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踏雪野中去 눈을 밟고 들길을 가면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아무렇게나 걷지를 말자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이는 서산대사가 지은 시로 그의 철학이 오롯이 배어 있는 느낌입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으로 나선 서산대사를 승군대장도총섭(都總攝)으로 임명한 교지와 정조임금이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친히 적은 서산대사화상당명의 유물(보물 제1357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 서산대사를 승군대장도총섭(都總攝)으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지, 보물 제1357호, 문화재청 제공 고 재상 이정귀(李廷龜)ㆍ장유(張維)가 지은 비문에 가운데 휴정(休靜, 서산대사)의 사적이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선묘(宣廟, 선조)께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 삼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 내리신 선묘의 전교(임금이 내린 명령)와 의발(衣鉢, 가사와 그릇)이 호남 대둔산(大芚山)에 간직되어 있으니, 영남의 예에 따라 사당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이어 표충(表忠)이란 두 글자의 편액(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동제(洞祭)의 형태는 산신제(山神祭)를 비롯하여 서낭제, 탑신제(塔神祭) 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산신제는 온 나라에 분포하며, 서낭제는 주로 한강이북에, 탑신제는 한강이남에서 지낸다. 충북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 지내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 오티별신제(吾峙別神祭)는 한강이북에 분포된 북방계의 서낭제이고 그 제의(祭儀)가 별신제(別神祭, 마을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의 형식을 갖고 있다. 오티 별신제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오티마을이 약 400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별신제의 유래도 400년 전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특히 오티마을의 뒷산에 봉수대가 있었고 오티마을에 봉화군이 상주했다는 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오티별신제는 봉수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을 공동의 민간신앙으로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다. 또 오티별신제는 2년마다 별신제를 지내는 것이 특징이며, 충청북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서낭 별신제이다. ▲ 제천 오티별신제 가운데 서낭당제 오티별신제는 정월 14일 밤, 산신제는 15일 아침부터 다섯고개 곧 봉화재, 해너물재, 흰티재, 구실재, 말구리재에 있는 상당(上堂)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적성(赤誠,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 우두머리)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는 이봉창 의사가 의거를 하러 떠나기 전 한 맹세입니다. 오늘은 이봉창 의사가 1932년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황거 앞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진 날이지요. 이날 거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 의거 전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왼쪽), 이봉창 의사 의거를 대역사건이라 보도한 기사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 왕이 사는 황거 앞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입니다. 또 이 일로 인해 일본 핵심 내각은 사퇴를 하였으며, 경시청장 부터 고위직은 다 옷을 벗었습니다. 또한 일왕 테러에 대한 소식으로 중국 내 항일운동이 불붙기 시작했지요. 이봉창 의사는 1932년 9월 30일 이른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세종문화회관 뒷쪽에 붙인 광고, 온통 영어투성이다. ▲ 세종미술관 앞의 백남준전을 홍보하는 것도 온통 영어뿐이다. ▲ 세종문화회관 지하 음식점들도 영어로 홍보하기에 바쁘다. 세종문화회관 누리집을 보면 “세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겨레에게 “세종”은 정말 성스러운 임금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글자를 만들었고, 백성을 위해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분이었지요. 따라서 상호나 단체 이름에 “세종”을 붙이려면 적어도 세종의 업적에 누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더구나 우리말을 짓밟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은 “세종”이란 이름을 붙이고서 우리말 짓밟기에 신이 난 듯합니다. 지난해에도 우리 신문이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여전히 그 잘못을 고칠 줄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도 세종문화회관에는 여지없이 영어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물론 한글로 홍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오늘 1월 7일에 무대에 올린는 <2016 세종문화회관 신년음악회 - ‘어제를 비추어 내일을 열다’> 펼침막은 한글로 쓰여 있으니까 말입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체 높이 42.2cm, 입지름 9.2cm. 밑지름 14.6cm의 토기새장식항아리는 4세기 가야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삼국시대 토기항아리는 온통 둥근 것이 많은데 이 작품은 보기 드물게 원통 모양에 높이가 높고 뚜껑을 덮은 그릇 모양으로 특이한 형태입니다. 토기 표면은 3세기 김해지방 토기에서 많이 보이는 두드림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몸체의 세 곳에 흙띠를 두르고 톱니무늬를 새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톱니무늬 꼭대기에는 각각 오리 한 마리 씩 뚜껑을 향해 앉아있지요. 그리고 뚜껑 위에는 아래 3마리 오리를 거느리는 듯한 또 한 마리의 오리가 앉아 있습니다. 이 같은 모양새는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을 만큼 독특한데 아마도 특별한 의식에 쓰였던 그릇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 4세기 가야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유물 토기새장식항아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소장 이 토기새장식항아리에 대해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사실적인 오리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조각도의 자국으로 근육의 힘이 보이는 우수한 조형이어서 오리 자체만으로도 조형의 우수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평신이란 누리꾼은 자신의 블로그에 나름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셋째인 소한(小寒)입니다. 소한은 양력으로 해가 바뀌고 처음 오는 절기지요. 원래 절기상으로 보면 대한(大寒)이 가장 추운 때지만 실제는 소한이 한해 가운데 가장 추운데 절기의 기준이 중국 화북지방에 맞춰졌기 때문에 조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동장군(冬將軍)이라고 말합니다. 이 동장군이란 말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동장군을 겨울 장군이라는 뜻으로, 혹독한 겨울 추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짧게 설명해 언제부터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지 그 유래를 알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사쿠라훈민정음, 이윤옥 인물과사상, 2010》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말에서 온 말로 일본국어사전 《다이지센(大辭泉)》에는 ふゆしょうぐん【冬將軍】:《モスクワに遠征したナポレオンが、冬の寒さと雪が原因で敗れたところから》冬の嚴しい寒さをいう語。로 되어 있는데 번역하면, 동장군은 모스크바에 원정 간 나폴레옹이 겨울 추위와 눈으로 패하게 된데서 나온 말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덧붙이자면 1812년 러시아-프랑스 전투에서 혹독한 날씨 탓으로 무너진 프랑스 군대를 보고 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증왕 십삼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지리지 오십쪽 세째줄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때 우리가 외치며 부르는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 덕분에 우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잘 알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일명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라고도 하는 것으로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8권에 실려 있는 전국 지리지다. ▲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조선에서 편찬된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 말고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은 지리지의 나라, 조선을 주제로 1월 1일(금)부터 4월 30일(토)까지 본관 6층 고전운영실에서 2016년 병신년 첫 고문헌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 세계에 내놓아도 가장 훌륭한 지리지로 1530년 이행, 윤은보, 신공제, 홍언필, 이사균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금속활자본, 목판본, 필사본 등 3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昨冬雪如花 지난 겨울 꽃 같던 눈 今春花如雪 올 봄 눈 같은 꽃 雪花共非眞 눈도 꽃도 참(眞)이 아닌 것을 如何心欲裂 어찌하여 마음은 미어지려 하는가. ▲ 매화가 마치 눈인듯 하다. (田琦)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국립중앙박물관 위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옥중에서 쓴 “벚꽃을 보고(見櫻花有感)”란 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울엔 눈이 꽃 같았고, 봄엔 꽃이 눈인 듯 합니다. 눈도 꽃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닌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우리는 그 눈과 꽃에 마음을 뺏기고 미어지려 하는 것이지요. 선생 같은 위대한 선각자도 눈과 꽃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데 하물며 중생들이야 어쩌겠습니까? 일제강점기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큰스님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선생은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지금 한용운 선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를 돌아보고 구룡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는 관(冠)을 벗어 놓고 물로 뛰어 들었다. 그때 금강산을 지키는 산신령이 나타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큰 죄다.’라고 말하고 옥황상제의 관을 가지고 사라졌다. 관을 빼앗긴 옥황상제는 세존봉 중턱에 맨머리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위는 금강산에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얼마나 금강산이 절경이었으면 옥황상제마저 홀리게 했을까요? 심지어 《태종실록》 태종 4년(1404) 9월 21일 기록에는 태종이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전하는 말로는, 중국인에게는 고려에 태어나 직접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이 있다는데 맞는가? "하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심지어 중국인들조차 금강산에 가보는 게 소원이라 할 정도였지요. ▲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그림 겸제 정선의 "해악전신첩" 가운데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국립중앙박물관 그 금강산을 가장 잘 그린 겸재 정선은 금강산을 멀리서 한 폭에 다 넣고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가 있으며, 단발령에서 겨울 금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경복궁 전철역에서 만난 태국 아가씨들, 한복을 예쁘게 차려 입었다. 어디에 가려는 것일까? 1일 낮 경복궁역에서 만난 고운 한복차림의 아가씨들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국인들도 잘 입지 않는 한복을 태국 아가씨들이 제대로 차려 입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무신도 갖춰신고 예쁜 손가방 까지 한복과 어울리게 손에 든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린다. '뷰티플'을 외치니 예쁜 모습으로 자세를 가다듬어 준다. 우리 고유의 설날(올해는 2월 8일)이 있어 한국인들은 양력 1월 1일을 설로 쇠지는 않지만 태국 아가씨들이 한복을 입어서 그런지 더욱 뜻 깊은 새해를 맞이하는 느낌이다. 한국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