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장도(粧刀)는 몸에 지니는 조그마한 칼로서 남녀 구별 없이 호신용 또는 꾸미개로 썼는데 이를 만드는 사람을 장도장(粧刀匠)이라합니다. 장도의 종류는 칼자루와 칼집의 종류에 따라서 은(銀)장도, 백옥(白玉)장도, 죽(竹)장도, 먹감장도, 오동(烏銅)장도, 대모(玳瑁)장도, 상아(象牙)장도 따위가 있고, 형태로는 원통형,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따위가 있습니다. 장도는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을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을 낭도(囊刀)라 하지요. ▲ 완성된 장도(문화재청 제공) "명나라 관제(官制)를 참작컨대 군현(郡縣)에서 조칙(詔勅,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글)을 맞이하는 의식과 배표(拜表, wh선시대 임금이 중국의 외교문서를 받는 일)할 때나, 본국 사신이 칙(勅, 임금의 문서)을 가지고 온 것을 맞이하는 의장(儀仗)에 황양산(黃陽, 의장으로 쓰는 누런 양산)이 하나, 황룡선(黃龍扇)ㆍ홍룡선(紅龍扇)이 각각 둘, 황개(黃蓋)가 둘, 금은횡조(金銀橫爪)ㆍ금은입조(金銀立爪)ㆍ금은부월(큰도끼와 작은도끼)ㆍ금은장도(金銀粧刀)가 각각 하나, 영자기(令字旗)가 둘, 전도 황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연산군일기 연산 11년(1505년) 5월 8일 기록에 보면 어필을 내려 뇌부(雷斧) 40, 뇌창(雷槍) 40을 서울과 시골에서 널리 찾아 바치라.라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뇌부는 구리와 쇠로 만든 벼락도끼, 뇌설은 돌로 만든 벼락도끼를 이릅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돌도끼를 벼락도끼라고 불렀습니다. 벼락도끼는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뇌신의 도끼로,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신묘한 약효를 가진 만병통치약이라고 여겨 임금님께 진상품으로 올리기도 했지요. ▲ 옛 시람들이 우레의 신이 쓰던 벼락도끼로 생각한 간석기(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하지만 점차 성리학이 자리 잡으면서 벼락도끼를 신의 물건이 아닌 자연적인 기(氣)가 뭉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초 서구의 고고학이 들어오면서 벼락도끼를 천지조화의 산물이나 자연물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물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는 찍개, 격지 같은 구석기시대 뗀석기와 돌도끼, 돌끌, 홈자귀 등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간석기를 문화유물로 생각하여 수집하기 시작했지요. 1960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여덟째 소만(小滿)입니다. 소만이라고 부른 것은 이 무렵에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 온 세상에 가득 차기[滿] 때문입니다. 또 이때는 이른 모내기를 하며, 여러 가지 밭작물을 심지요. 소만에는 씀바귀 잎을 뜯어 나물을 해먹고, 죽순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찍어 먹는 것도 별미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드는데 들판에는 밀과 보리가 익고, 슬슬 모내기 준비를 합니다. 또 이때 이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어대며, 아카시아와 찔레꽃 향기는 바람을 타고 우리의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그런데 소만 때는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덮이는 대신 죽순에 모든 영양분을 공급해준 대나무만큼은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봄의 누래진 대나무를 가리켜 대나무 가을 곧 죽추(竹秋)라 하는데 이는 마치 어미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에게 정성을 다하여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또 만물은 가득 차지만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구황식품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소만은 우리에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따뜻함이 있으면 차가움도 있으며, 가득 차 있으면 빈 곳도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강남역 묻지마 살인에 대한 추모물결 뉴스와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고에 대한 뉴스가 요즘 신문을 뒤덮고 있다. 어찌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 지지난해는 세월호 참사, 지난해는 메르스 사태가 사람들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고, 최근엔 조선해운산업의 엄청난 부실과 경제 악화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때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이 기원과 덕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 반메기 비나리 공연 모습, 유지숙 명창 외 9명 ▲ 사회를 보는 세한대학교 이상균 전통연희학과 교수(왼쪽), 특별출연으로 피리를 연주하는 최경만 명인 어제 5월 19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 집(코우스)에서 서도소리연희극보존회, HnH컴퍼니 공동주최와 (사)향두계놀이보존회 후원으로 유지숙의 무(巫), 기원과 덕담 공연이 열렸다. 세한대학교 이상균 전통연희학과 교수의 구수한 사회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무대를 여는 것은 유지숙 명창과 그 제자들이 함께 부른 반메기 비나리다. 반메기 비나리는 부처님의 덕으로 모든 액운을 몰아내고 가정의 안녕과 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국가문화재 가운데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이 있습니다. 이 유물 이름은 반가부좌의 준말인 '반가(半跏)'와 생각하는 불상이라는 뜻의 '사유상(思惟像)'을 합친 말로,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미륵보살상을 말합니다. ▲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광대뼈가 나오고 얼굴이 풍만하다 미륵(Maitreya, 彌勒)이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 칠천만년이 지나면 세상에 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지요.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제78호와 제83호, 삼성미술관 리움의 국보 제118호가 있으며 보물은 제331호(국립중앙박물관)와 제643호(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가 있습니다. 이 국내의 미륵보살상들의 얼굴은 대부분 네모꼴에 가까운 풍만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일본 교토 광륭사에도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일본 국보 제1호 미륵보살반가상이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들은 한국의 미륵상 특히 국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세차(維歲次, 제문의 첫머리에 관행적으로 넣는 말) 을해년 6월 22일 갑자에 국왕은 머리를 조아리며 책문(冊文)을 올립니다. 시호를 경혜(敬惠)라 올리오니 삼가 바라건대, 작은 정성을 살피시어 아래로 내려오시어 이 아름다운 일을 역사에 기록하여 전해지도록 해주시고 왕실을 음덕(陰德)으로써 도와 경사가 이어지게 하소서. 재배하며 시책을 올립니다. 위는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년) 6월 22일 기록으로 영조임금이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仁嬪金氏)를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 씨와 격을 맞추어 경혜(敬惠)라는 두 글자 시호를 내리고 이를 죽책에 써서 기록했다는 내용입니다. ▲ 죽책(竹冊). 1759년, 대나무, 25.3107.3cm, 국립고궁박물관 / 영조가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할 때 내린 글을 대나무에 새겻다. 죽책(竹冊)은 조선시대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책봉하고 존호(尊號)를 올릴 때 등에 그에 관한 글을 대쪽[竹片]에 새겨 엮은 문서를 말합니다. 죽책에 쓴 글을 죽책문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글을 종이에 썼지만 격식을 갖춰야 할 때는 이렇게 종이 대신으로 죽책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지지난해에는 세월호 참사로 모든 국민이 아파했고, 지난해는 메르스 사태로 인해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또한 올해는 토막시신 살인사건으로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런 힘든 상황에서 그저 쩔쩔 매고 지내야 할 일인가? 이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이 나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소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기원과 덕담을 해주어 사람들이 희망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서도소리연희극보존회, HnH컴퍼니 공동주최와 (사)향두계놀이보존회 후원으로 오는 5월 19일(목) 저녁 7시30분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 코우스에서 유지숙의 무(巫), 기원과 덕담 공연을 연다. 유지숙 명창은 무대를 만들고 좋아하는 음악을 맘껏 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정말 고맙고 행복합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기원과 덕담 소리에 이어 굿 소리까지 만들어본 이번 무대는 제자들과 더불어 연습하며 참으로 행복했고 모두가 하나 되어 마음을 모아주고 정성을 같이 해주어 작지만 따뜻한 음악회를 만듭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주위의 사랑과 격려 속에 늘 열심히 연구하며 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건국대학교 역사학과 신병주 교수는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있다. 자신이 살아온 한 시대의 역사를 객관적이면서 실증적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길이 읽힐 역사서를 저술하는 작업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원칙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는 주저 없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은이 이긍익(李肯翊)을 손꼽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 역사서는 크게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의 세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기전체(紀傳體)는 임금의 행적을 주로 기록한 본기(本紀),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한 열전(列傳), 본기나 열전에 담을 수 없는 항목을 분류하여 정리한 지(志)로 구성됩니다. 또 편년체(編年體)는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지요. 그리고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는 역사를 시대순으로 구성하되, 시대별 주요 사건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밝혀 적는 방식입니다. 이 기사본말체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역사서에는 바로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을 꼽고 있습니다. ▲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특히 이 《연려실기술》이 주목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뽕나무는 추위에 견디는 힘이 좋아 온 나라 어디서나 잘 자라며 6월에 꽃이 피고 열매로 오디가 열려 어린 시절 군것질이 없던 때는 이것을 따먹어서 입가가 새까맸던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에는 나이 500년 된 뽕나무(강원도 기념물 제7호)가 있는데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제주 고 씨가 관직을 버리고 정선으로 내려오면서 옮겨다 심은 것으로 자그마치 높이가 25m, 둘레 2.5m로 온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뽕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 500살 된 강원도 기념물 제7호 정선봉양리 뽕나무 그런데 창덕궁 안에도 이 보다는 작지만 나무높이 12m의 뽕나무(천연기념물 제471호)가 있습니다. 창덕궁 뽕나무는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답기로 이름났습니다. 이렇게 궁궐에 뽕나무를 심은 까닭은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농사와 함께 뽕나무로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이 조선시대 나라의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궁궐에 뽕나무를 심은 첫 기록은 《태종실록》 9년(1409) 3월 1일에 창덕궁을 지은 뒤 태종 9년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공상제도(公桑制度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5월 15일은 우리의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지 619돌이 되는 날이다. 이를 기려 온 나라 곳곳에서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 가운데 13일(금) 늦은 2시 서울 광화문 한글학회 얼말글교육관에서는 “올 곧소리 말글의 기원과 창제와 발전”이라는 주제로 <한국미디어콘텐츠학술연합(공동의장 진용옥, 최창섭)> 주최의 이도큰임금(세종대왕) 나신 날 기념 학술 모임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국기에 대한 경례”가 아닌 “국기 배례”가 있었다. 이는 “경례”라는 말이 일제나 군국주의 냄새가 나는 말이어서 삼가고 대신 전통적으로 써오던 말로 바꾸자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진용옥 의장의 “정음경(훈민정음 서문)” 낭송이 이어졌다. 이 정음경 낭송은 한글 곧 정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뇌어야 할 의식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행사는 먼저 최창섭 의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대로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 인사말을 하는 한국미디어콘텐츠학술연합 공동의장 최창섭(왼쪽) 축사를 하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 ▲ 발표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