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기도박물관(관장 전보삼)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조선시대의 옷과 무늬를 주제로 특별전 《의(衣)ㆍ문(紋)의 조선》을 새해 2017년 3월 5일까지 열고 있다. 경기도박물관은 도내의 명가들에서 기증받은 유물과 출토복식유물 1,400여 점에 대한 보존처리와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옷문화에 대한 생생한 자료를 확보하였고, 다양한 전시를 통해 도민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해 왔다. 〈조선의 옷매무새〉 시리즈 6번째 작업인 이번 전시는 옷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의(衣)’ 와 무늬를 담은 ‘조선의 문(紋)’으로 우리 옷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조선의 의(衣)는 모두 5부로 구성된다. 1부는 나라의 큰 행사 때 입는 관리의 최고 관복인 『의례용 예복, 홍색 조복』, 2부는 왕과의 중요 회의, 사신을 접대하는 등 특별한 날의 관복인 『공무용 예복, 흑색 단령』, 3부는 학문을 깊이 연구하던 유학자의 상징적 의복인 『유학자의 예복, 백색 심의』, 그리고 4부는 사대부가 여성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좋은 의복인 『여성의 예복, 녹색 원삼』이 포함된다. 5부 『남녀 덧옷, 배자』에서는 예복과 달리 자유롭게 멋을 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6월 21일 문화재청은 ‘의병장 유인석 심의’를 등록문화재 제661호로 등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의병장 유인석 심의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유인석(1842∼1915) 선생이 평소 입었던 옷으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입니다. 염색하지 않은 백세포(白細布)로 만들어졌으며 목 부분의 깃이 네모났고,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둘렀습니다. 심의는 철릭(관복의 하나로 웃옷과 아래옷을 따로 만들어 허리에서 이어붙인 옷)과 난삼(조선시대에 유생, 생원, 진사 등이 입던 예복)ㆍ학창의(선비가 집에 거처하면서 한가롭게 입는 옷)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요. 아래 치마[상(裳)] 부분은 12폭으로 지어서 웃옷의 허리와 연결시켜 여유를 보여준 것이 특징입니다. 심의를 입을 때는 비단으로 만든 검은빛 복건을 쓰고 띠를 매었는데 심의의 흰색과 가장자리의 검은색, 복건의 검은 색이 조화를 이루어 학자다운 고귀한 기품을 풍기는 옷이지요. 각 부분의 형태에는 철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데 웃옷과 아래옷을 따로 마름질[재단]하는 것은 우주의 근본이 건곤(乾坤)에 있음을 상징합니다. 곧 건은 위에, 곤은 아래에 있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어기본법 제14조 제1호에 보면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사 경향신문이 낸 광고는 그 규정을 깡그리 짓밟고 있습니다. 한글이 아닌 영어를 대문짝하게 써서 광고한 것입니다. 물론 언론사는 사기업이니까 이 규정에 얽매이는 것은 아닙니다만 한국방송공사(KBS), 한국교육방송공사(EBS)도 공공기관으로 보고 언론이 공공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이에 준한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 광고는 이름부터 “SEOUL CHRISTMAS –Festival 2016-”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말로 “서울 성탄절 큰잔치”라고 하면 안 되나요? 그리고 굳이 영어를 써야 한다면 국어기본법 규정대로 “서울 성탄절 큰잔치(SEOUL CHRISTMAS –Festival 2016)”처럼 한글로 먼저 쓰고 괄호 안에 영어를 써야 할 일이지요. 전 연변대학교 총장이 “만주족은 말[馬, 言]에서 내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라고 한 말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 광고 바로 옆에는 한국불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 도피안사(到彼岸寺)에는 흔한 금동불이 아닌 철불이 있습니다. 국보 제63호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바로 그것이지요. 도피안사는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도피안사를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하지요. 이 철불은 얼굴이 인자하고 온화한 느낌이며, 몸에 견주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입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남북국시대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한다는 평가를 받는데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지요. 절에 모신 불상들은 그 재료에 따라 화강암을 쓴 석불(石佛), 구리로 주물한 뒤 도금한 금동불(金銅佛), 쇠로 만든 철불(鐵佛), 나무로 만든 목불(木佛), 흙으로 빚어 굽거나 자연 건조시킨 소조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닐리리타령을 구음으로 부른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듣던 경기민요 닐리리야도 아니고 비장한 남요풍의 구음도 아니다. 서도풍의 구음으로 장구와 북 타령장단에 얹어 피리의 배음으로 아주 흥겨운 소리다. 부부국악인으로 유명한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4호 삼현육각 보유자 최경만 명인이 주고받는 구음과 피리 소리의 조화는 극히 일품이다. 어제(12월 22일) 밤 8시 서울 대치동 한국문화의집(코우스)에서는 서도소리연희극보존회 주최, (사)향두계놀이보존회와 국악공연 전문기획사 정아트엔터테인먼트(주) 주관으로 서도소리연희극보존회 정기연주회 “북녘땅에 두고 온 노래”가 공연됐다. 공연장은 2층까지 청중들로 가득 찼다. 유지숙 명창은 서도소리 준무형문화재지만 익숙한 소리에만 안주하는 그런 소리꾼이 아니다. 사라져가는 서도소리를 찾아 확인하고 다듬어내고 전승하는 일에 몸을 바친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 서도소리극 향두계놀이를 자비를 들여 발굴하고 보존해오는 일을 하며, 몇 년 전에는 전국의 아리랑을 찾아 다듬고 음반으로 내는 일에도 열성을 보였다. 역시 공연도 그럼 냄새가 물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가면 이제는 약간의 흔적만 남긴 교동읍성이 있습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두었고, 각 문에는 망을 보기 위해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하였지요. 조선 인조 7년(1629)에 처음 쌓았으며, 영조 29년(1753)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성문을 다시 세웠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3문이 모두 남아있지 않는데 동문과 북문은 언제 유실되었는지 잘 모르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져 석축 일부와 반원 형태의 홍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동읍성 부근은 조선시대 여러 왕족이 귀양 와 살다가 쓸쓸히 삶을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지요.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쫓겨난 임금들을 비롯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인조의 5남 숭선군,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등이 이곳에서 유배됐었다고 합니다. 당파싸움에서 정치인들은 도성에서 먼 해남이나 제주도 같은 곳으로 유배 됐던 반면에 왕족은 도성에서 가까우면서도 주변 바다의 조류가 급하고 접근이 어려운 교동도에 유배하면 감시하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혹시 여러분은 요즘 회자되는 이재명 성남시장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를 아십니까?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23일 치 기사에는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작일(22일) 상오 11시 종현(鍾峴) 천주교당 내에서 설행한 비리시(比利時, 벨기에) 황제폐하 추도식에 참열(參列)하였다가 (중간 줄임) 이완용씨의 요부(腰部, 허리)를 자(刺)하매(칼로 찌르매) 씨가 도피하려 할 때에 배후로서 우(又) 기(其) 견부(어깨)를 자하야(찔러) 3개소에 중상을 부(負)하엿고(입히고) 해(該, 그) 자객은 평양인 이재명인데 현장에서 등시(登時) 포박되엿다더라.”라는 기사가 보입니다. 이재명 의사는 원래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추진하다가 어려워지자 1909년 11월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주창하는 성명서를 공포하면서 이른바 ‘합방운동’에 착수하는 것을 보고 대신 을사5적 처단을 추진합니다. 그러던 중, 이완용 등 역적들이 12월 22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전 11시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매국노 이완용을 공격한 것입니다. 의사는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자 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스물두째 절기인 동지(冬至)로 해가 적도 아래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 자리에 있을 때여서 한해 가운데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옛날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였다. 해가 부활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처럼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흘레(교미, 交尾)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부른다. 동지부터 섣달그믐까지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버선을 지어 바치려고 일손이 바빠지는데 이를 ‘동지헌말(冬至獻襪)’ 또는 풍년을 빌고 다산을 드린다는 뜻인 ‘풍정(豊呈)’이라고도 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동지헌말에 대해 새 버선 신고 이 날부터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밟고 살면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장수를 비는 뜻이라고 했다. 동짓날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연못이 얼고 그 얼음 모양이 쟁기로 밭을 갈아놓은 것처럼 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진주 국립경상대학교 도서관에는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47-8호 “준호구(准戶口)”가 있습니다. 이 준호구는 오늘날의 가족관계등록부(2008년 이전에는 호적부)에 해당하며, 이 문서는 소송을 걸거나 새로운 호적을 만들 때, 과거에 응시할 때, 직역(나라에 지는 군역 등)을 확인할 때, 도망간 노비를 잡아올 때 등에 신청하여 발급받았다고 하지요. 또 관련된 것으로 호구단자(戶口單子)도 있었는데 이는 3년마다 개인이 적어 관에 제출하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호적을 새로 정리합니다. 조선시대의 준호구 양식은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규정된 것이 1890년대까지 쓰였습니다. 먼저 발급날짜를 밝히고 ‘본 관서는 몇 년에 작성된 호구 장적을 살핌. 어느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직역의 누구, 나이 및 본관, 아버지ㆍ할아버지ㆍ증조할아버지ㆍ외할아버지(사조-四祖) 등의 관직ㆍ직역과 이름, 처의 성씨와 나이와 본관, 처의 사조의 이름과 관직ㆍ직역ㆍ어머니)ㆍ동생ㆍ자녀ㆍ리ㆍ사위 등 동거 식구의 이름과 나이, 노비의 이름과 나이 등을 대조해 발급하는 것. 발급 관서, 책임자, 담당자’라는 내용을 쓰고 여러 개의 관서인을 찍고 해당 관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는 12월 22일(목) 저녁 8시에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 코우스에서 서도소리연희극보존회 주최, (사)향두계놀이보존회와 국악공연 전문기획사 정아트엔터테인먼트(주) 주관으로 서도소리연희극보존회 정기연주회 ‘북녘땅에 두고 온 노래’가 전석 초대로 공연된다. 오늘날 북한 영토인 한반도 북서 지역의 전통적인 노래들을 통칭하는 서도소리는 2만 8,000여 명 새터민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담은 노래이며 더불어 삶에 근원을 둔 역동적인 노래들이다. 순박하고도 정겨운 북녘의 토속민요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 노래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연마해 온 서도소리만큼이나 매력적인 노래라고 말하는 유지숙 명창의 소리에 다시 다듬어진 북녘의 소리, 함경남도 단천지역에서 그물에 걸린 명태를 벗겨내며 부르는 ‘고기 벗기는 소리’, 평안북도 철산지역에서 밭에 씨앗을 뿌린 뒤 흙을 덮으며 부르는 ‘밟아소리’ 등 북한의 대표적 노동요들이 담겼다. 또 평안남도 평원지역에서 주검을 묻으며 부르던 ‘무덤 다지는 소리’와 이밖에도 서도민요를 대표하는 ‘수심가’와 함경북도 회령지역의 민요인 ‘궁심동 아리랑’도 들을 수 있다. 이번 공연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