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로부터 금(金)은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에 금박을 입힌다는 것은 옷을 입는 사람의 기품을 드러내는 것이었지요. 동시에 금박으로 무늬나 글자를 새겨 넣어 입는 이의 소망을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금박장식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만 쓸 수 있었기에 현전하는 유물이 많지 않지만 순조(純祖)의 3녀 덕온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이라고 전하는 원삼에는 '수(壽)'와 '복(福)'자가 금박 장식되어 있습니다. ▲ 덕온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이라고 전하는 금박당의, '수(壽)'와 '복(福)'자가 금박 장식되어 있다.(중요민속문화재 제211호) 금박장식은 접착제를 바른 무늬판을 무늬를 넣고자 하는 자리에 찍고 접착제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금박지를 붙인 다음 무늬 밖에 있는 금박지를 다시 떼어내는 방법으로 입히게 되지요. 금박장 기술은 옷의 구성에 어울리는 무늬를 고르고, 배치하는 안목을 바탕으로 무늬판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과 주재료인 아교와 금박지의 물성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오랜 제작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되는 기술입니다. “금박(金箔)”이란 원래 금 조각을 계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草草人間世 덧없는 인간세상 居然八十年 어느덧 나이 팔십이라. 生平何所事 평생에 한 일 무엇이뇨 要不愧皇天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한 것이네." 위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선생이 쓴 병중에 회포를 적다(病中書懷)라는 한시입니다. 1704년, 선생이 78살로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에 지은 것으로서, 글쓰기를 마감한 절필시(絶筆詩)지요. 선생은 죽음이 가까워왔을 때 평생을 뒤돌아보면서 “하늘에 부끄럼 없고자 최선을 다했음”을 고백합니다. 높은 벼슬이나 재산을 탐하지 않았던 선생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 시입니다. ▲ 갈암 이현일 선생, 평생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선생이 태어나기 전인 임진왜란 때 중국 두사충이란 이가 조선에 왔다가 선생의 집을 보고 “자색 기운이 1장이나 뻗혀있으니 저 집에 틀림없이 뛰어난 인물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지요. 선생은 인현왕후 폐비의 부당함을 상소하여 7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했던 올곧은 선비였습니다. 또 퇴계학맥의 적통을 이은 대단한 인물인데 외할아버지 경당 장흥효 선생도 퇴계학맥의 적통을 이은 분이지요. 또 선생의 어머니는 도토리죽을 쑤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6월 19일에서 21일까지 경주 예술의전당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피리를 한 자리에서 모아보는 경주세계피리축제가 펼쳐졌습니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이하는 경주세계피리축제에서는 여러 나라의 피리를 비롯한 민속 악기의 전시가 이루어졌는데 그 축제에서 주인이 되었던 것은 당연이 우리나라의 피리들 곧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였지요. 피리는 관악기 가운데 작은 것으로 향피리의 길이가 보통 30cm 정도고 세피리는 더 작아서 지름이 1cm도 안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악기 편성에서 중심될 만큼 피리는 작지만 당찬 악기입니다. ▲ 피리 종류 / 세피리, 향피리, 당피리(위로부터) 피리 가운데 향피리는 향악 연주에서 주 선율을 맡습니다. 특히 많이 연주되는 여민락, 영산회상(靈山會相), 수제천 따위에서 핵심 관악기로 연주되고 있지요. 향피리는 당피리(唐)와 함께 고려 때 중요한 관악기의 하나로 연주됐다고 《고려사》 권71 “악지”에 전합니다. 피리의 그림이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권132 “오례의(五禮儀)”의 악기도설인데 좀 더 자세한 향피리의 그림과 설명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7에 나옵니다. 당피리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강제성이 있는 곧 타율기능을 가진 법(法)이 없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겠지요.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착해도 다른 착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법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이란 건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어서 일반인은 다가서지 쉽지 않지요. 그래서 현대사회에선 변호사가 일반인을 대신해서 법에 관한 업무를 맡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엔 법 정보가 모두 한자로만 되어있기에 양반들을 빼고는 다른 사람이 대신 법 관련 일을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을 외지부(外知部)라고 불렀습니다. 외지부는 고려시대 노비 장부과 소송을 담당한 관청 도관지부(都官知部)에서 유래했지요. ▲ 김윤보(1865~1938)의 형정도첩(刑政圖帖) 일부, 백성들이 관에 소장을 내는 모습이 그려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정식 관원이었던 도관지부와 달리 외지부는 관원이 아니면서도 소송인에게 대가를 받고 소장을 대신 작성해주거나 법률 자문을 통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왕의 거동과 언행을 자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영조 임금이 최초의 한글 소설인 김만중(1637-1692)의 《구운몽》을 세 번 읽은 것으로 나옵니다. 맨 처음은 58살 때인 1751년으로 영조는 중국의 로맨스소설인 《평산냉연》에 대해 물어본 뒤 갑가지 《구운몽》의 지은이가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김만중이라고 하자 영조 임금은 《구운몽》의 지은이가 당시 문장가인 이의현(1669-1745)인지 알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구운몽도를 연구한 정병설 교수는 그만큼 영조임금이 구운몽의 문장이 우수하다고 본 것 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구운몽》의 지은이가 서포 김만중인지 알지만 조선시대에는 《구운몽》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있지 않아 임금조차도 그 지은이를 쉽게 알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영조 임금이 처음으로 구운몽 지은이에 대해 물어본 뒤 십년 쯤 지난 어느 날 또 다시 《구운몽》에 대해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운몽》이 문장 솜씨가 있고 좋은 글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구운몽》은 영조 임금만 좋아한 게 아닙니다. 당시 수많은 문인들도 《구운몽》을 좋아했고 춘향전 등에도 《구운몽》이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 최우성 / 창덕궁 후원 부용정의 가을(보물 제1763호 창적궁 부용정) ▲ 김덕중 / 가을색 짙은 연경당(보물 제1770호 창적궁 연경당) ▲ 한대희 / 비 내리는 불국사(사적 제502호 경주 불국사) ▲ 허애영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강남에 있는 G아르체갤러리(강남역 지하3층 신분당선 개찰구 앞)에서 사진으로 만나는 우리문화의 유산 2015년 문화유산채널 사진전시회가 오는 9월 18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한국에 있는 자연적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조화와 선인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는 전국의 문화유산들을 찾아다니는 문화유산사진작가들이 1년동안 담아온 사진들가운데 오직 한 작품씩만을 출품한 전시회다. 문화재가 없는 나라는 문화후진국이요, 문화재가 많은 나라는 문화선진국이다. 온 나라에 산재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한 때는 개발에 장애가 된다고 암암리에 훼손하고 없애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없어진 문화유산을 다시는 재현할 수 없다. 아무리 멋지고 세밀하게 만들어도, 그것은 모조품이 되는 것일 뿐. 한 번 훼손된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화 활짝 필 때 술이 한 말이거든 꽃 두 되를 주머니에 넣어 술독 속에 매달아 두면 향내가 가득하니 꽃은 매화와 연꽃 등 향기가 있고 독이 없는 꽃을 이 법으로 하되 꽃을 많이 술 위에 뿌려야 좋으니라. 유자는 술맛이 쓸 것이니 술독에 넣지 말고 유자 껍질을 주머니에 넣어 매달고 술독을 단단히 덮어 두면 향기가 기이하니라. 이는 전의이씨가 순 한글로 쓴 조리서 《음식방문니라》에 나오는 화향입주(花香入酒) 담그는 법입니다. 여성군자로 알려진 경북 영양 석계종택의 장씨부인이 지은 《음식디미방》과 견줄만한 조리서가 충남 홍성의 사운고택(士雲故宅)에 전해지는데 《음식방문니라》가 그 책입니다. 이 책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송철의 교수에 따르면 조리서로도 가치가 있지만 19세기말 국어 표기법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이 책은 흉년 때 빈민구휼에 앞장섰던 사운 조중세(士雲 趙重世 : 18471898) 선생의 종가에 내려오는 조리책으로 《음식방문(飮食方文)》 이란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글이란 뜻이지요. ▲ 사운고택의 숙부인 전의이씨가 쓴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이 책에는 화향입주법 말고도 두견주법, 소국주법, 송순주법,
[한국분화신문=김영조 기자] 대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六注比廛) 여기로다. / 일 아는 여리꾼(列立軍)과 물화 맡은 시전주인은 대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汗衫)달고 / 사람 불러 흥정할 제 경박하기 한이 없다. 위는 조선 현종 때 사람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가(漢陽歌) 일부입니다. 광통방(廣通坊, 현재 중구 서린동 근처) 부근에 있던 큰 다리 대광통교(大廣通橋)를 건너면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여 나라로부터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요품을 조달하던 시전(市廛)이 있었지요. 이 육주비전에는 여리꾼(列立軍) 곧 거간꾼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꾼이란 남는 이익(餘利)을 얻는다는 뜻과 함께 종로 거리에 열 지어 서 있다가 손님이 나타나면 흥정을 붙인다는 뜻의 열립꾼(列立軍)인 것이지요. 당시 조선시대 시전상인은 대개 한 평 남짓한 좁은 터에 최소한의 상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렸지요. 게다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상호를 적거나 상품을 알리는 간판도 없었고, 심지어 값도 써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시전 거리에서 헤매곤 했는데 이때 상인과 손님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여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전국의 역사학계 학자들이 대거 들고 일어섰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1,167명은 9일 오전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박근혜 정부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국정교과서는 교과서의 집필편찬은 물론 수정개편까지 교육부 장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독점적인교과서이다. 그런 까닭에 국정제는 정권이 원하면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고, 정권에 따라 교과서 서술이 뒤바뀌어 역사교육 현장에서 일대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이다.라고 강조했다. ▲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또 이들은 정부와 여당은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과 사회 각계의 반대에도 국정화 기도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학계와 교육 현장은 물론 사회 전반에 불필요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이에 우리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은 정부와 여당의 국정화 기도가 교육의 자율성과 중립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결국 미래세대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는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제 군기(軍紀, 군대의 기강)를 점검하므로 무릇 철야장(鐵冶匠, 쇠를 주물러 여러 연장을 만드는 장인) 죽장(竹匠, 대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장인)목공장(木工匠) 가운데 경박한 무리들이 이때를 틈타서 칼과 화살 같은 따위를 질 낮게 만들어 저자에 벌여 놓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꼬여서 매우 비싸게 값을 받습니다. 앞으로는 군사무기를 저자에서 사고팔지 못하게 하여, 한성부의 경시서(京市署, 시전-市廛을 감독하는 일을 하는 관서)로 하여금 엄격히 금지한 다음 위반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리게 하소서. 위는 《세종실록》 20년(1438) 11월 25일 기록입니다. 당시 군역을 치르는 백성은 갑옷은 물론 무기까지 준비를 해야 했는데 군기를 점검하면 질 낮은 무기를 만들어 파는 이들이 있어 이를 중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병조가 아뢰는 내용이지요. 지금이야 군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은 나라가 모두 준비해주지만 조선시대엔 군역을 치르는 백성이 직접 준비해야 했으므로 백성에겐 큰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에도 질 낮은 무기를 파는 이들이 잇었다.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러나 이때에는 그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정도였지만 요즘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