 유래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 유래 가운데 한 가지는 '가래'라는 낱말이 '떡이나 엿 따위를 둥글고 길게 늘려 만든 토막'이라는 뜻이 있는데 가래떡의 모양이 이와 같아서 가래떡이라 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밖에 농기구 '가래'에서 유래되었다는 것과 한 갈래 두 갈래 할 때의 갈래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가래떡은 떡국 말고도 떡볶이의 주재료이며, 떡꼬치로 해먹기도 하고, 간단하게 꿀이나 엿, 또는 간장이나 참기름에 찍어 먹기도 하고 살짝 구워서 먹기도 하며, 떡산적・떡찜 따위를 해먹기도 합니다. 풍어제에서는 용떡이라고 해서 가래떡을 굵고 길게 뽑아내어 고사를 지내기도 하지요. 요즘은 흰떡이 아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호남사람들은 대를 종이같이 다듬어서 청색과 홍색 등 여러 가지 물을 들여 옷상자 등으로 썼다.” 이는 이규경이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채상조(彩箱條)’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채상(彩箱)”은 얇게 가른 대오리를 노랑, 파랑, 붉은 빛으로 물들인 다음 아름다운 무늬가 나타도록 씨와 날을 결어내어 만든 상자를 말하지요. 또 이 채상을 만드는 공예 또는 이 공예 기능을 가진 장인을 채상장(彩箱匠)이라 하고 국가무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채상이 쓰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 공예품의 하나였지요. 채상은 처녀들이 시집갈 때 혼수품을 담거나 여인들의 반지그릇, 보석함 등으로 사용되었고 벼슬아치들이 궁중에서 당직을 설 때 입을 옷을 담아가는데도 쓰였다고 합니다. 채상을 만드는 기술은 대나무 껍질을 입으로 균등하게 떠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떠낸 대나무 껍질을 물에 불린 후 그것을 무릎에 대고 일일이 다듬어 정리하지요. 염색을 하고 나서 1∼5가닥씩 엇갈려 가며 엮습니다. 그런 다음 모서리와 테두리에 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돈돌날이 돈돌날이 돈돌날이요 모래 청산에 돈돌날이요 모래 청산에 돈돌날이요 돈돌날이 돈돌날이 돈돌날이요 시내 강변에 돈돌날이요 시내 강변에 돈돌날이요“ 위는 함경남도의 부녀자들이 바닷가나 강변 또는 산에 모여서 춤을 추고 놀면서 부르던 춤과 노래로 함경남도 지방무형문화재 제1호 “돈돌날이”입니다. 분포지는 신포시, 북청군, 신창군, 덕성군, 단청군을 비롯한 함경남도 일대와 갑산군, 풍산군 같은 양강도의 일부 지역이지요. 이 가운데 돈돌날이가 가장 활발하게 불린 대표적인 지역은 신포시, 북청군 같은 함남의 동해안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돈돌날이는 돈돌라리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돈돌은 돌고 돈다는 뜻이라고 하지요. 또 돌고 돈다는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인데 일제가 물러가고, 식민지가 된 조국도 해방되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풀이됩니다. 이 밖에 돈돌을 동틀로 이해하여 어둠이 가고 새날이 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풀이든 돈돌날이 놀이 속에는 함경남도 민중들의 항일의식이 들어있음이 분명하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올해 정유년은 우리 겨레는 물론 일본인들의 가슴에까지 새겨진 시인 윤동주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따라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대표되는 그 윤동주 시인을 새롭게 조명하는 행사가 한 해 동안 많이 열릴 예정이다. 그 첫 행사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1월 23일 늦은 3시 한국문인협회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 공동 주최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본격적으로 발제를 하기 전 행사로 시 표현예술가 김서령 씨가 나와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십자가(十字架)’ 등의 시를 낭송과 노래, 춤으로 아름답게 표현하여 청중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이날 학술대회는 류양선 가톨릭대 명예교수의 “윤동주 시에 나타난 종말론적 희망”, 송희복 문학평론가의 “윤동주에 관한 비평적 관점의 확대와 심화”, 이승하 중앙대 교수의 “윤동주의 동시, 그 역사의식과 민족정신”, 소강석 시인의 “저항적 시대예언자로서의 윤동주” 등의 발제가 있었다. 학술회의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이승하 교수의 동시 얘기였다. 이 교수는 “그동안 윤동주의 시로 알려진 것으로는 125편에 이른다. 그 가운데 동시로 볼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