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제주의 잠녀는 일본의 해녀보다 추위에 강하다. 또 임신이나 월경 중이라도 꺼리지 않고 사철 작업을 한다. 잠수를 할 때는 ‘소중기’하고 부르는 남색 무명의 수영복을 입는다. 앞쪽은 젖가슴까지 덮지만, 뒤쪽은 등이 다 드러나고 가느다란 옷감이 열십자로 아래쪽에 붙어 있다.” 이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제주에 머물며 제주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이즈미 세이이치 씨가 쓴 《제주도(濟州島)》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따르면 해녀들은 ‘소중기’를 입고 물질을 했습니다. 소중기는 소중이, 수견, 도곰수견, 물옷이란 말로도 부르지요. ‘소중기’는 제주말로 속옷을 뜻하는 것으로 원래 집에서 짠 무명으로 만들었는데 차츰 직물공장에서 만든 광목을 썼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소중기’ 하면 흰옷을 떠올리지만 제주 특산물인 감으로 물들인 갈옷을 선호하는 제주답게 갈옷 소중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는 미역을 짊어져도 때가 덜 타고 생리중이어도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소중기는 넉자 가량(가로 25cm, 세로 200cm)의 무명옷감으로 짓는데 조각보 방식으로 한 번에 접어 만든다고 하지요. 다만 가슴 부분은 다른 옷감으로 덧대기 때문에 두 겹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활 지어 송지(松枝)에 걸고 / 옷은 벗어 남게 걸고 석침(石枕) 베고 누었으니 / 송풍은 거문고요 /두견성은 노래로다 아마도 이 산중에 / 사무한신(事無閑身)은 나뿐인가” 위 노래는 황해도지방의 대표적인 민요 <산염불(山念佛)> 일부입니다. 산속에서 활과 옷을 벗어던지고 돌베개에 누웠으니 솔바람 소리가 거문고 소리로 들립니다. 이렇게 자연과 하나 되어 아무 일 없이 한가함을 누리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을 듯 하지요. ▲ 옷을 벗어던지고 돌베개에 누웠으니 솔바람 소리가 거문고 소리로 들리누나, <산염불>,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산염불>은 <잦은염불>과 짝을 이룰 때는 <긴염불>이라 부르는데 곡이름 속에 ‘염불’이라는 말이 있고, ‘∼아미타불이로다’로 끝나는 후렴구 때문에 얼핏 불가(佛家)의 음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설이나 음악적 특징은 불교음악과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이에 견주어 <잦은염불>의 사설에서는 불교적인 느낌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산염불>은 이렇게 점잖고 문학적인 느낌을 주지만, 또 다른 황해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요 <사설난봉가>는 “앞집 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이나 스님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시기를 비는 뜻이었지요. 묻은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서해 바다에서 용이 솟아오르듯이 스스로 물위로 떠오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향의식을 한 뒤엔 그곳에 매향비(埋香碑)를 세웠습니다. ▲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운 경남 사천의 보물 제614호 매향비 그때 세웠던 매향비는 곳곳에 남아 있는데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의 보물 제614호 매향비도 있지요. 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써서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합니다. 글자 크기가 같지 않고 가로세로도 잘 맞지 않으며, 글자 수 또한 각 행마다 같지 않지요. 다만 글자체에 예스러움이 담겨 있어 당시 지방의 글씨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판독된 내용에 따르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스님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契)를 조직하여, 임금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은 안성유기와 남사당패의 바우덕이(1848~1870)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남사당패에 맡겨진 바우덕이는 타고난 재주꾼인데다가 끈질긴 노력을 보태 남사당패 여섯 마당을 모두 익혔으며 그 가운데 줄타기는 당대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소녀 바우덕이가 줄 위에 서면 구경 온 일꾼들이 정신을 빼앗겨 빈 지게를 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지요. 바우덕이가 속한 남사당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곡예, 춤, 노래를 공연했던 집단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입니다. ▲ 남사당놀이의 덜미와 살판, 남사당놀이보존회 제공 남사당의 발생 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 때로 남사당패가 시작된 곳이자 전국 남사당패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50여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단체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 내용을 정하여 기예를 연마하였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다니면서 풍물놀이, 줄타기, 탈놀음,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등을 공연하였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들아 / 옥중의 아들아 /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 이 어미 밤새 / 네 수의 지으며 / 결코 울지 않았다 /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 비굴치 말고 / 당당히 /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는 아들의 수의를 지으며 결코 울지 않았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 시는 이윤옥 시인의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시집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 나오는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의 심정이 되어 쓴 시입니다. 이 시는 듀오아임의 노래로 재탄생되어 불려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셨지요.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방문을 처단한 지 106돌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주검을 찾지 못해 현재 효창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무덤은 빈뫼(허묘)로 남아 있지요. 국가보훈처나 시민단체 그리고 뜻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주검을 찾으려 하고 있지만, 어디 묻혔는지 정확하게 기록된 문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그동안의 발굴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JTBC의 탐사기획 프로그램에 보도된 것을 보면 안 의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롱이 개암 열매 제풀에 떨어지고 상강도 주춤주춤 잰걸음을 치는 저녁 부뚜막 개다리소반엔 시래깃국 두 그릇 노부부 살강살강 그릇을 비우는 사이 빈 마을 휘돌아 온 살가운 바람 한 올 홍적세(洪績世) 까만 시간을 되짚고 돌아왔다 위 시는 상강 즈음을 노래한 정용국 시인의 아득하다입니다. 내일은 24절기 가운데 열여덟째 절기 상강(霜降)이지요. 상강은 서리가 내린다.는 뜻인 것처럼 이때는 무서리가 하얗게 내리며, 만산홍엽(滿山紅葉) 단풍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1961년 10월 24일 자에 보면 누렇게 시든 가로수 잎들이 포도 위에 딩굴고, 온기 없는 석양이 삘딩 창문에 길게 비쳐지면 가을도 고비를 넘긴다.라며 상강을 얘기하지요. ▲ 상강 무렵은 가을걷이가 바쁘기 때문에 대부인 마님이 나설 정도다.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첨 가운데 타작 〈농가월령가〉에 보면 들에는 조, 피더미, 집 근처 콩, 팥가리, 벼 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가을걷이할 곡식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일손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大夫人) 마님이 나막신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에는 시조(時調)와 가사(歌詞) 그리고 가곡(歌曲)이 있다. 어제 22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의집(코우스)에서는 문화관광부 주최, 한국정가·악연구원 주관으로 “박문규의 시조와 가사” 공연이 있었다. 전통 성악곡 가운데 시조와 가사의 참맛을 “한국정가·악연구원 박문규 원장의 소리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시조(時調)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노래하는 전통 성악곡이며, 가시는조선 중기 이후 만들어진 전통 노래의 하나로 사설의 길이가 가곡이나 시조에 견주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이날은 먼저 시조를 1부로 공연했고 이어서 2부엔 가사를 노래했다. ▲ “박문규의 시조와 가사” 공연 모습 ▲ 공연 해설을 하는 서한범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장 공연 전 무대에 오른 한국전통음악연구회 서한범 회장(단국대 명예교수)은 흔히 시조창을 아무나 부르는 것으로 생각한 탓인지 다른 사람의 시조창에 혹평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박문규 명인은 그야말로 참 선비, 훌륭한 인격을 가진 가객으로 뛰어난 소리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무대에 오른 박문규 명인, 먼저 평시조 “태산이 높다하되”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는 중국땅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이른바 청산리대첩이 있던 날입니다. 화룡현 청산리는 조선인 교민이 많이 모여 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사방을 에워싸듯 둘러싼 주변은 산세가 험하고 뒤편으로는 울창한 숲지대가 조성되어 있는 곳으로 지금도 두메산골에 속하는 곳입니다. 당시 청산리 계곡 안에는 약 200여 호 정도의 조선인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주변 산악은 험준한 지형으로 독립군이 운집하고, 활동, 은신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지요. 지금으로부터 95년 전인 1920년 10월 21일 이곳 청산리 일대에서는 조선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22일 오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는데 오전 9시 300여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대대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그날 저녁 7시 무렵까지 지속되었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으며 독립군은 청산리 지역의 지형을 잘 이용해 기습 작전, 매복 작전 등으로 승리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의논하기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설날·삼짇날·단오·유두(流頭)·칠석·한가위·중구(重九, 중양절)·동지(冬至) 같은 속절(俗節)에는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이 어떨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위의 여러 속절은 너무 많아서 번거로울 듯하오니, 유두와 칠석은 빼고, 그 나머지 여섯 명절에만 잔치를 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그러나, 사신이 서울에 있으면 괜찮지만 만약 먼 지방에 가 있으면, 여섯 명절에 다 사람을 보내어 잔치를 어려울 것이오니, 먼 지방에 가 있을 때는 설과 동지에만 사람을 보내어 위로함이 가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종실록》 13년(1431) 9월 12일 치 기록입니다. 오늘은 음력 9월 9일로 조선시대에 다른 나라의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기까지 했던 명절 “중양절(重陽節)”입니다. 우리 겨레는 음양사상에 따라 양수(홀수)가 겹친 날(설날, 삼짇날, 단오, 칠석, 중양절)을 명절로 지냈는데, 중양절도 그 가운데 하나지요. 중양절은 숫자 ‘9’가 겹쳤다 하여 “중구(重九)”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라 때에는 중구에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모여 시를 짓고 품평을 하는 일종의 백일장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전에는 탈해이사금을 섬기던 거도(居道)가 마숙(馬叔)이라는 말달리기 놀이를 빙자하여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멸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거칠산국(居柒山國)은 지금의 경상남도 동래 또는 언양 지역에 있었다고 하고 우시산국(于尸山國)은 경상북도 영해에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울주군 웅촌면과 웅남면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유적 발굴조사에서 우시산국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솥, 다양한 토기, 쇠칼이나 쇠창 같은 철제 무기류, 옥으로 만든 꾸미개(장식품)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토기는 새장식 뚜껑항아리입니다. ▲ 섀장식 뚜껑항아리 (울산박물관 소장)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보면 큰 새의 깃털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새는 죽은 사람을 하늘로 안내하는 신성한 동물로 생각하여 삼한시대에 그릇 따위에 많이 장식했다고 하지요. 따라서 이 새장식 뚜껑항아리는 우시산국 지배층의 장례식이나 제사의식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