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두째인 대서(大署)입니다. 이때는 대개 중복(中伏) 무렵으로, 장마가 끝나고 “염소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더위가 가장 심하지요. “쇠를 녹일 무더위에 땀이 마르지 않으니”라는 옥담 선생 시 가운데 나오는 구절은 이즈음의 무더위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데 이런 불볕더위, 찜통더위에도 농촌에서는 논밭의 김매기, 논밭두렁의 잡초베기, 퇴비장만 같은 농작물 관리에 쉴 틈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 겨레는 더위가 극성인 때 혀끝에서는 당기는 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뜨거운 음식으로 몸을 보양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슬기로움인데 더운 여름철의 더운 음식은 몸 안의 장기를 보호해준다고 합니다. 이 이열치열의 먹거리로는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실제로는 잉어와 오골계)으로 끓인 “용봉탕”, 검정깨로 만든 깻국 탕인 “임자수탕” 그리고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 따위가 있지요. 그리고 옷을 훌훌 벗어던질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소나무 그늘이 진 정자에서 솔바람 맞으며 시를 읊는 것으로 더위를 피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건강에 해롭다는 에어컨 바람으로 여름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러분은 조선 5대궁의 하나인 경희궁에 가보셨나요? 경희궁(慶熙宮)은 광해군 때 창건한 궁궐로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렸지만 영조 때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그 경희궁의 정전은 숭정전(崇政殿)입니다. 숭정전은 경종, 정조, 헌종의 즉위식이 열렸고 비운의 소현세자가 혼례를 치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경희궁은 일제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궁궐에 동물원을 만든 창경궁은 물론 총독부를 지어 훼손한 경복궁처럼 모든 궁궐이 피해를 봤지만 특히 경희궁은 거의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정문인 흥화문은 이등박문을 기리는 절 박문사 정문이 되었다가 신라호텔에서 영빈관 정문으로 쓰였습니다. 그 뒤 경희궁 복원 사업 과정에서 경희궁터로 옮겨왔지요. 또 정전 숭정전은 일제가 중학교로 쓰다가 조계사로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동국대 안에 정각원이란 이름의 법당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신 경희궁 터에 있는 숭정전은 원래의 건물이 아니고 1980년 경희궁 복원 사업 과정에서 새롭게 지은 것이지요. 이렇게 일제는 조선을 망가뜨리고 식민지로 가두기 위해 궁궐의 훼손을 철저히 진행했는데 경희궁은 정말 비운의 궁궐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송서란 한 마디로 글 읽기다. 글 읽는 사람을 선비라 했고, 그래서 선비란 글을 읽어야 행세를 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책속에 담겨있는 진리를 터득하고 세상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참된 길을 찾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천하의 일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서 변화하는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응용능력을 갖추어왔던 사람들이었는데, 책을 읽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진정한 선비 그들은 이제 만나기 쉽지 않다. 그 결과 무분별한 서구문화가 범람해도 전통사회의 문화를 되살리고 민족의 삶과 미래를 생각할 인물들을 만나보기 어렵게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는 지난해 12월 열린 전국 국악학학술대회 송서 율창의 확산방안에서 대회 주최자인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 회장(단국대 명예교수)이 한 말입니다. 또 이날 청중으로 참석한 한 초등학교 교장은 “요즘 초등학생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에게 소리 내서 책을 읽게 하면 수업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고 발표도 어렵지 않게 하는 것을 물론 정신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초등학교의 경우 송서율창을 가르치는 것은 절대 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69년 울산광역시 신정동 학성이씨(鶴城李氏) 일가 무덤에서 1969년 출토된 중요민속문화재 제37호 유물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조선시대 한 문중의 남녀 일상옷입니다. 이 유물은 이천기(李天機: 1610∼1666) 무덤, 그의 부인 흥려박씨(興麗朴氏)의 무덤,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 이지영(李之英)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平海黃氏) 부부 합장묘에서 출토된 10점의 유물들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유물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광다회대(廣多繪帶)”와 “솜소모자(小帽子)”지요. “광다회대(廣多繪帶)”는 ‘광다회(廣多繪)’라고도 불렸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실띠[絲帶]로 관복(官服)이나 사복(私服)에 쓴 넙적한 형태의 띠입니다. 이천기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출토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나 1997년 보수한 뒤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띠의 너비는 3㎝이며 본래 길이는 알 수 없으나 보수 뒤 양 끝에 달린 10㎝ 길이의 술을 포함하여 221㎝가 되었지요. 솜소모자(小帽子)는 이천기의 무덤서 2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검은 파랑빛 고운 면포와 명주로 만들어진 것인데 머리 부분에는 세모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밀과(油蜜菓)와 사화봉(絲花鳳, 금실로 꽃과 봉황을 수놓은 비단)ㆍ금은저(金銀箸, 금은 젓가락)ㆍ채화초(彩花草, 비단이나 모시, 종이 따위로 만든 꽃)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 이외에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이는 《태조실록》 3년(1394) 6월 1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종합 법전으로 일컬어지는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기를 "헌수(獻壽, 환갑잔치 따위에서, 주인공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 혼인, 제향(祭享,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이외에 조과(造菓, 유밀과나 과자 따위)를 쓰는 사람은 곤장을 맞도록 규정한다."고 하였습니다. 토박이말로 “과즐(또는 과줄)” 곧 한과가 얼마나 유행했으면 나라에서 금하기까지 했을까요? 그런 정도였던 과즐은 인터넷에 “어릴 적에 설날이면 엄마가 과즐이란 과자를 사 오셔서먹곤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그 과즐이란 과자를 어디서 파는지 구할 수가 없네요."라는 질문이 올라올 정도로 잊혔습니다, 요즘 과즐 대신 “한과(韓菓)”라고 하는데 이는 한복, 한식처럼 서양의 과자와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지요. “과즐”은 유밀과, 약과, 정과, 다식, 숙실과 따위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청자 거북이모양 연적은 고려시대 비석의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머리가 달린 거북이 모양의 연적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삼국시대 신라 토기 주전자 가운데서도 볼 수 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 세련되게 발전한 듯합니다. 물을 쏟는 주둥이인 용머리는 입을 벌려 연 줄기를 물고 있으며 그 줄기는 등으로 뻗어 있지요. 거북의 등에 뚫린 물구멍은 둘레가 꽃잎 모양으로 싸여 있고 등 전체에 육각형 거북이 등껍질 무늬가 오목새김(음각)되어 있으며 거북이 등껍질 무늬 안에는 왕(王)자 모양의 무늬가 하나씩 새겨 있습니다. 또한 거북이 등껍질 무늬 가장자리에는 주름 무늬를 띄엄띄엄 반 돋을새김(반양각, 半陽刻)하였고, 용머리 눈 부위에는 검정빛 철사(鐵砂) 물감을 찍어 눈동자를 표현하였지요. 유약은 밝고 투명하며 금이 간 데가 없고 바탕흙은 매우 고와 고급스런 느낌을 줍니다. 이런 상형청자 연적은 거북이 모양 말고도 원숭이나 용, 오리, 해태, 개구리 따위 동물과 복숭아, 석류, 연꽃 따위 식물 그리고 팔괘무늬나 생황 모양을 본뜬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연적들은 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반에 많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쿄 국립박물관 3층에는 “오구라 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유물들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문화재를 약탈해갔는데 무려 1,100여점이나 되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재들입니다. 이 문화재들은 오구라 사후인 1982년 그의 아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견갑형 청동기, 금관 따위가 대표적이지요. 그런가 하면 앞 이름이 비슷한 “오쿠라 컬렉션”은 명치시대의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만든 것으로 테라우치 총독과 가까이 지내면서 부를 축적하여 조선의 문화재를 다량으로 약탈수집하여 일본 최초의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이란 개인 미술관을 만들었지요. “오쿠라 컬렉션”의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터석탑 따위가 있습니다. 오쿠라와 오구라를 비롯하여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된 무려 6만7천여 점의 문화재가 일본땅에서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화재들을 우리가 쉽게 되돌려 받을 수 없다는데 안타까움이 있지요. 바로 1954년에 프랑스ㆍ영국ㆍ미국ㆍ이탈리아 등이 주도하여 맺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악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아이돌 음악에만 온통 정신이 팔린 청소년들을 어찌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일이던가? 지난 7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상명대 서울캠퍼스 상명아트센터 대신홀에서는 서울 종로구(구청장 김영종) 주최, 서울전통문화예술진흥원(이사장 유창) 주관, 교육부・서울시교육청 후원으로 제16회 종로 전국 청소년 국악경연대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앙증맞은 소리로 판소리 한 대목을 부르고, 조그만 손으로 해금을 연주하며, 어른 못지않게 열두발상모를 휘날리는 아이들. 감탄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대회는 시작 전부터 로비에 돗자리를 깔고 연습하는 청소년들로 북적였다. 경연대회는 모두 201팀이 참가하여 열띤 경연을 벌이는 가운데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보유자이며 (사)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이사장인 임정란 명창을 비롯하여 쟁쟁한 명사들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경연이 끝나면 채점표를 바로 정리하여 알림판에 붙이고, 직접 스승과 8촌 이내 친인척 심사회피 제도를 두는 등 공정한 심사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입상자는 종합대상 초등부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김말봉 시, 금수현 곡의 가곡 “그네”의 가사입니다. 여기서 “세모시”는 “올이 가늘고 고운 모시”를 일컫지요. 이제 더위가 한창입니다. 이렇게 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우리 겨레는 모시옷을 입었습니다. 모시는 모시풀을 껍질을 벗겨 재료로 하는데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굿 만들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표백 따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아름다운 모시 옷감이 탄생됩니다. 모시는 정성을 쏟아야 짤 수 있기에 밤낮 쉬지 않고 석 달을 일해야 한 필(약 21m)이 나온다고 하며, 또 모시는 계속 침을 발라가며 입이 부르트고 피가 나면서까지 쪼개고 또 쪼개야 하기에 한 필 만드는데 침이 석 되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모시는 여인네들의 정성이 밴 옷감입니다. 그 가운데 모시로 가장 유명한 곳은 충남 한산인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 擇里志》 북거총론편에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과 한산의 모시밭, 안동과 예안의 왕골논"이라는 구절이 있을 만큼 예로부터 유명하였습니다. 이 한산모시 짜기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19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말“다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아니하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황남대총을 발굴하기에 앞서 시험 발굴한 지름 47m, 높이 12.7m의 천마총에는 깜짝 놀랄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광복 이후 처음 출토된 금관은 물론 말다래를 비롯하여 무려 11,526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유물 가운데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만도 11점에 이르며, 금관 말고도 화려한 금빛 문화재는 금제관모, 금제 새 모양과 관 꾸미개, 금제 나비 모양 관 꾸미개, 금허리띠와 드리개 따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주인의 머리맡에 있었던 껴묻거리(부장품) 궤(크기 1.8m×1.0m)에도 온갖 보물이 들어 있었지요. 그 궤의 맨 밑에는 큰 철솥과 온갖 토기들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여러 가지 독특한 모양의 칠기류, 유리와 금동ㆍ은ㆍ청동으로 만든 귀한 그릇들, 장식마구 등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천마무늬 말다래도 이 부장품 궤 안에서 발견된 것이지요. “천마(天馬)”는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흰색 말인데 단순한 가축이 아닌 상상의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