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가녀린 여자에게 수갑을 채우지 마라 / 수갑 들고 군화발로 잡으러 온 순사 호통 치며 물리친 여장부 / 동학군 앞장선 남편 / 신혼 3일 만에 왜놈 칼에 전사한 뒤 나선 독립투사 길 (중간줄임) / 이화학당 어린 유관순 함께 잡혀 / 먹던 밥 덜어주며 삼월 하늘 우러러 보살핀 마음(중간줄임) / 여든 해 삶 마치고 돌아가던 날 / 내리던 희고 고운 눈 순결하여라.“ - 이윤옥 시, 개성 3・1 만세운동을 쥐고 흔든 투사 ‘어윤희’ - 오늘은 독립투사 어윤희 (魚允姬, 1877.6.30~1961.11.18) 선생이 생을 마감한 날입니다. 선생은 신간회와 근우회 개성지회 창립의 주역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로 충북 충주군 소태면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은 16살에 혼인을 하였지만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나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2년 뒤엔 아버지마저 죽자 개성으로 떠납니다. 개성에서 43살 되던 해에 3월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어윤희 선생은 독립선언서 2천 장을 개성 읍내 거리에서 뿌리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섭니다. 이 일로 선생은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갇히게 됩니다. 마침 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융복합예술단체 ‘랑코리아’(예술총감독 주세페 김)가 11월 16일 저녁 7시 30분 경기도 용인 포은아트홀에서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K 팝페라 힐링콘서트’를 열었다. 용인문화재단과 공동 주최로 열린 공연은 먼저 주세페 김이 작곡한 상평통보와 이윤옥 시에 주세페 김이 곡을 붙인 “아들아 아들아”(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노래)로 장중하고 가슴 찡한 민족노래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이해인 수녀의 ‘풀꽃의 노래’, 구상 시인의 ‘네 마음에다’ 등을 물푸레소년소녀합창단・새빛참꿈힘합창단과 함께 불렀다. 이밖에 영화음악・오페라・클래식 그리고 라틴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현대무용 등이 주세페 김(김동규) 예술총감독의 작곡・편곡・지휘로 펼쳐졌다. 그리고 주세페 김 예술총감독의 부인 구미꼬 김은 힘이 있으면서도 아련한 음색으로 매력적인 노래를한껏 선사했다. 이날 반주를 한 “랑코리아 솔리스트앙상블”은 작은 규모였지만 큰 연주단의 연주가 무색할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연주였다는 평을 받았으며, 주세페 김과 구미꼬 김의 노래를 받쳐준 5명의 보컬리스트들도 큰 손뼉을 받았다. 용인포은아트홀 1,244석을 거의 메운 청중의 열기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 곧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이 당간과 당간지주가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도 있는데 이것은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지요.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세웠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습니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었지요.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이었다고 합니다. 이 당간은 세운 때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지요. 전해오는 얘기로는 예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왕세자입학도는 효명세자의 입학식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효명세자는 1817년 3월 11일, 아홉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치렀습니다. 이날 행사의 생생한 모습이 여섯 장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첫 번째 장면은 효명세자가 창덕궁을 나와 성균관으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맨 앞 의장 행렬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행사였는데 여기에 앉아 있어야할 가마에 왕세자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관련된 행사를 그릴 때 임금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왕세자의 모습도 그리지 않은 것이지요. 이날 효명세자는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와 여러 성인들의 신위에 술잔을 올리며 예를 갖춘 다음 수업 장소인 명륜당 문 앞에서 스승에게 수업을 청합니다. 허락을 받은 효명세자는 명륜당 안으로 들어가 감사의 뜻으로 스승에게 예물을 드립니다. 아무리 왕세자라도 가르침을 구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스승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다섯째 그림을 보면 세자가 스승으로부터 수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스승은 서안 위에 한 권의 책을 놓고 있지만 제자인 세자는 서안 없이 바닥에 책을 놓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 ~ 1759)은 우리 산천을 가장 우리답게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을 창안해 그린 진경산수화의 문을 연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그저 실경산수화로 부르지 않고 특별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고 합니다. 그 정선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참 많이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것은 금강전도(金剛全圖)처럼 금강산의 모든 모습을 한 장에 압축해서 그린 그림과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가운데 장안사(長安寺)처럼 한 장소를 두드러지게 그린 그림입니다. 그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가운데 장안사는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에 자리 잡은 절 장안사를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의 특징으로 보면 반원을 그리고 있는 무지개다리 곧 홍예교(虹霓橋)의 하나인 만천교(萬川橋)가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홍예교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다리라고 하지요. 그리고 만천교 옆으로는 석가봉(釋迦峯), 관음봉(觀音峯), 지장봉(地藏峯) 같은 봉우리들이 유독 하얗게 그리고 크게 그려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금강의 시냇물들이 하나로 모아져 나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 우리나라 과학발달의 전성기였던 세종시대의 문신의 한 명으로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흠지(鄭欽之)・김담(金淡)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서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펴냈습니다. 그는 월식을 보고 월식이 진행될 때 보이는 그림자가 바로 지구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가 둥글다는 것을 관찰하여 “지구는 둥글고 해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지요. 당시의 중국이나 조선의 우주관은 천원지방(天圓地方)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였기 때문에 이런 그의 주장을 믿지 못하자 이순지는 월식이 언제 발생해서 언제 끝나는지를 계산했습니다. 그의 그런 계산이 맞아 떨어져 같은 시각 월식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다른 문신들도 그의 주장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순지의 이러한 주장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보다 100년 빠른 주장이었다고 하지요. 이순지는 또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계산하여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세종대왕이 중국에서 들여 온 역서(曆書)를 통해 이순지의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08년 오늘은 소설가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 원각사를 세워 자신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처음 상연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인직이 《혈(血)의 누(淚, 1906)》, 《귀(鬼)의 성(聲, 1908)》, 《치악산(雉岳山, 1908)》, 《은세계(銀世界, 1913)》 따위 신소설을 쓴 작가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특히, 《혈(血)의 누(淚)》는 첫 장편소설로서 본격적인 신소설의 효시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배웠지요. 그러나 이윤옥 시인의 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2011≫에는 “《혈(血)의 누(淚)》 작가 이인직이 일본 유학시절 스승인 미도리 교수에게 찾아가서 일본과 조선의 병합을 부추긴 일”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 이인직은 한말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리는 친일파 이완용의 비서로 을사늑약의 막후 조정자로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최근 저는 이 수상(이완용을 말함)을 만나서 빨리 거취의 각오를 결정하시도록 근고(謹告, 삼가 아룀) 해보았습니다. 2천 만 조선 사람과 함께 쓰러질 것인가, 6천 만 일본 사람과 함께 나아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북 김제시에 있는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421호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南原實相寺藥水庵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이 있습니다.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나무에 불상을 새겨서 만든 탱화인데, 탱화는 대개 옷감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화를 말하지만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며 ‘목각불탱(木刻佛幀)’이라고도 합니다. 또 정조 6년(1782)에 조각한 것으로 연대가 확실하고 원만한 불상들의 모습과 배치구조, 정교한 세부조각 등은 조선 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가로 183㎝, 세로 181㎝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현재 전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 탱화 가운데 가장 간략한 배치구도를 가지고 있지요. 화면은 크게 위 아랫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윗부분에는 석가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월광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으로는 일광보살과 미륵보살이 자리 잡았습니다. 또 아랫부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보현보살과 세지보살을, 왼쪽으로는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이 있지요. 본존인 아미타불은 타원형의 광배를 가지고 있고 사자가 새겨진 대좌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나라는 온통 뒤숭숭하다. 연일 광화문광장에서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대통령 하야” 외침이 메아리가 된다. 그 와중에 청와대는 물론 검찰을 비롯한 법조계에까지 국민의 눈 흘김은 계속된다. 그런데 이런 난리 속에서 한 변호사의 북콘서트가 11월 8일 밤 7시에 서울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그동안 우리 우리문화신문에도 꾸준히 좋을 글을 써서 인기를 얻고 있는 양승국 변호사가 《중년에 떠나는 인문학 여행(디자인브레스)》이란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연 것이다. 흔히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경직되고 차가운 사람들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동안 양승국 변호사와 소통했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따뜻함을 느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건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이런 인문학여행을 꾸준히 떠나고 그러한 가운데서 사람과 자연 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껴안으려는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한 덕분이리라. 콘서트장에 들어서니 양승국 변호사가 책에 저자 서명을 해주기에 바쁘다. 행사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웠다. 그는 인사말을 한다.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을 하면서 여행은 기록만 남는다는 생각을 했고, 따라서 2003년부터 기록으로 남기기 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년에 낸 문제가 혹 다음해에 나오기도 하고, 서울에서 출제한 것이 혹 지방에서 나오기도 하며, 유생이 사사로이 지은 문제가 역시 국시(國試)에서도 나올 수 있어서 혹 남의 작품을 외웠다가 합격하는 자도 있고, (중간 줄임) 또 과장이 엄격하지 못해 무뢰배가 요란하게 밟고 다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갖은 수단으로 엿보고, 책을 끼고 들어와 답안을 대신 써주므로 공부하는 자가 이로 인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위는 《명종실록》 8년(1553) 6월 9일 치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광해군일기(중초본)》 5년(1613) 3월 16일 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전 도사(都事) 전욱(全頊)은 근래 충홍우도(忠洪右道) 감시 초시관(監試初試官)으로서 본 고을의 친지 30, 40명을 사사로이 이끌고 와 과거에 합격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전 강릉 부사 박경업(朴慶業)도 강원도 시관으로서 시험 응시자 30여 명의 답안지 겉봉에다 ‘삼가 봉한다.[謹封]’고 손수 써서 알아 볼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초장(初場) 시험에서 합격된 사람이 무려 17명이나 된데다가 응시한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