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다섯째인 백로입니다. 백로(白露)는 흰이슬이란 뜻으로 이때쯤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지요. 농촌에서는 백로를 풍년의 기준점으로 삼는데 한낮엔 여전히 더위가 가시지 않고, 아침저녁으론 이슬이 맺힐 만큼 서늘하여 냉온탕을 오가는 날씨로 이때 곡식들은 부쩍 여물어갑니다. 하루 햇볕은 쌀 10만 가마를 증산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지요. 매운 고추는 더 맵게, 포도 등 단 과일이 더 달게 익는 것도 이때입니다. 밤도 예외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맑아진 하늘에 유성과 운석의 활동이 자주 눈에 띄면 낮 동안 부족한 일조량을 메워주기 위한 하늘의 은혜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낭비하는 것은 한해를 허비하는 것이라 해서 궁궐 대신과 관원들의 음주 가무를 금했지요. 특히 세종대왕 시절엔 모든 잔치를 금하고 이를 어기면 누구나 벼슬을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던 때는 당연했을 것입니다. ▲ 오늘은 백로, 어머니의 포도지정이 그리워(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특히 이때 옛 사람들의 편지 첫머리를 보면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 하는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깨비모양을 한 조각상으로 ‘도깨비바우’로 불리는 전남 강진의 사문안석조상 (寺門안石彫像)은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면동마을 들머리에 있는 높이 122㎝의 석상입니다. 토동입석상이라고도 부르는 이 석상은 마을 수호신이자 절의 경계 표시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92년 3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된 석상입니다. 전남 강진군 작천면 갈동리 토동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4㎞ 지점의 언덕바지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양산 김씨(梁山 金氏)가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곳입니다. 마을 앞에는 예전에 월남사라는 절이 있어 토동마을은 절 안의 동네라는 뜻으로 ‘사문(寺門)안골’이라 불린 까닭에 사문안석조상(寺門안石彫像)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토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 북쪽에 위치한 앞 삼봉 중간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작은 봉우리가 달을 바라보는 옥토끼 모양으로 앞삼봉의 양쪽 봉우리는 토끼의 귀, 고랑에 있는 마을 앞의 논은 토끼의 입에 해당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도깨비바우는 큼지막한 둥근 받침 위로 4각의 석상이 놓여 있는 모습인데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특징이지요.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
[한국문화시문=김영조 기자] 한 일간신문의 기사 제목은 아빠의 Jean한 센스입니다. 아마도 아빠가 진바지를 입는 센스를 말하는 모양인데 어찌 영어 낱말에 형용사형 우리말 접미사 ~한을 붙여 이상한 말을 만드나요? 우리말 해치기에 전문가적 실력을 발휘하는 모양새는 참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옆에는 영어의 한글 표기 테일러드진과 보이프렌드진 히스키니진이 있고, Style도 빼놓지 않습니다. 또 글로벌SPA는 뭔가요? 젊은 친구들은 알까요? 한국에서 청바지로 불리는 옷감 진(Jean)은 리바이 스트리우스라는 사람이 착안해서 만든 것입니다. 1830년대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많은 이들이 금을 캐기 위해 모여들었고 주변 일대는 이른바 '천막촌'이 되었는데, 이때 리바이 스트리우스가 광부들의 바지를 질긴 천막용 옷감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미국의 농부나 목동들이 일옷으로 즐겨 입게 된데서 청바지가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축성이 없는 꽉 끼는 청바지를 입으면 몸이 숨을 쉴 수 없고, 몸에 압박을 주어 건강에 해롭다고 한의사들은 말합니다. 게다가 무릎에 구멍이 난 청바지는 특히 겨울에 관절을 차갑게 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전문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 가지 경치에 사람 눈 번쩍 뜨이고 / 千般景象醒人眼 아침에 창을 열면 저녁까지 안개로세 / 晨啓軒窓至暝煙 누가 알았으랴 천지의 맑은 기운을 / 誰識二儀淸淑意 산천이 가져다 여기에 전해 줄 줄을 / 山川持向此間傳 ▲ 한국 으뜸의 단아한 누각 보물 제528호 제청 청풍 "한벽루" (문화재청 제공) 이는 고산 윤선도의 “한벽루 벽 위의 주 문절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입니다. 제천 청풍 한벽루(보물 제528호)는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세운 누각입니다. 기둥 사이는 모두 탁 트여있으며 사방에 난간이 둘러쳐 있습니다. 윤선도가 청풍의 한벽루에 올라 지은 시는 이것 말고도 여러 편이 전해오며 건물 안에는 송시열, 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빼어난 경치에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풍 한벽루는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누각 건물로 건물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이덕일, 만권당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은 주로 한국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다. 민족사의 뿌리부터 왜곡시키기 위해서다. 먼저 조선총독부는 한국사를 반도사(半島史)로 축소시켜 놓았다. 한국사의 본무대였던 대륙과 해양을 삭제하고 반도사로 가두어둠으로써 한국인들 스스로 자국사를 반도사로 좁게 인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통치기구인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서 《동북아역사지도》는 조선총독부의 이런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만권당에서 내놓은 이덕일이 지은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책은 위와 같은 충격적인 고발장이었다. 일본 사학자도 아니고 한국인 사학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지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오적이 되살아온 것인가?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장의 지도가 국민들 앞에 펼쳐졌다. 동북아역사지도. 중국의 동북공정(현재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의 역사 연구 프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번의 부경 행차에 이두석장(泥豆錫匠)역청장(瀝靑匠)훈금장(燻金匠)백철장(白鐵匠)을 들려보내는 일은 신들이 지난날에 아뢰었습니다. 다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이번에 가는 사은사(謝恩使)와 진위사(陳慰使) 등은 중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듯하니 각 장인(匠人)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미처 전수(傳受)하여 익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훈금장과 백철장은 빼고 역청장과 이두석장을 보내어 이두석장에게 훈금하는 것을 겸해서 익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중종실록》 76권(1534) 2월 18일 기록으로 이두석장(泥豆錫匠)이란 장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 두석장 장인이 장석을 만드는 모습 이두석장(泥豆錫匠)을 지금은 두석장(泥豆錫匠)이라고 부르는데 목가구나 건축물에 붙여서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을 일컫습니다. 두석장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에도 나오지요. 한옥이나 목가구는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맞춤과 이음으로 완성됩니다. 거기다 나뭇결의 아름다움까지 더해지지만, 나무는 물기를 가지고 있어 계절에 따라 늘어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성 사촌마을 가로숲은 고려말 안동 김씨 입향조(入鄕祖)인 김자첨이 안동으로부터 이곳 사촌으로 이사를 와서 마을 서쪽의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만든 방풍림입니다. 사촌마을에서는 이 숲을 서림(西林)이라고도 부르는데 당시에 서쪽이 허하면 큰 인재가 나지 않는다는 풍수설이 있어 그를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하려는 뜻도 있다고 하지요. 비보 덕인지 사촌 가로숲에는 조선 선조(재위 1576∼1608)대에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이 출생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 마을을 지켜주는 의성 사촌마을 "가로숲" 사촌 가로숲은 전체 넓이 43,519㎡(약 11,817평)인데 이 지역은 천연기념물 제405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습니다. 현재 이 숲에는 나이가 300∼600년 정도 되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 종 5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왜가리를 비롯하여 소쩍새, 황조롱이 등 20여 종의 새들이 살고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땅이름 등을 지을 때 보통 한자말을 쓰는데 견주어 이곳의 “가로숲”이란 이름은 길거리를 말하는 한자말 “가로(街路)”가 아니라 가로세로의 바로 그 “가로”로 토박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박쥐는 짐승 가운데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동물인데 박쥐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박쥐는 짐승과 새가 싸울 때 짐승이 우세하자 새끼를 낳는 점을 들어 짐승 편에 들었다가, 다시 새가 우세하자 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새의 편에 들었다는 우화에도 잘 나타나있듯이 박쥐는 변덕이 심한 동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박쥐는 예부터 행복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활용품 속에 그 모양을 그려 넣거나 공예품, 가구 장식, 건축 장식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또한 박쥐를 길상(吉祥)무늬로 여겨 베갯모에 수놓았을 때는 다산을 뜻하였고 아들을 점지해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박쥐의 강한 번식력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모두 길한 동물로 여겼는데 특히 중국에서는 복(福)자를 크게 써서 박쥐가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걸어두면 복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박쥐를 뜻하는 한자 편복() 속에 들어 있는 복(福)자를 행운으로 해석한 것이지요. 박쥐를 하늘의 쥐를 뜻하는 천서((天鼠)라고 부르거나 신선한 쥐라고 해서 선서(仙鼠)라고도 불렀습니다. ▲ 박쥐무늬가 들어간 비치편복뒤꽂이(왼쪽), 명문장신상자 - 국립고궁박물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국 기원 4306년 세차 계축 8월 병신삭 10표일 경술 후손 준삼은 선조 여러 어른 신위 전에 삼가 고하나이다. 오곡이 무르익은 중추절을 맞이하여 여러 선조님의 높은 은덕이 새삼 느껴지며, 추로의 정이 간절합니다. 이에 간소한 제수를 드리오니 강림하시와 흠향 하시옵소서. 이는 당시로는 매우 드물게 한가위 차례 때 전남 나주 남파(南坡)고택 박준삼 선생이 올린 한글 제문입니다. 그뿐만 아니지요. ▲ 박준삼 선생이 손자의 혼례식 때 쓴 한글 고촉문 이 길한 날을 가려 6대 이래 종손인 경중이가 진주 후인 강대흥 씨의 장녀 정숙이와 혼례를 거행하였음을 삼가 신령님 전에 감히 고하나이다. 여러 가지로 살펴보아 우리 가정 종부로서 적합하게 생각하였슴으로 양가의 충분한 양해 아래 이 의식이 이루어젓아오니 항시 보살펴 주시사 험난한 세파를 헤엄쳐 가는데 큰 지장이 없이 영원무궁토록 앞길을 열어 주시기를 우러러 빌고 바라옵니다. 갑인 四월 一八일 불효손 준삼 아룀 박준삼 선생은 이렇게 손자 박경중의 혼례 때 고축과 훈계는 물론 이력서도 한글로 쓰고, 나주초등학교 교가 노랫말도 한글로 지었으며 한글학회 회원이면서 최현배 선생, 정인승 선생
[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음력 7월 15일로 명절의 하나인 백중(百中)입니다. 백중은 백종(百種)중원, 또는 망혼일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무렵에 과일과 푸성귀가 많이 나 백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지요. 또 중원(中元)은 도교에서는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한 해에 세 번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 했고, 이때 별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망혼일(亡魂日)은 이날 죽은 부모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백중이 되면 우선 집집마다 익은 과일을 따서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 다음 먹는 천신 차례를 지냈습니다. 특히 이날은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돈을 주는데 머슴들은 그 돈으로 장에 가서 술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물건도 삽니다. 그래서 백중장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지요. 또 이날은 그해에 농사가 가장 잘 된 집의 머슴을 뽑아 소에 태워 마을을 돌며 놀았는데 이것을 호미씻이라 합니다. ▲ 머슴들의 잔칫날 백중(百中, 호미씻이)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제주도에서는 일손을 쉬지 않고 바다에 나가 일을 더 많이 하는데 백중날에 살찐 해산물들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