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돌이켜 여러 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할 것인가? / 등불을 돌려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이 안고서 / 벽련화 한 곡조를 시름으로 함께 섞어서 연주하니 /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 망주석에 천 년 만에 찾아온 이별한 학이 울고 있는 듯 / 아름다운 여인네의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날 가락 그대로 이건만은 / 연꽃무늬 휘장이 드리워진 방 안이 텅 비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리겠는가? / 간장이 구곡되어 굽이굽이 끊어질 듯 애통하구나.” ▲ ≪교주가곡집 校註歌曲集≫의 <규원가(閨怨歌)> 위 시는 조선 중기에 지어진 가사 <규원가(閨怨歌)>를 현대어로 뒤친 일부인데 ‘원부사(怨夫詞, 怨婦詞)’ 또는 ‘원부가(怨婦歌)’라고도 합니다. ≪고금가곡 古今歌曲≫과 ≪교주가곡집 校註歌曲集≫에 실려 전하지요. 작자는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과 ≪교주가곡집≫에는 허난설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에서는 <원부사>를 허균(許筠)의 첩 무옥(巫玉)이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던 자신이 늙어버리자 남편은 떠나가고 이미 떠난 임인데도 그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일본 중위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 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 일본군이 불을 질러 폐허가 된 제암리 마을 (제암리3ㆍ1운동순국기념관) 이는 민간인 학살현장인 화성 제암리교회의 참사 현장을 목격한 전동례 할머니의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은 학살 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두 번 죽인 셈이지요. 이때 갓난아이를 업은 김씨 부인 (1899 ~ 1919. 4.15)도 현장에서 참혹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씨 부인은 남편 강태성과 함께 화성 출신으로 제암리교회 참사가 일어나기 전인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가 쓰던 칼에는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장도(粧刀)가 있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장도 하나씩을 품에 지니고 다녔지요. 호신과 함께 장식용으로 장도를 차는 풍습이 생긴 것은 고려 때부터인데,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널리 보편화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혼인을 축하하거나 어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장도를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받는 이를 온갖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바람이 담겨 있었지요. 장도는 일상생활에 쓰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하거나 치레(장식)의 구실도 하는데, 부녀자가 정절을 잃을 위험이 닥쳤을 때는 장도로 자결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장도는 패도(佩刀), 운검(雲劍), 패검(佩劍)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가운데 보통 허리 따위에 차는 것을 패도(佩刀)라 하고, 특별히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은 낭도(囊刀)라 했지요. 또 모양으로 볼 때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칼의 모양이 반달처럼 굽어있는 모양의 패도와 칼이 일직선인 운도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칼 장도(粧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도는 칼자루, 칼날, 칼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때 칼날의 길이는 3~5치(1치 약 3.03cm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답장을 올립니다. 소생은 시문을 지어,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세상에 전해지기도 바라지 않으며, 소생 혼자 즐길 뿐입니다. 시문 한 구절을 억지로 귀인에게 빼앗겨서, 그것이 다른 이에게 읽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져 땀이 솟는 것을 그치지 못합니다. 그간 지은 여러 시들은 지금 모두 한바탕 불길에 태워버려, 한 편의 종이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소생이 귀인에게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깊게 가지고 있지만, 소생의 시문을 남에게 보이기 원치 않는 것은 곧 평소의 저의 뜻이므로, 비록 기쁨을 얻는다 하더라도 소생의 뜻에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해량하소서." ― <답상서答上書> ▲ 〈이언진 시〉, 『근묵』, 행서, 22×9.6㎝,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이 편지는 역관 이언진(李彦, 1740~1766)이 서얼시인 성대중(成大中)에게서 받은 자신의 시문을 보고 싶다고 한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이언진은 평소 자신의 시문이 남에게 인정받거나 심지어 읽히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이언진은 자신이 쓴 글을 ‘유희고(游戱稿)’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누구에게 보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어제는 얼레빗이 드디어 3,000회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저 겨레문화가 좋고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 10년이 넘고 3,000회에 다다른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그만 두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발송시각은 다가오는데 뭘 쓸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을 때와 웹호스팅의 문제로 이미지가 뜨지 않을 때의 초조함은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자초하나 자책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레빗을 기다리는 수많은 독자들을 생각하자니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 키 쓰고 소금받던 어린 시절(뉴스툰, 왼쪽), 오줌싸개 치료법(1932년. 9. 28. 동아일보) 그동안 쓴 글들을 보면 “새해 첫 토끼날 누가 먼저 대문을 열까?”, “오줌싸개 시간표와 재미난 치료법”, “수박을 훔친 주방장, 곤장 10대 맞고 귀양 가다”, “마누라 치마까지 벗겨가던 투전” 따위 민속과 관련된 얘기들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신 차리고 빚어야 하는 궁중 떡 혼돈병”, “머리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살쩍밀이”, “출장 가는 소반 공고상을 아십니까?” 따위의 의식주 관련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또 “도공의 익살, 백자철화끈무늬병”, “주인공은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고 발행한 백지 임명장 “공명첩(空名帖)”이 있었습니다. 공명첩에는 먼저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양역(良役)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 따위가 있었지요. 이 제도는 임진왜란 중에 나타난 것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 또는 납속(納粟)이라 하여 흉년이나 전란 때에 나라에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나라에 돈이 없거나 군량이 부족할 때, 또는 흉년으로 굶어 죽는 백성을 도와주기 위해 수시로 발행했으며, 심지어는 절의 중수 비용을 위한 것으로도 남발하였지요. 그런 과정에서 관리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은 더욱 고통스러워했습니다. ▲ 나중에 써서 이름이 다른 글씨보다 작은 최춘건의 공명첩(전북대 박물관) 면역·면천·면향을 위한 공명첩은 신분의 오르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실제 관직을 주지 않고 발행하는 이름뿐인 고신공명첩(告身空名帖)도 많았지요. 특히 공명첩은 요호부민 곧 부자들에게 돈을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전통혼례에서 신랑 일행이 혼례를 올리러 신부집으로 향할 때, 목기러기를 들고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기럭아비 또는 안부(雁夫)라고 합니다. 신랑이 신부집 안마당에 준비한 초례청(醮禮廳)에 사모관대로 정장을 하고 들어서면 신부집에서는 전안청(奠雁廳)이라 하여 낮은 상 위에 붉은 보를 깔고 뒤에 병풍을 쳐두지요. 신랑이 이곳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면 기럭아비가 기러기를 신랑에게 넘겨줍니다. ▲ 전통혼례의 "전안례"에 쓰이는 목기러기(한국문화대백과) 신랑은 이것을 받아 상 위에 놓고 목기러기를 향해 두 번 절을 합니다. 이런 예식을 기러기에게 제사 지낸다는 뜻으로 “전안지례(奠雁之禮)”라 하지요. 이것은 남자가 부인을 맞아 기러기와 같이 백년해로를 하고 살기를 맹서하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이 한번 배우자로 택하면 평생 동안 다른 기러기를 돌아보지 않으며, 한 쪽이 죽으면 다른 쪽이 따라 죽는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전안지례는 혼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남자가 하늘에 부부되기를 맹세하는 의례인 것이지요. ▲ 김홍도 《풍속화첩 》가운데 <신행>, 보물 제527호, 총사초롱 뒤 기럭아비가 목기러기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지게는 우리 겨레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 지게를 가지고 노는 민속놀이가 충남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데 바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7호 “공주선학리지게놀이”가 그것입니다. 이 놀이는 산골이어서 농업의 이동수단으로서 지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마을 사람들이 힘들게 지게를 지고 이동할 때 이를 좀 더 즐겁게 해보기 위해 놀이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 우리 겨레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 "지게" 지게 놀이는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흰색 한복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지게와 농기구 등을 든 채 길게 줄지어서 하게 됩니다. 순서는 지게작대기 걸음마와 작대기 고누기, 지게 힘자랑, 지게지네발걷기, 지게작대기장단, 지게풍장, 지게상여, 지게호미끌기, 지게꽃나비로 구성됩니다. 이 가운데 지게작대기 걸음마와 작대기 고누기는 지게와 작대기에 각각 올라 걸음마를 하고 작대기 위에 오래 버티기를 하는 놀이지요. ▲ <공주선학리지게놀이> 가운데 "지게꽃나비" 모습 (문화재청 제공) 또 지게지네발걷기는 지게를 연결하여 그 위를 걷는 것이고, 지게호미끌기는 두레를 마치고 호미를 지게고리에 걸고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청명(淸明)인데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생겼다. 이날 성묘를 간다. 옛날에는 한 해에 네 번, 곧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 가을에는 한가위,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를 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청명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했다. 수령들은 한식(寒食)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 국가 의식을 다졌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다.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세상이 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어떤 때는 완전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병 아닌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니, 누가 다시 이런 제 심정을 알아주기나 하겠습니까? 소문을 들으면, 북쪽에 큰 소요가 있고 또 청성의 변이 있다고 합니다만, 각 신문들은 검열을 받고 구속을 당하는 상황이라 사실을 보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온 세상이 귀가 멀고 눈마저 멀어 마치 개벽이 되는 와중의 혼돈 상태와 같으니, 가슴을 치며 미친 듯이 울부짖을 뿐입니다.” ― 여이난곡건방與李蘭谷建芳 ― ▲ 우국지사 매천 황현 위는 1910년 7월 28일에 심교(心交,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벗)를 나누었던 이건방(李建芳, 1861~1939)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황현은 갈수록 세상이 혼란스러워져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말하며 차마 망국의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쓴지 얼마 되지 않아 황현의 예견대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맙니다. 황현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1910년 음력 8월 6일 새벽녘 자결했습니다. 그는 절