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북 봉화군 상운면 설매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47호 봉화설매리3겹까치구멍집이 있습니다. 까치구멍집이란 지붕 용마루의 양쪽 합각(지붕 위의 양옆에 ㅅ 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곳)에 둥근 구멍이 있는 집을 이릅니다. 공기를 통하게 하려고 낸 둥근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상운면 설매리는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는 산골마을로 예전에는 까치구멍집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경북 봉화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47호 봉화설매리3겹까치구멍집(문화재청 제공) 약 17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이 건물은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인데 입구의 봉당(마루를 깔지 않은 흙바닥으로 된 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외양간을 오른쪽에는 부엌을 두었는데 외양간 위에는 다락을 두고 마루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뒤쪽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방과 아랫방을 오른쪽에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부엌사이에는 작은 바라지창(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바람벽에 내는 자그마한 창)을 달았지요. 반자(방이나 마루의, 종이나 나무로 반반하게 만든 천장)와 지붕틀 사이의 지붕에 까치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궁궐에는 세답방(洗踏房)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세답방은 옷이나 이불을 빠는 것은 물론 염색 다듬이질 다리미질까지 담당했던 곳을 이릅니다. 곧 궁궐 내 세탁소라고 하면 될 것이지요. 이곳의 궁녀들은 옷감에 따라 어떻게 옷을 다듬어야 하는가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하고, 무명천일 때와 베옷일 때, 비단일 때 맞는 다리미 온도를 감지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직접 염색까지 했어야 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 궁궐에서 빨래를 담당했던 세답방(洗踏房)(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궁궐에서 또 특이한 곳으로는 복이처(僕伊處)란 곳이 있었습니다. 복이처는 내전 아궁이 불 때기, 등불 켜기와 그 관리를 하였는데 이를 담당하는 이들은 조라치(照剌赤)라 하여 내시의 몫이었지요. 그런데 일제에 나라를 뺏긴 뒤 내시제가 폐지되자 그 일을 궁녀가 맡게 되었는데 이들을 복이나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밖에 궁궐에는 임금과 왕비가 입는 옷은 물론 이불, 누비보 같은 것들을 바느질하는 침방이 있지요. 또 옷과 이불 그리고 주머니와 병풍에 이르기까지 자수를 담당하던 수방, 임금이 평상시에 마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든 동식물들을 소재로 하는 그림 “화훼영모화(花卉翎毛畵)” 전시가 오는 3월 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공민왕으로부터 신사임당,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혜원 신윤복 같은 고려 말에서 조선말까지 500여 년 동안 당대를 대표할만한 화가들이 동식물을 소재로 그려낸 작품들이 전시돼 있지요. ▲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고매서작(古梅瑞鵲, 늙은 매화에 앉은 상서로운 까치), 간송미술문화재단 이 전시회의 모든 작품들은 꼭 한번 봐야 하는 것들이지만 조선 중기의 서화가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고매서작(古梅瑞鵲, 늙은 매화에 앉은 상서로운 까치)은 특히 눈에 띕니다. 이 그림의 매화는 다른 매화도에 견줘 담백하면서도 세월의 깊이를 달관한 매화로서의 느낌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까치의 묘사를 보면 담묵(淡墨, 엷은 먹)의 매화와 대비하여, 진한 먹으로 처리한 까치는 몇 번의 붓질로도 검은 깃털과 흰 깃털이 어우러진 형상을 정확하게 묘사해냈습니다. 길게 내린 꼬리는 매화가지처럼 곧고 굳세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김홍도(金弘道)의 단원 풍속도첩 가운데 춤추는 아이라는 그림을 보면 장고 1명, 피리 2명, 젓대 1명, 그리고 해금 1명과 함께 앉아서 북을 치는 사람도 보입니다. 이 북은 좌고(座鼓)라 하는데 궁중음악이나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삼현육각에 쓰였습니다.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무늬를 그려 넣었지요. ▲ 김홍도 춤추는 아이(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위줄 맨 왼쪽에 앉아서 좌고를 치는 이가 보인다. 좌고는 통일신라 때 관현악 연주에 편성되어 온 대고(大鼓)와 교방고(敎坊鼓)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궁중과 민간에서 잔치에 두루 쓰였습니다. 북을 나무틀에 매고 치면서 좌고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펴낸 《악기도록(樂器圖錄)》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요. 김홍도의 춤추는 아이말고도 조선시대 많은 그림들은 삼현육각에 편성된 좌고의 모양을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앉아서 연주하는 경우에는 북이 맨 왼쪽에 자리 잡고, 행진할 때는 반대로 북이 맨 뒤에 서도록 하는 악기 배열 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바둑천재 이세돌 9단과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가 대국을 펼쳐 바둑 애호가는 물론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정확한 계산과 수읽기에 능하다는 알파고와 아직은 인간의 직관과 감각을 컴퓨터가 따라오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세돌 9단은 누가 이길지 장담을 하지 못했었지요. 결국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대표 이세돌 9단에게 186수만에 불계승으로 이기면서 충격을 줬습니다. 앞으로 남은 4판에서 이세돌 9단이 설욕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바둑은 대국자의 성품과 도량이 드러나며, 바둑 한 판에서 발생하는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은 마치 삶의 여정과 비슷하여 인격수양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바둑의 유래는 문자가 생기기 이전인 4,300여 년 전에 발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바둑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더듬어 볼 수 있지요.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는 바둑과 투호 놀이를 좋아한다.고 하였고,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백제의 풍속은 (중간 줄임) 바둑 두는 것을 숭상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김준근, 바둑두고(기산풍속도첩), 독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임금의 지시에 의해 국가사업으로 만들었던 칼 사인검(四寅劍)이 있습니다. 이 사인검은 12간지의 인(寅)이 4번 겹치는 때 곧 호랑이해인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를 택해 12년 마다 벼리었습니다. 그것은 호랑이의 위력을 빌려 사악한 귀신을 물리침으로써 왕실과 궁중의 안전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사인검은 칼 몸 한 면에 사인검을 포함한 27자의 한자가 금(金)상감 되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191개 별자리가 역시 금상감 되어있는 보검입니다. ▲ 사인검(四寅劍),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사인검 말고도 인(寅)이 세번 겹치는 때 만든 삼인검, 두번 겹치는 때 만든 이인검도 있는데 이를 모두 인검이라고 합니다. 이 인검은 중국이나 일본 어디에도 없는 우리 겨레 고유의 칼이지요. 사인검이 임금이 전장에 나가는 장수에게 하사하기 위하여 만든 칼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임금이 내려준 칼 가운데 사인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부러 출정하는 장수를 위해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인검(四寅劍)은 전례에 따라서 만든다고는 하나, 다만
[우리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불국토를 꿈꾸며 전국의 절을 10년째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작가가 있다. 바로 불교 사진작가 최우성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전국의 이름난 절들을 구름에 달 가듯이 다니면서 많고 많은 사진을 담았지만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담아온 사진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감 보다는 어딘지 늘 부족한 점만 더욱 더 느껴지게 되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라며 겸손하게 불교사진을 작품화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번 최우성 작가의 불교사진 작품 전시회는 2016서울국제불교박람회와 제4회붓다아트페스티벌 행사에서 예술분야로 참여하는 전시회이다. 최우성 작가의 출품 작품들은 주로 한국절 속에 깃들어 있는 부처님과 불보살님의 포근한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모두 30여점이 전시된다. 그는 작품 가운데 특히 1,300여 년 동안 신라시대 창건 이래 모진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중생의 아픔을 감싸주고 꿈을 이룩하도록 힘이 되어준 관세음보살의 향기가 넘치는 동해 낙산사의 풍광을 많이 선택했다고 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가면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라는 못 곧 저수지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지요. 그러나 이때는 이곳이 신라가 아닌 백제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신라가 만든 것처럼 고쳐놓았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 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전경(문화재청 제공) 지금 이곳에는 일직선으로 약 3㎞에 달하는 둑이 현재 남아 있으며 딸림 시설로 둑의 남단 수문터였던 경장거(經藏渠)와 북단 수문터였던 장생거(長生渠), 그리고 중앙 수문터였던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 있습니다. 다만 이 둑도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요.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1975년에 못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 문신 청천당(聽天堂) 장응일(張應一, 15991676)은 대사간과 가선대부(조선시대 종이품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를 지낸 인물로 청백리입니다. 그는 사사(賜死)하라고 명이 내려진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구명상소를 아흐레 동안이나 계속하여 올렸고,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는 권세를 휘두르던 김자점(金自點)의 탐욕, 방자함을 탄핵할 정도로 강직한 선비였습니다. 장응일은 깊은 두메 영동 황간 땅에 유배되었을 때 겪은 백성의 불쌍한 삶을 보고 임금에게 말합니다. 농사꾼 아낙들은 죽도록 일만 하다가 열이면 셋이 등이 구부러져 영영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죽습니다. 또 백성의 자식은 나이 열 살이 되도록 아랫도리를 감출 베 한 조각이 없어 오줌대롱을 내놓은 벌거숭이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양반들은 날로 사치하는 풍조가 늘어 비단옷 입는 아낙이 많습니다. 국법으로 백성들이 비단옷 입는 것을 엄히 다스리옵소서. ▲ 장응일, 손녀딸 시집 보낼 때 무명이불을 보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렇게 임금께 진언한 그는 대사간이 된 뒤에도 무명이불 덮기를 고집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셋째 경칩(驚蟄)이다. 원래 이름은 중국 역사서 한서(漢書)에 열 계(啓) 자와 겨울잠을 자는 벌레 칩(蟄)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고 되었었는데 뒤에 한(漢) 무제(武帝)의 이름인 계(啓)를 피하여 대신 놀랠 경(驚)자를 써서 경칩(驚蟄)이라 하였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겨울잠 자던 동물은 음력 정월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경칩에 해당하며, 음력 9월에는 겨울잠을 자기 시작하는데 절기로는 입동(立冬)에 해당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는 “이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어린 동물을 기르며 고아들을 보살펴 기른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경칩이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이므로 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때임을 뜻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임금이 농사의 본을 보이는 적전(籍田)을 경칩이 지난 해일(亥日)에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행하도록 정하였으며, 경칩 이후에는 갓 나온 벌레 또는 갓 자라는 풀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리기도 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