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유한양행은 한 신문광고에 “숙취完生“라고 광고를 냈습니다. “숙취完生“이란 얼마 전 인기를 끈 만화와 드라마의 ”미생(未生)“과 관련된 말인가요? ”미생(未生)“은 바둑에서 두 집이 나지 않아 완전히 살아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또 드라마에서의 의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완전하게 살지는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完生“이란 말의 의미는 완전히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광고에선 숙취에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음을 말하는듯 한데 꼭 이렇게 한자를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한심합니다. 한자말을 함부로 쓰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 말글살이에선 굳이 한자를 쓴다면 한글을 먼저 쓰고 괄호 안에 한자를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발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한국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올 때 만주옷 마괘를 입고 왔는데 이 마괘가 변형되어 마고자가 되었습니다. 이 흥선대원군이 입던 자적 단령 (紫赤 團領)은 중요민속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어 현재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단령은 조선 말기까지 모든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입던 평상복입니다. ▲ 중요민속문화재 제214호 흥선대원군 자적 단령 (紫赤 團領),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보통 관원의 평상복은 단령과 함께 사모(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와 띠[帶], 화(靴, 목이 긴 신)로 구성되지요. 이 흥선대원군의 단령은 겉감은 자주색으로 둥근 깃이고, 안감은 붉은색으로 곧은 깃이며, 넓은 동정이 달려있습니다. 소매가 넓고 고름은 붉은색과 자주색을 쌍으로 겹쳐 달아서 모두 4개가 양옆에 달려있지요. 단령의 가슴부분에는 기린흉배가 달렸는데, 기린무늬는 그의 지위가 대군임을 표시해 줍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장(儀章)조에서 기린흉배는 대군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흉배는 흑색의 공단에 금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용(龍)은 상상의 동물 가운데 하나로 몸은 거대한 뱀과 비슷한데 비늘과 네 개의 발을 가지며 뿔은 사슴에, 귀는 소에 가깝다고 합니다. 또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기린ㆍ봉황ㆍ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겨왔습니다. 그 용이 물속에서 읊조리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그렇게 용이 물속에 읊조린다는 뜻을 가진 전통음악이 있는데 바로 “수룡음(水龍吟)”이 그것입니다. 《태종실록》 2년(1402년) 6월 5일자에 보면 예조에서 궁중 의례 때 쓰는 음악 10곡을 올리는데 10곡을 고른 까닭을 다음 같이 말합니다. “신 등이 삼가 고전(古典)을 돌아보건대, ‘음(音)을 살펴서 악(樂)을 알고, 악(樂)을 살펴서 정사(政事)를 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악(樂)을 합하여 하늘의 신령과 땅의 신령에 이르게 하며 나라를 화합하게 한다.” 임금도 '악(樂)'을 알아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열곡 가운데 수룡음이 들어 있습니다. ▲ 수룡음을 생소병주로 연주하는 생황(왼쪽)과 단소 수룡음은 본래 가곡의 반주음악을 노래 없이 기악으로만 연주하는 음악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자진한잎.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벼룻물을 담는 작은 그릇으로 수적(水滴), 연수(硯水), 연적(硯滴)이라고 하는데 연적은 구멍을 두 군데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게 하였지요. 고려시대에는 아름다운 청자연적을 많이 만들었고, 조선 전기에는 분청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이후 성리학의 영향으로 대부분 전하는 것은 백자연적입니다. 붓으로 글을 써야 하는 전통사회에서 연적은 필수 도구로 실용은 물론 관상용으로도 만들어져 사랑방의 사방탁자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지요. 오늘날 전하는 연적은 다양한데 동자(童子), 원숭이모자, 오리, 산(山), 수탉, 해태, 기린, 거북이, 복숭아, 또아리 꼴 따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 기와집 모양의 작품 백자청화집연적(白磁靑畵家形硯滴) 특히 경인문화사가 소장하고 있는 백자청화집연적(白磁靑畵家形硯滴)은 기와집 모양의 작품이지요. 19세기 분원 관요에서 만든 것으로 여섯 장의 네모난 점토판을 만든 뒤에 서로 붙인 다음 세부조각을 한 것입니다. 물이 나오는 출수구(出水口)와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入水口)는 기와지붕의 등마루와 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14년 사망원인 통계에서 사고사 가운데 교통사고로 죽은 것은 9위인데 2013년에 견줘 조금 줄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나 기차, 그리고 비행기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교통사고는 배가 가라앉아 죽은 것 말고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조선시대 사고사는 뜻밖에 벼락으로 죽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벼락으로 검색하면 무려 1,239건이 나오는데 거의가 아무 데서 아무개가 벼락을 맞았다.입니다. 재미난 것은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년) 10월 4일 기록으로 전라도 영광 사람 김원기의 아내가 벼락에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는데 말뚝에 벼락칼이 박힌 것을 보고 이를 임금께 바쳤다는 내용입니다. 또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3월 13일에는 삼각산의 소나무와 산기슭에 벼락이 치니, 해괴제(解怪祭, 나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지내던 제사)를 행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로는 벼락도 이해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어서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세종, 벼락치자 해괴제를 지내고 사면령을 내렸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0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임금은 벼
▲ 《마음의 선물》 책 표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이들의 생일잔치는 어때야 할까? 고급 뷔페식당에서 근사한 잔치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나 부모가 많다. 그러나 여기 생일잔치에 그것보다 더 종요로운 것이 있다고 알려주는 동화책이 있다. 정성현 글, 이상미 그림으로 도서출판 예원미디어꿈터에서 나온 《마음의 선물》이 그것이다. 아이의 생일을 맞이하면 생일파티를 어떻게 할까? 그러나 잔치 장소와 음식도 중요하지만, 아이에게 자신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동무들을 맞이하고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책임감을 키워주는 것도 중요하다. 생일잔치의 주인공은 아이다. 아이가 자신의 기념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자신의 동무들과 무엇을 하고 놀지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조금씩 솔선수범하는 지도력도 함께 키워주는 것이 생일잔치의 몫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일잔치를 통해 자신이 태어난 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이 태어난 의미는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종요롭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축하를 해주는 동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면 모두에게 더욱 흐뭇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남원에 가면 바위에 새겨진 12구의 불상이 있습니다. 보물 제1123호로 지정된 개령암터마애불상무리가 바로 그것이지요. 지리산 정령치(鄭嶺峙)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터 뒷 절벽(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산215)에 새겨진 이 마애불상 무리는 12구의 불상 가운데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지만 6구는 닳아서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 보물 제1123호 남원 개령암터 마애불상무리(문화재청 제공) 이 가운데 가장 큰 4m나 되는 불상은 조각솜씨도 가장 뛰어난데 두드러진 얼굴은 돋을새김[부조, 浮彫]으로 유달리 큼직한 코를 가졌습니다. 대신 옷주름은 선 처리를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고려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듬직한 체구의 다부진 이 불상은 차라리 부처님이라기보다는 그 옛날 용맹했던 장군을 떠올리게 되지요. 실제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을 마한의 옛 장수라 믿었다고 합니다. 이들 마애불상 무리는 절터를 둘러싼 높은 절벽 면에 무리를 이루면서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전(世田), 명월지불(明月智佛) 같은 글씨까지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 불상양식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됩니
▲ 《백년편지 1》 표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펴냄 [우리문화신문=김영조기자] 할머니, 오늘, 임시정부 생일을 맞아 할머니께서 남긴 책 《장강일기》를 펼쳐 들어요. 다시금 읽어도 할머니 품에 안겨 처음 만났던 생동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들이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어요. 이는 《백년편지 1》 첫 편지글의 한 토막으로 독립운동가 김의한・정정화 선생 손녀 김선현 씨의 글 이다. 그런가하면 《백년편지 1》에 실린 60통 편지 가운데 마지막 글은 80여 년 전 이역만리 중국대륙에서 영화 황제로 등극하셨으면서도 돈과 부귀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항일영화, 민족영화에 투신하신 선생님 앞에 부끄럽습니다.라는 글로 이는 동양예술극장 유인택 대표의 편지 일부이다. 《백년편지 1》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년(2019)을 맞아 지난 2010년 4월 13일부터 2019년 4월 13일까지 일반인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쓴 편지글이다. 이 편지는 편지 대상에게 직접 발송하는 편지가 아니라 디지털 공간이라는 우편함을 통해 올린 글로 2010년 백년편지가 시작된 이래 지금(2016.3)까지 235통이 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도구로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은 언제부터 썼을까요? 우리나라 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물을 보면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먹 2점입니다. 배 모양으로 된 이 먹은 먹 위에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이란 글씨가 찍혀 있어서 이 먹이 신라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남 창령군 의창 다호리 목관묘에서 출토된 붓은 붓이 출토된 고분이 기원전 1세기를 앞뒤로 한 원삼국시대 것임에 비추어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먹을 썼음을 미루어 알 수 있지요. 또한 중국 명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쓴 《철경록(輟耕錄)》에 고구려에서 송연묵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담징이 제묵법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이미 좋은 먹을 만들고 먹의 쓰임이 많았음을 알려줍니다. 조선시대에는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만든 먹이 그 질이 뛰어나게 우수하여 나라에 진상하고,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였으며, 평안도의 양덕(楊德)에서 만든 송연먹은 향기가 좋기로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지지요. ▲ 보물 제1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인사동에 한복 입고 등장한 수십 명의 젊은이들 ▲ 인사동 거리에 서양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빛난다. 인사동에 나갔더니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한복을 입고 돌아다닙니다. 무슨 행사가 있나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렸더니 그냥 좋아서 한복대여점에서 빌려 입고 나온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름답고 훌륭한 한복을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불편하다느니, 비싸다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심지어 한복학자나 전통문화 관련자들마저도 한복을 입지 않는 게 예사가 되어버렸지요. 일본의 경우를 보면 축제(마츠리)를 할 때는 물론 평상시도 그들의 전통옷인 기모노나 유카타를 입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젊은 연인들이 유카타를 입은 채 손을 잡고 고 거리를 활보하는 보습을 보며 참으로 부러웠었지요. 사실 기모노는 옆에서 거들어주지 않으면 입기도 어려운 옷일뿐더러 비싼 옷은 천만 원이 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불편하다거나 비싸다는 불평을 하지 않으며 자랑스럽게 입고 다닙니다. ▲ 일본 교토 기온마츠리에 전통옷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