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식화인 책거리그림[冊架圖]을 잘 그리는 으뜸화가로 알려진 이형록(李亨祿, ? ~ 1808)은 조선 말기의 도화서 화원 소속으로 민화풍의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그의 가계를 보면, 증조부인 이성린으로부터 조부인 이종현 그리고 아버지인 이윤민, 아들인 이재기의 6대에 걸쳐 16명의 화원을 배출한 쟁쟁한 집안입니다. 이형록은 이응록(李應祿) 또는 이택균(李宅均)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는데 이응록 이름으로 그린 책가도 병풍이 샌프란시스코대학에 소장되어있으며 이택균 이름의 책가도 병풍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책가도 외에도 그의 그림 가운데는 효설행려도(曉雪行旅圖)가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 필치나 나무 그리는 법, 인물묘사법 따위에서 김홍도(金弘道)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형록의 이름난 책가도 병풍 가운데 4점은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개인소장의 책가도 화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침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현대화랑과 공동으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문자도(文字圖)책거리(冊巨里)를 6월 11일부터 8월 28일까지 열고 있지요. 전시회는 이형록의 책가도 병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39호 “고운묘 출토유물(高雲墓 出土遺物)”이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1986년 9월 문중에서 무덤을 옮기다가 발견되었는데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고운(高雲)의 무덤에서 출토된 옷과 유물들입니다. 고운(1479∼1530)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고경명의 할아버지로 조선 중종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가 중종 25년(1530)에 죽었습니다. ▲ 고운묘 출토 "명주겹철릭"(문화재청 제공) 유물들 가운데 옷들을 보면 포(袍)의 일종으로 옷깃이 둥근형태의 옷인 단령 1점, 옷깃이 곧은 형태의 옷인 직령 2점, 웃옷에 치마가 연결된 형태의 옷인 철릭 6점, 직령과 비슷하나 소매가 짧은 형태의 옷인 답호 3점과 바지류 5점, 모자 2점, 버선 2점, 이불 2점 등이 있으며, 그밖에 만장(輓章), 기(旗), 널, 자리, 칠성판도 있었지요. 옷들은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초의 것으로 주검에 입힌 것들과 관의 빈 공간을 채워주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입니다. 무명, 모시, 명주를 재료로 한 이 옷들은 고운이 생전에 입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몇 년 전 성균관대학교 안대희 교수는 조선 정조 때 노비 정초부(鄭樵夫, 17141789)의《초부유고(樵夫遺稿)》를 발굴했습니다. 이 《초부유고》는 고려대도서관에 필사본 형태로 소장 중이며 여기에 한시 90수 정도가 실렸는데 정초부를 포함해 정약용ㆍ박제가ㆍ이학규 등 4명의 시를 골라 묶은 필사본 시집 《다산시령(茶山詩零)》이 들어있지요. ▲ 단원 김홍도의 그림 도선도에 정초부의 시가 들어 있다. 정초부(鄭樵夫)를 한자 그대로 풀어보면 정이라는 성씨를 가진 나무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 교수는 여춘영(呂春永. 17341812)의 문집 《헌적집(軒適集)》을 통해 여춘영의 노비였음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부유고》을 통해 이름이 이재(彛載)임도 알 수 있지요. 그는 비록 신분이 노비였지만 여춘영의 아버지는 그가 가진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아들의 글공부에 함께 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헌적집》에는 1789년 정초부가 죽자 여춘영이 그를 추억하며 지은 만시(輓詩,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 12수가 담겨있습니다. 그 시 가운데는 여춘영이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벗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또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완벽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 문자도・책거리전(展)기사를 3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첫 기사는 전체를 조망하는 기사이며, 2・3번째의 기사는 1부 책거리도와 2부 문자도로 나눠 작품을 감상할 예정입니다.독자들의 많은 관심 기대합니다. (편집자말) 문자도(文字圖), 책거리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문자도, 책거리 그림을 일부만 보았던 기자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들어 선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국문화의 진수라 할 만한 거대한 작품들이 빼곡했기 때문이다. 세로가 1m가 넘고 가로는 4m에 육박하는 대형 작품들이다. 예술의전당은 현대화랑과 공동으로 서예박물관 재개관기념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 문자도(文字圖)・책거리(冊巨里)를 6월 11일부터 8월 28일까지 서예박물관 전관에서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궁중화, 민화 중 문자도(文字圖)와 책거리(冊巨里) 등 58점이 1, 2부로 나누어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한국을 대표하는 국공립・사립 박물관과 화랑, 개인 등 20여 곳 비장의 걸작이 대규모로 한자리에서 공개되기는 사실상 처음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에게 청백리(淸白吏)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청백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라고 풀이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 유관(柳寬) 선생은집안에 비가 새자 일산(日傘)이 없는 집에서는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런 청백리를 조명하는 특별전이 경기도 실학박물관(관장 장덕호)에서 오는 9월 18일까지 열리고 있다. 경기 청백리를 주제로 한 기획 특별전은 조선중기 대표적인 청백리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의 문집인《청강선생집(淸江先生集)》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청백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청선고(淸選考)》 등 청백리 관련 유물이 다양하게 소개됐다. ▲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채제공, 이원익, 황희(왼쪽부터)의 초상화 ▲ 《청선고(淸選考)》, 조선 태조 원년(1392)부터 1906년까지의 관원 인명사전 표지와 내지, 권6 청백淸白조에 186명의 청백리 명단이 실려 있다. ▲ 《청강선생집(淸江先生集)》, 선조 대에 청백리에 녹선된 청강(淸江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조 개혁의 중심에 섰던 인물 번암 채제공의 초상을 보셨나요? 번암의 초상을 보면 살짝 곰보와 사팔뜨기 눈까지 숨기지 않고 그려 그가 못 생긴 인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의 죽기살기라 할 만큼 정확하게 그리는 사실주의의 극치 덕분입니다. 번암은 그렇게 못 생겼지만 28살에 사관인 예문관 한림(翰林)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뒤 죽기 한 해 전인 77살 때까지 은거한 7년을 빼고는 이조좌랑, 시헌부 지평, 한성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오랜 동안 신임을 얻고 크게 탄핵을 받지 않은 까닭은 아부를 잘 하거나 뇌물 공세 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청백리에 꼽힐 만큼 청렴했고, 사도세자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했을 만큼 올곧은 인물이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영조가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말했을까요? ▲ 65 살 때의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보물 제1477-2호)-왼쪽, 73 살 때의 채제공 초상 시복본(보물 제 1477-1호) 그는 특히 정조가 야심차게 추진한 화성(華城) 성역 공사에서 현륭원(顯隆園: 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단오, 단오는 단오절, 단옷날, 천중절(天中節), 포절(蒲節:창포의 날), 단양(端陽), 중오절(重午節, 重五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수릿날이라고 합니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이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하지요. 수릿날은 조선 후기에 펴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이 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또 수리란 옛말에서 으뜸, 신(神)의 뜻으로 쓰여 '신의 날', '으뜸 날'이란 뜻에서 수릿날이라고 불렀습니다. ▲ 수릿날의 시절음식 수릿떡(남산골한옥마을 제공) 이날 부녀자들은 '단오장(端午粧:단오날의 화장)'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災厄)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냈지요. 또 단옷날 새벽 상추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남자들은 단옷날 창포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귀신을 물리친다'는 믿음을 가졌었지요. 단옷날은 양수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의 명절 단오입니다. 단오에 즐기는 대표적인 민속놀이에는 씨름이 있는데 4세기 무렵으로 추측되는 고구려 고분 각저총(角抵塚) 주실(主室) 석벽에 두 사람이 맞붙어서 씨름하는 모습의 그림이 보여 우리 겨레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즐겨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에,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며, 김홍도의 풍속도에 씨름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즐겼을 것입니다. 씨름은 원래 '왼씨름', '오른씨름', '띠씨름'이 있었습니다. 오른씨름(바른씨름)은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쥐고 왼손으로 상대방의 샅바를 잡고하며, 경기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주로 했지요. 손잡는 것이 반대인 것을 왼씨름이라고 하는데 이는 함경, 평안, 황해, 경상, 강원도 등에서 했고, 띠씨름은 허리에다 띠를 매어 그것을 잡고 하는 씨름인데 '허리씨름'또는 '통씨름'으로도 불렀으며, 주로 충청도에서 했습니다. 이렇게 따로 치르던 씨름은 1931년 제2회 전 조선 씨름 대회부터 〈왼씨름〉 한 가지로 통일되어 현재 〈대한씨름협회〉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연변 소설가 류원무 선생의 책 《연변취담》에 보면 일제강점기 우리 겨레가 살며,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부 간도(間島) 용정촌(龍井村) 마을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에 따르면 처음 조선인 마을이 이루어진 때는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이재민들이 옮겨와 살았기 시작한 1877년이라고 하지요. 그 뒤 1886년 봄 정준이라고 하는 조선 젊은이가 옛 우물을 발견했는데 물은 맑고 맛이 좋았다고합니다. ▲ 용두레,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그런데 이 우물이 깊어서 룡드레(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데 쓰는 기구인 용두레의 북쪽 사투리)를 세우고 룡드레로 물을 길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룡드레촌으로 되었는데 학식께나 있다는 사람들이 상의하여 룡드레의 첫 글자인 룡(龍) 자에 우물 정(井) 자를 붙여 용정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34년 리기섭이라는 사람이 룡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는 빗돌을 세워 후세에 전해졌다고 하지요. 이 용정촌 이름의 유래가 된 룡드레 곧 용두레는 물이 많고 무넘이(봇물을 대기 위하여 만든 둑)가 높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강가 밭 가운데는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우뚝 선 자태가 몹시도 늠름한 국보 제187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英陽 山海里 五層模塼石塔)이 있습니다. 이 탑은 5층으로 높이는 11m 가량 됩니다. 석탑 주변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라고 짐작하지만, 아직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요. 탑은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두었고,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습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남북국시대(발해ㆍ신라)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걸작이지요. ▲ 자태가 몹시도 늠름한 국보 제187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英陽 山海里 五層模塼石塔)(문화재청 제공) 모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