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태조 이성계(1335~1408)는 조선을 건국한 뒤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음력 2월과 음력 8월, 동지(冬至) 뒤의 셋째 술일(戌日)에, 땅의 신인 사신(社神)과 곡식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큰제사 곧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올렸습니다. 이밖에도 정월의 기곡제(祈穀祭, 첫 신일-辛日에 그해의 풍년을 빌던 나라의 제사), 가뭄 때의 기우제 등 때때마다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사신과 직신에게 정성껏 지냈지요.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면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廟)라 하고, 제의(祭儀)에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임금이 도성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세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성계와 조선의 역대 임금은 이러한 제도를 충실히 따른 것입니다. ▲ 현재의 사직단 모습 그런데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은 아관파천 뒤 다시 궁궐로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원구단에서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동시에 나라의 뿌리인 사직(社稷)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바꿔 부릅니다. 태사와 태직이란 황제나라에서만 쓸 수 있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당당함을 또 한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시간을 가두고 싶었지만 시간은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고 물처럼 흘러 흘러간다. 바람의 형상은 보이지는 않지만 옷깃을 스치고 몸에 부딪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바람 역시 느낄 수는 있으나 가둘 수는 없다. 심성을 표현 하고자 해도 그 역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말고 맑은 최상류층 물을 보여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는 무능력자다. 한경혜 작가는 서울 종로구 운현궁 기획전시실에서 여덟 번째 이야기 물이 품은 자연을 열면서 이렇게 애기하고 있다. ▲ 평온한 일상, 4574cm, 한지에 수묵담채, 2015 그는 말한다. 장애는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에게만 불편할 뿐이다.라고 말이다. 한 살 때 앓은 뇌성마비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다가 일곱 살 때 성철스님을 만나 3천배로 장애를 이겨내고 화가의 길을 득도한 한경혜 작가(40)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보통의 그림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확 다가온다. 그의 득도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음인가? 그림은 전통 한지에 수묵담채로 계곡의 물속이나 바다 속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
▲ 엄마와 아이가 윷놀이를 하고 아빠는 말을 놓아준다. ▲신나게 널을뛰는 중년의 남여 ▲ 어른이 제기차는 모습을 본 아이가 흉내내기 어려운 듯 냅다 던져버린다. ▲ 한 아이가 힘차게 굴렁쇠놀이를 하고 있다. ▲ 연인이 다정하게 투호놀이를 한다. ▲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운현궁을 둘러보다가 잠시 기자를 위해자세를 취해준다.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어제 한가위를 보내고 오늘 찾은운현궁(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사가, 사적 제257호)에는 민속놀이가 한창이었다. 운현궁 뜰에는 민속놀이 한마당이 열려 나들이 나온 시민들의 즐거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윷놀이, 널뛰기, 투호놀이, 굴렁쇠놀이, 제기차기 따위와 같은 놀이에 여념이 없는 시민들의 표정 또한 밝아 보였다. 엄마와 아이, 할아버지와 손자, 부부 사이는 물론 다정한 연인들이 운현궁 뜰 구석구석에서 민속놀이의 즐거움에 빠져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엄마와 아이가 윷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이 아빠는 즐거운 마음으로 말을 놓아주고, 서툰 아이가 널을 뛸 수 있도록 엄마는 손을 잡아주는 모습도 정겨웠다. 한편에서는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한복을차려입고 운현궁 뜰에서 연신 사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엔 여성이 시집가면 출가외인이라 하여 친정부모를 쉽게 만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한가위가 지난 뒤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중간 지점을 정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서 한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는데 이를 반보기'라는 했습니다. 반보기는 다른 말로 중로상봉(中路相逢)이라고 했는데 한가위가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때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만났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이렇게 말한 것이지요. ▲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의 애틋한 만남 반보기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또 한마을의 여자들이 이웃 마을 여자들과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정을 나누며 하루를 즐기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고르는 기회로 삼기도 했습니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 하여 가까운 친척을 만나러 가는 것이 먼저이고, 꽃구경은 나중이라고 하였으며, 한가위 앞뒤로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바람이었습니다. 요즘은 민족대이동이라 하여 국민 대다수가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을 만나고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 흔히 슈퍼문이라 말하는 대보름달(최우성 기자) '추석 달' / 김정기 뉴욕에서 보는 추석 달 속에 코스모스 무리지어 핀 고향 철길 있네 장독대 뒤에 꽈리 한 타래 가을볕에 익어 있네 가난이 따뜻하고 아름답던 성묫길 소슬바람 송편 향기 마천루 달 속에서 물씬거리네 함지박에 가득 담긴 머루 다래 수수 차좁쌀 쪽머리에 이시고 흰 옥양목 적삼의 어머니 계시네 울음 때문에 바라볼 수 없는 어머니 모습이네 우리 겨레의 3대 명절 하면 설, 단오, 한가위를 꼽는다. 그 가운데서도 ‘한가위’는 가장 큰 명절이다. 1819년(순조 19)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한양(漢陽)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있는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한가위는 햇곡식과 과일이 풍성한 절기로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한가위의 유래와 말밑(어원) 한가위는 음력 팔월 보름날(15일)로 추석, 가배절, 중추절, 가위, 가윗날 따위로 부른다.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레는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한가위가 아니라 추석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가 하면 중추절, 가위, 가윗날, 가배절, 가붓날이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말밑(어원)은 무엇이며, 어떤 말을 쓰는 게 바람직할까요? 먼저 중국에서는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는데 그에 따라 8월 보름을 중추라 한 것입니다. 또 추석이라는 말은 5세기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었으나 우리의 명절과 잘 맞지 않는 말이고,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하지요. ▲ 말밑(어원)이 불분명한 추석보다는 신라 때부터 쓰던 토박이말 '한가위로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에 견주면 한가위는 뜻과 유래가 분명한 우리 토박이말입니다. 한가위는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에서 유래한 것인데 다음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6.25 한국전쟁 이후인 50~60년대 우리는 식량이 모자라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갈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점심시간에 친구들 몰래 수돗물로 배를 채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도시락을 싸간다 해도 대부분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반찬이라고 해야 김치 하나뿐인 그런 것이었지요. 그런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먹거리가 모자라 식량 증산에 큰 관심을 보일 때 였습니다. 그래서 1960년 필리핀에 미국이 주도하여 동남아시아 쌀 연구의 전진기지인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설립합니다. 이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보급된 IR8이란 품종은 기적의 벼로 불리며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때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허문회 교수가 이 IR8의 개발에 참여했는데 IR8은 인디카 품종(남방벼)이었으므로 그대로 한국에 도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 통일벼가 온나라에 퍼지면서 쌀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농촌진흥청 제공) 허문회 교수는 2년의 연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재배할 수 있는 IR8의 후손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요. 이 품종은 한국에서 통일이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1971년부터 농가에 보급되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커진다는 24절기 열여섯째 추분(秋分)입니다.《철종실록》 10년(1859) 9월 6일 기록에 보면 “추분 뒤에 자정(子正) 3각(三刻)에 파루(罷漏,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하여 종각의 종을 서른 세 번 치던 일)하게 되면, 이르지도 늦지도 않아서 딱 중간에 해당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될 것 같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이 기록처럼 우리 겨레는 추분날 종 치는 일조차 중도의 균형감각을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추분 때가 되면 들판의 익어가는 수수와 조, 벼들은 뜨거운 햇볕, 천둥과 큰비의 나날을 견뎌 저마다 겸손의 고개를 숙입니다. 내공을 쌓은 사람이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는 것과 벼가 수많은 비바람의 세월을 견뎌 머리가 수그러드는 것은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 추분엔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에서 겸손을 생각한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태종실록》 11년(1411) 1월 11일 기록에는 “《천문지(天文志)》를 살펴보면, 노인성은 항상 추분(秋分)날 아침에 병방(丙方)에서 나타나, 춘분(春分)날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맷돌은 곡식을 누르고 비비면서 껍질을 까거나 빻는데 쓰는 연장입니다. 위·아래 두짝으로 구성되며, 아래짝 가운데에는 중쇠(숫쇠라고도 함)를, 위짝에는 암쇠를 박아 끼워서 서로 벗어나지 않도록 하지요. ‘ㄱ’자 모양의 맨손(손잡이)은 위짝 구멍에 박으며 칡이나 대나무로 테를 메워 고정시키기도 합니다. 위짝에는 곡식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래짝 위에는 곡물이 잘 갈리도록 하기 위하여 판 홈이나 구멍이 있습니다. 맷돌의 크기는 매우 다양한데 적은 것은 지름이 20cm에 지나지 않지만 절에서 쓰던 맷돌은 1m가 넘는 것도 있고 풀매라고 하여 고운 돌로 조그맣게 만든 것도 있지요. 또 강원도 두메에서는 통나무로 만든 나무맷돌을 쓰기도 하고, 제주도에서는 네 사람이 함께 돌리는 큰 맷돌을 쓰기도 합니다. ▲ 종가 운조루에는 남부지방의 맷돌(왼쪽)과 중부지방의 맷돌이 함께 있다. 그런데 모양을 보면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이 다릅니다. 먼저 중부지방 것을 보면 위쪽 맷돌과 아래쪽 맷돌의 크기가 같아 맷돌 아래에 매함지나 매판을 깔고 쓰도록 되어 있지만 남부지방은 아래 맷돌이 더 커서 굳이 아래쪽에 매함지나 매판을 쓸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새 노래 몇 곡을 태연하게 연주하다 창문을 열어젖혀 눈이 마주치고선 뛰어난 재능에 탄복했네 물고기가 솟아오르고 학이 내려앉을 음악을 이제 모조리 전해주노니 예를 쏘아 맞힌 활일랑 내게 겨누려 하지 말거라” ▲ 김성기 명인, 창문 밖에서 스승의 거문고 음악을 엿듣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위 시는 조선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위항시인이라고도 하는 중인이나 서자 출신 문학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쓴 《추재기이(秋齋紀異)》에 나오는 한시입니다. 17세기 후반부터 활동한 유명한 가객 김성기에 대한 이야기인데 김성기는 연주에도 뛰어나고 작곡에도 큰 업적을 남긴 거문고 악사였습니다. 이 김성기는 숙종(1674~1720) 때 거문고 대가였던 왕세기(王世基)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고 하지요. 하지만 왕세기는 원래 새 음악을 만들면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고 비밀로 했습니다. 이에 음악에 목말라 했던 김성기는 도둑 공부라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밤마다 왕세기의 집으로 가 창문에 귀를 대고 엿들은 다음 이를 모조리 암기하고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어버리지요. 그런데 그를 눈치 챈 왕세기가 어느 날 밤 거문고를 타고 있다가 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