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 선비들이 거처하는 사랑방에는 선비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구들이 있습니다. 사방탁자(四方卓子)는 그 가운데 선비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가구입니다. 다과(茶菓), 책, 가벼운 꽃병 등을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사방탁자는 선반이 너덧 층으로 되었으며 널빤지로 판을 짜서 가는 기둥만으로 연결하여 사방이 트이게 했지요. 사방이 터졌기 때문에 사방탁자라고 하는데 제일 아래층은 장(欌)형식으로 짜인 것도 있습니다.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 그리고 여백의 아름다움은 좁은 한옥 공간을 시원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는데, 이러한 단순함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현대적 감각에 가장 가까운 가구로 평가받지요. 또 사방탁자는 앙상한 뼈대 사이로 기품이 유유히 흘러 선비의 방을 더욱 선비의 방답게 완성해주고 있습니다. ▲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 그리고 여백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사방탁자 이렇게 조선 선비의 사랑방에서 사방탁자가 사랑받게 된 데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이 큰 몫을 했지요. 청자가 발달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에 오면 깨끗한 순백색의 백자가 발달합니다. 불교국가인 고려는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고 환상적이며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즐겼지만 조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이틀동안 광복 70년 기념 통일박람회 2015가 열리고 있다. 그 행사의 하나로 저녁 5시부터 통일부와 (사)물망초의 공동주최로 통일콘서트가 열렸다. ▲ 북간도아리랑을 부르는 남은혜 명창 다문화콘텐츠협회 장원재 회장의 사회로 먼저 무대로 오른 남은혜 명창은 온 배달겨레의 노래 아리랑을 다양하게 불러 청중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고향을 등지고 만주 북간도로 떠났던 동포들의 아픔을 노래한 북간도 아리랑을 시작으로 본조아리랑, 공주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고려인들의 한을 노래한 아리랑) 등을 불렀다. 이어서 무대에 오른 구미꼬김과 주세페김의 듀오아임은 주세페김이 작곡한 윤동주의 서시와 아리랑 아라리오를 환상의 화음으로 불러 청중들의 넋을 빼놓았다. 듀오아임은 한국과 일본 크로스오버 듀오로 한국의 문학과 역사를 소재로 한 인문학적 노래를 불러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윤동주의 서시를 부르는 듀오아임(구미꼬김과 주세페김) 이후 평양인민군예술학원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가 탈북해 현재 여주의 물망초학교에 재학중인 김운룡 학생의 아코디언 연주가 있었고, Magna F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100여 년 전만 해도 장고를 잡은 모갑이의 지휘에 따라 산타령패들이 소고를 치면서 대형을 만들어 나가고 목청을 드높이기 시작하면 소리판은 후끈 달아올라 주위의 구경꾼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는 것이 산타령이다. 그 산타령의 맥을 이어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 선소리 산타령 발표공연이 어제 5월 29일 늦은 3시에 서울 성동구 소웥아트홀에서 선소리산타령보존회 주최로 열렸다. ▲ 제자들과 산타령을 하는 황용주 명인 ▲ 해설하는 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왼쪽), 맛깔스러운 사회를 보는 방영기 전수교육조교 공연에 앞서 단국대 서한범 명예교수는 “무엇보다도 산타령은 다리밟기(답교) 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다. 구한말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가 행해졌는데, 이날 밤에는 서울, 경기 일원의 산타령패(牌)들이 전부 모여 <산타령>을 부르며 밤 새워 놀았다고 한다. 각 지역의 선소리패들이 각각의 특징을 살린 복색과 율동을 곁들이고, 저마다의 기량을 들어내면서 그곳에 참가한 시민들과 하나가 되어 목이 터져라 부르던 모습은 그 상상만으로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형조판서 김취로의 말을 듣건대 반인이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의 장의동 주위에 금송의 정령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가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에도 반쪽에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낼 길이 없다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위는 《영조실록》 6년 10월 11일에 나오는 우의정 조문명의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금란(禁亂) 곧 소나무 벌채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釀造, 술빚기) 금지는 나라에서 엄히 금하던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소나무 벌채를 한 사람을 쫓으니 치외법권 지대인 반촌으로 들어가 숨어 잡을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반촌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외부인들과는 혼인은 물론 사귐도 없었습니다. 반촌에 사는 반인들은 송도(개성)에서 온 사람들로 여러 풍속도 서울 사람과 달랐다고 하는데 이들은 백정은 아니지만 한성 안에서 소를 잡고 파는 것을 독점한 것은 물론 세금으로 바칠 고기를 성균관 학생들의 반찬을 하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게으른 버릇은 기름진 땅을 믿기 때문 상농(上農)도 중천에 해 뜨도록 잠에 빠졌다가 느릅나무 그늘에서 한바탕 술주정하고 나서 느리작느리작 소 한 마리 몰고 마른 밭을 가는구나." ▲ 단원 김홍도의 "쌍겨리". 국립중앙박물관 위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강진에 귀양 가서 쓴 '탐진농가(耽津農歌)'라는 시 가운데 일곱째 작품이지요. 이 시에는 "경기 지방의 마른 밭은 소 두 마리로 간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귀양 가서 본 전라도 강진에선 외겨리(독겨리)로 밭을 갈지만 경기도에서는 쌍겨리로 갈았기에 주석을 달아 놓은 것입니다. 대개 땅이 평평하여 쉽게 흙을 팔 수 있으면 외겨리로 갈지만, 화전 같은 경사지거나 흙이 단단하거나 돌이 많은 땅에는 쌍겨리로 갈아야 했지요. 그러나 혼자 소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괜찮지만 농민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니어서, 이웃과 함께 어울려 쌍겨리로 갈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이야 쌍겨리로 논밭을 가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지만 단원 김홍도의 “쌍겨리”와 김준근의 풍속화 “밭갈이와 씨뿌리기”에도 쌍겨리 그림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쌍겨리로 가는 곳이 많았음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는 보통 아이 어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하는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예전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육아를 했다고는 상상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였던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쓴 《양아록(養兒錄)》을 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아록》은 이문건이 손자가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16년 동안 직접 기르며 쓴 일기입니다. 이문건은 부인과 며느리가 머무는 아래채에 가 손자의 발육과정을 지켜보며 그 변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가누며 앉게 되고, 첫니가 나며, 기어 다니기, 걸음마 연습, 책 읽기 흉내 내기 따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손자 자라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12월 보름 뒤 능히 한 발짝 떼었다. 손으로 창문살을 붙들고 옆걸음질로 걸음마 연습을 한다. 점점 한 발짝씩 더 떼곤 하지만 자주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하는구나.”와 같습니다. ▲ 이문건(李文健)이 쓴 《양아록(養兒錄)》의 표지(왼쪽)와 글머리 드디어 돌을 맞이하여 돌잡이하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손자가 붓과 먹을 먼저 잡자 장차 문장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궁궐 안의 음식 만드는 일을 맡아 하는 곳은 사옹원(司饔院)이었습니다. 사옹원에는 소속 요리사를 관리 감독하는 행정관원들이 있었고, 그 아래에 요즘으로 치면 주방장인 숙수나 반감이 있었으며, 각 영역의 전문가들 곧 각색장(各色掌)들이 있었습니다. ▲ 수라간의 전문가들, 쌀 고르는 미모(米母)와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그 가운데 임금의 수라를 담당하던 대전수라간의 각색장들을 살펴보면 고기 요리를 담당한 별사옹(別司饔)이 14명, 물 긷는 수공(水工)이 6명, 물 끓이는 탕수탁반(湯水托飯)은 4명, 찜 요리를 하는 탕수증색(湯水蒸色)은 10명, 채소요리 전문 채증색(菜蒸色)은 6명이었지요. 또 굽는 요리의 적색(炙色)이 6명, 밥 짓는 반공(飯工)이 10명, 술을 담그는 주색(酒色) 6명, 쌀을 고르는 미모(米母)가 6명, 떡을 빚는 병공(餠工)이 2명, 두부 전문가 포장(泡匠)을 4명 두었습니다. 그밖에 음식전문가는 아니지만 상차림만 전문으로 했던 상배색(床排色)은 8명, 음식을 보관하는 장자색(藏子色)은 6명, 은그릇은 물론 각 곳간의 주방 기구를 관리ㆍ보관하는 성상(城上) 10여 명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천보산 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경기도 양주 회암사는 삼산양수(三山兩水, 천보산ㆍ삼각산ㆍ수락산과 임진강ㆍ한강)에 자리 잡은 절로 지공선사가 터를 잡고 나옹선사가 도량을 연뒤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와 함께 대대적인 중창을 한 왕실불교문화의의 중심이었습니다. 한때 스님만 3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던 회암사는 궁궐과 견줄만한 건물터와 왕실에서 사용되던 도자기가 출토된 곳입니다. ▲ 안성 봉업사터에서 출토된 청동북(고려 때인 1217년 만듬, 경기보물전에서) 뿐만 아니라 대각국사 의천이 초조대장경을 보완하기 위해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10여년의 작업 끝에 속장경을 편찬한 곳은 경기도 장단의 흥왕사였으며, 안성의 봉업사 역시 대표적인 고려시대의 왕실 절이었습니다. 불교나라였던 고려는 거란ㆍ몽고 등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해 초조대장경ㆍ팔만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경기(京畿)’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읍을 지키는 근본의 땅(根本之地)으로 자리했습니다. 성리학을 수용한 조선시대에도 왕실중심의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수종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와 문정왕후가 발원한 불화, 남양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옛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서 보고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들이 쓴 문헌으로 짐작할 뿐이지요. 특히 세시풍속을 담아 쓴 책들로 그때를 상상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세시풍속지(歲時風俗誌)들은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 쓰인 것으로 판단되는 정조 , 1819년(순조 19)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한양(漢陽)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1849년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들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경도잡지(京都雜志)》의 내용을 보면 제1권 풍속에는 건복(巾服, 두건과 웃옷)·주식(酒食)·과과(果瓜, 과일과 오이)·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마려(馬驢말과 당나귀)·문방(文房)·화훼(花卉, 꽃)·유상(遊賞, 꽃놀이)·성기(聲妓, 노래를 부르는 기생)·시문(詩文)·서화(書) 등 주로 당시의 여러 문물제도를 19항목으로 나누어 풀이하고 있지요. 또 제2권 세시에는 원일(元日, 설날)·입춘·상원(上元)·2월 초하루·한식·중삼(重三, 삼짇날)·4월 파일·단오·6월 15일·복(伏)·중추(中秋)·중구(重九)·동지·제석(除夕, 섣달 그믐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어제 5월 20일 저녁 5시에 경복궁 앞 법련사 내 불일미술관에서는 제20회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개막식이 있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뀐다는 세월을 오직 불교사진을 담기 위해 산사를 찾았던 회원들이 다시 전시회를 연 것이다. ▲ 승무를 추는 이승희 명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열창하는 심진스님 ▲ 제9회 청소년불교사진공모전 대상 시상식 모습 ▲ 인사말을 하는 전제우 회장, 축사를 하는 청전스님과 안장헌 고문(왼쪽부터) ▲ 작품에 매료된 관람객 ▲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 모습 개막식전 행사로 문화공연이 먼저 있었다. 이승희전통무용연구소장 이승희 명인이 승무를 추었고, 가수 박희진 씨가 산사 가는 길을 불러 재청을 받은 데 이어 서울만돌린체임버 단원의 연주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봉선사 심진 스님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열창하여 참석자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문화공연이 끝난 뒤 제20회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과 함께 한 제9회 청소년불교사진공모전 대상 시상식이 있었고 이어진 개막식에서는 한국불교사진협회 전제우 회장의 인사말과 인도 다람살라에 계신 청전스님, 안장헌 고문의 축사가 있었다. 이번에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